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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목차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링크

2. 송악의 잠룡 왕건 - 링크

3. 궁예의 관심법과 왕건의 결심 - 링크

4. 패강의 눈물 - 링크

5. 삼국통일 - 링크

6. 광종의 히든카드 - 링크

7. 고려판 사법고시 - 링크

8.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 - 링크

9. 절정의 외교를 보여준 외교의 신 서희 - 링크

10. 천추태후와 강조의 변 - 링크

11. 거란의 2차 침입과 몽진 - 링크

12. 양규와 하공진 - 링크

13. 강감찬과 귀주대첩

 

 

<지난 편 역사, 한 줄 요약>

 

1. 흥화진에서 고려 장수 양규를 제압하지 못한 채 개경으로 내려간 거란군은 양규의 공격에 후방 진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2. 양규는 칠백의 결사대로 그 열 배가 되는 거란군을 물리치며 곽주성을 탈환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에도 양규는 후방에서 거란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3. 한편, 남쪽으로 몽진 간 현종에게 하공진이 찾아왔다. 하공진은 자신이 거란 성종에게 직접 가서 회군할 것을 설득하겠다고 했다.

 

4. 하공진은 거란 성종에게 가서 전쟁 명분인 '강조'가 죽었으니 돌아갈 것을 요청했고, 마침 고려에 더 이상 오래 머물기 힘든 상황이었던 거란 성종은 이를 승낙했다. 단, 조건이 2개 있었다.

 

5. 하나는 현종이 거란 땅까지 친조를 오는 것. 다른 하나는 강동 6주를 거란에게 넘기는 것.

 

6. 우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중요했던 고려는 이를 승낙했다. 이에 거란 성종은 회군을 시작했다.

 

7. 그러나 거란군을 고이 돌려보낼 수 없었던 양규는 끝까지 거란군을 공격했고 포로로 잡혀가는 고려 백성 3만여 명을 구했다. 그리고 거란 황제의 주력부대와의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8. 하공진이 마음에 들었던 거란 성종은 하공진을 거란으로 데려갔으나, 하공진은 끝내 거란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거란 최정예 군대에 맞선 70대 노인 강감찬

 

고려를 2차 침공하고 돌아간 후에도 거란(요나라)은 계속 국지적인 군사도발을 했다. 고려는 거란 사신을 억류하거나, 송의 연호를 사용하며 강경책으로 맞섰다. 또한 거란은 계속하여 고려 국왕 현종의 친조를 압박했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곧 거란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3차 침공을 할 것이라는 걸.

 

“거란은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반에 대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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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2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거란의 3차 침공을 앞두고, 고려군 총사령관인 상원수에 임명된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채, 거란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은 1018년 9월, 전국에 걸쳐 말을 징벌했다. 10월에는 마침내 고려에 선전포고했다. 

 

“작전명은 개경 직공이다. 속전속결로 개경에 진입하여 대마(고려 왕)를 잡는다. 빠른 진군을 위해 보급도 최소화하고, 군사의 숫자도 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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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아 주시오!

 

거란은 오직 개경만 바라봤다. 기동성을 위해 동평군왕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병력도 2차 침입 때의 1/4 수준인 10만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10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직속 부대 등 당대 최강대국 거란의 최정예 부대로만 이루어진 최강의 군대였다.

 

소배압이 이끄는 최정예 거란군은 그해 12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마주 서게 되었다. 군대도 군대였지만, 소배압이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은 고려군이 긴장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소배압은 당대 최고의 장군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송나라를 굴복시킨 송-요 전쟁에서도 굉장한 활약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그는 25년 전 거란의 고려 1차 침입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소손녕의 친형이었으며, 2차 침입 때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개경을 함락시키고 궁을 불태우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거란 최고의 장군이자 최고의 고려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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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 말로, 고려를 무릎 꿇려주마.

 

이런 소배압을 상대로, 강감찬은 70세가 넘은 고령의 몸으로 고려를 지켜내야 했다. 놀라운 점 또 하나는 강감찬이 문인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강감찬을 장군으로 칭하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과 과거 시험을 보고 관료가 된 문인이었다.  

 

자세한 기록이 남이 있지 않아 깊게 파고들 순 없지만, 그럼에도 강감찬이 고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에는 전쟁에 대한 그의 지략이 현종에게 대단한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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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승리해 주시오!

 

 

강감찬에 대한 설화

 

강감찬은 948년 오늘날의 서울 낙성대 근방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강감찬 집에 별이 떨어 진날 그가 태어났다고 하여, 근동이 ‘낙성대(떨어질낙, 별성)’라고 불리게 되었다. 

 

별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는 설화 외에도 강감찬에 얽힌 설화는 한국구비문학 대계에 기록된 것만 60여 개에 이른다.

 

강감찬과 관련된 호랑이 설화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강감찬이 한양 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일이다. 한양은 호랑이의 잦은 출몰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호랑이에 의한 인명피해가 거듭 보고되자 강감찬이 아전을 불러 서찰 한 장을 내밀었다.

 

“북문 바깥에 나가면 중 하나가 산 아래 바위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이 서찰을 전해주면 너를 따라 올 것이다.”

 

정말로 북문 밖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고, 강감찬의 서찰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아전을 따라왔다. 중이 관내에 들어서자, 강감찬이 천둥 같은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어찌 인간의 탈을 벗지 않고 내 앞에 온 것이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강감찬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 중은 호랑이로 변하였다. 집채만 한 몸집의 호랑이가 한양이 떠나가라 포효했지만, 강감찬은 오히려 호랑이를 더 대차게 꾸짖었다.

 

“어허! 시끄럽다. 이놈아. 지금 당장 네 무리를 이끌고 이곳을 떠나거라.”

 

그날 이후, 한양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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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에 있는 강감찬 사당 ‘안국사’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모든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 영웅담은 구전을 통해 전해지며 부풀려지기도 한다. 후대에도 회자되는 영웅은 후세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도 큰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강감찬 장군이 왜 우리 민족에게 불멸의 존재가 되어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개경에 도착한 거란군과 당황한 소배압

 

강감찬은 거란이 다시 침공해 올 것을 확신했고, 철저한 준비를 해왔었다. 철저한 대비를 한 후 적을 맞이하니, 전쟁의 초반 양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적군은 흥화진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개경으로 곧장 향할 가능성이 높다. 흥화진 옆의 삼교천에서 수공을 펼칠 것이다. 준비한 소가죽을 동아줄로 꿰어 물을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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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예상은 적중했다. 거란군은 개경만 바라보며 전진했고, 강감찬이 파 놓은 물 무덤으로 들어섰다.

 

“지금이다. 동아줄을 끊어 물줄기를 터트려라!”

 

예상치 못한 고려의 수공에 거란은 전쟁 초반부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타격을 입은 건 거란군 선발대 정도뿐이었다. 전열을 재정비한 거란군은 개경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적의 개경 직공 작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개경에 상당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앞만 보고 달리는 적의 후방까지 공격했다. 거란군은 앞뒤로 공격당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군사를 많이 잃고 상황이 좋진 않지만, 개경이 백 리 앞이다. 조금만 힘을 내자. 대마만 사로잡으면 우리가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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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츠가이!

 

거란 최정예 10만 군대가 개경을 향해 가까이 오자, 고려 신하들과 백성들은 불안해했다.

 

“폐하, 일단 남쪽으로 몽진을 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고려 현종이 누군가? 태어날 때부터 백성들도 겪지 않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왕이다. 게다가 이제는 즉위 10년 차에 접어들어 노련함과 담대함까지 갖추게 된 왕이었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성 밖의 백성들을 성 안으로 들여라. 적에게 청야전술로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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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군사들은 개경 근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 모았고, 성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거란군이 자원으로 쓸 수 있을만한 건 쌀 한 톨,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았다. 물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물들에도 독을 탔다.

 

개경에 도달한 소배압은 예상치 못한 고려의 대응에 크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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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총사령관)! 어찌하오리까. 오직 개경만 보고 달려오느라 보급이 전무한 상황입니다. 전투가 아니라 굶어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다 강감찬이 보낸 군사들이 저희의 후미로 바짝 붙은 상황입니다.”

 

“이 작은 나라 고려를 꺾는 것이 이리도 어렵단 말이냐! 폐하께서 날 가만두지 않으실 것인데. 큰일이로구나.”

 

“도통! 일단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하셔야 할 줄 아뢰옵니다. 그리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 철군해도 우리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거란은 다시 한번 고려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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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활한 고려 놈들!!

 

 

최후의 고려거란전쟁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으로 몰아갔다. 강감찬은 그곳에서 거란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곳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다.

 

“적들을 귀주로 몰아라. 적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우리 고려를 넘볼 수 없게 전멸시켜야 한다. 그곳이 바로 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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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년 2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고려군과 마침내 귀주에서 만났다. 이 귀주만 넘는다면 거란군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때문에 거란 병들의 몸은 지쳤지만, 마음만은 들떠 있었다. 그때였다. 거란군이 헛웃음을 쳤다. 

 

고려군이 성을 비우고 벌판으로 나온 것이다. 

 

“하하핫~ 저것들이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지금 우리 거란과 평지에서 대회전(양측이 특정 시기에 일정 장소에 모여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을 하겠다는 것이냐? 아주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빨리 저 늙은이의 목을 베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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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거란군의 반응은 충분히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하고 일생을 약탈과 전쟁으로 보낸 거란군과 드넓은 벌판에서 전면전으로 맞짱을 뜬다는 건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탱크군단(거란군)과 보병(고려군)의 싸움이랄까. 

 

하지만 강감찬에겐 생각해 놓은 작전이 있었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강감찬의 목표는 적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성 안에서 싸우면 더 유리한 지형에서 싸울 수 있고, 이겼을 경우 적을 격퇴할 순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적을 섬멸할 순 없었다. 적이 다시는 고려를 침략할 수 없도록 적을 ‘섬멸’하기 위해선 성 밖으로 나와 싸워야만 했다.

 

“적들을 섬멸시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내 나이 칠순이 넘었다. 나라와 백성의 은혜를 입은 축복 받은 삶이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소배압이여. 여기서 우리의 끈질긴 악연을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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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은 검차를 앞세워 거란군과 싸웠지만, 2차 전쟁에서 이미 검차를 겪어본 거란군은 검차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초반 대결은 기마병을 앞세운 거란의 우세였다. 

 

고려를 죽여라.PNG

가자! 고려를 죽여라!!

 

거란군에게 밀리지 마라.PNG

거란군에게 밀리지 마라!

 

게다가 거란군 진영에서부터 고려군을 향해 불어오는 겨울의 거센 바람은 고려군을 더욱 힘들게 했다. 맞바람 때문에 고려군의 화살 공격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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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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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버텨라. 적들은 심신이 지쳐있다. 반드시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

 

전쟁도 인생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준비하고 버틴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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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의 역습

 

강감찬에게는 두 가지 호재가 찾아왔다. 전세 역전의 서막이었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거란군을 향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바람이었다. 거란군의 화살이 전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거란군이 제대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동시에 적의 후방에서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 최강의 기마병들이 나타났다. 무려 1만의 기마대였다. 거란의 2차 침공 이후, 고려가 모든 걸 쏟아부으며 만든 기마대였다. 강감찬이 노린 것은 이것이었다. 검차를 앞세운 고려군이 앞에서 거란군을 막고, 뒤에서 기마병이 공격하여 쓸어버리는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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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갑기병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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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강감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것까지 예측하고 귀주 벌판에서 거란군을 맞이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거란군은 출구가 막힌 채로 앞쪽에서는 검차 공격과 함께 고려군이 내뿜는 화살비, 뒤쪽에서는 고려 기병의 돌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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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을 모조리 죽여라!

 

앞뒤로 휘몰아치는 거센 공격에 거란 최정예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전의를 상실한 거란군은 군장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싸우면 다 죽는다. 일단 도망치자!”

 

“일단 살고 보자. 강만 건너면 고향이다.” 

 

대오가 무너지자, 거란군은 무력해졌고, 고려군은 본격적으로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다시는 거란이 고려를 넘볼 수 없게 하라. 단 한 놈도 살아서 이 땅을 벗어나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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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은 고려군의 칼과 화살에 죽고, 도망가다 깔려 죽으며 전멸 수준의 패배를 당했다. 소배압과 함께 고려 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군사는 수천 명 정도였다. 최정예 군사 10만 명 중 겨우 수천 명. 이것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라는 ‘귀주대첩’이다. 

 

소배압 철수1.PNG

소배압 철수.PNG

내가... 이 거란이 패배하다니...

 

거란 성종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패장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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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악!!

 

그러나 선황제의 장인이자 자신의 매제인 동시에 장인이기도 한 소배압을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모든 관직을 추탈하는 것으로 처벌을 내렸다. 

 

강감찬은 귀주대첩 이후, 고려의 영웅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날, 그는 자신의 손을 마음대로 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현종이 너무나도 기뻐하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하루 종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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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강감찬은 천수를 누리며 지금의 국무총리인 문하시중까지 올랐다. 귀주대첩이 끝나고 12년 후, 1031년 6월에 강감찬을 사랑했던 군주 현종은 만 3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3개월 후, 강감찬도 만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현종 치세에 구국의 영웅이었던 강감찬은 현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배향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이름을 떨친 공신들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놓은 것을 뜻한다)  

 

귀주대첩은 단지 고려의 승리만이 아니었다. 귀주대첩 다음 달부터 처세술에 능한 여진족들이 고려에 조공하기 시작했다. 여진족뿐 아니라 각국에서 고려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고려와 친교 하기를 원했고, 서로 조공을 바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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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송나라를 방문한 고려 사신들은 거란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 초대받고 놀라운 제안까지 받았다.

 

“귀주대첩은 귀국의 승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승리요. 혹시 우리와 힘을 함께 거란을 함께 치는 것이 어떻겠소? 송과 고려가 힘을 합친다면 거란을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도 있을 것이요.”

 

고려의 대답은 ‘노’였다. 

 

이유가 뭐였을까.

 

유일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거란이 귀주대첩으로 약해지면서 동아시아에는 고려, 송나라, 거란 이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 고려는 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동아시아에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후 역사를 보면, 이 선택은 옳았다. 힘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균형 외교는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왔다. 이 평화는 고려 백성뿐 아니라 송나라, 거란, 여진의 백성까지도 폭넓게 누린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였다. 귀주대첩의 의미는 우리 민족을 지킨 것과 더불어 당대 사람들에게 이 백년의 평화를 가져온 데에 있다.  

 

<끝>

 

 

※ 역사의 빈틈은 개연성을 고려하여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꿨음을 알린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역사킹>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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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찌라시 한국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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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찌라시 세계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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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