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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소설 『욕조가 놓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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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작가정신>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어느 날 이른 새벽, 고조선의 뱃사람 ‘곽리자고’는 언제나처럼 일을 하기 위해 강가 나루터로 나갔다. 그가 배를 강물 위에 띄우고 노를 젓기 시작했을 때였다. 하얀 머리를 한 남자가 술병을 손에 들고 강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향해 한 여인이 뛰어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인 듯한 여인은 남자에게 강에 들어가지 말라고 애절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갔다. 그는 끝내 물에 빠져 죽었다.

 

남편을 집어삼킨 강가에 앉아 한참 동안을 울던 여인은 어디선가 ‘공후(악기)’ 하나를 들고 왔다. 그녀는 공후를 타며 구슬프게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여인은 남편이 들어간 강물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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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고조선의 뱃사람 ‘곽리자고’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이 안타까운 사건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여옥은 공후를 꺼내 들고 남편에게 전해 들은 그 여인의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 공무도하가 -

 

 

그녀와의 첫키스는 코카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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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vN>

 

그녀와의 첫 키스의 순간, 그것은 고대 마야의 오래된 신화가 살아 숨 쉬는 피라미드 언덕에서 이루어졌다. 코카인과 같아, 키스는...... 하고 당신은 말했다.

 

당신은 언젠가 코카인을 흡입해봤다는 사람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마약이 몸 안에 흡수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것은 모든 감각기관이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것이었다. 물잔에 따르는 물소리가 폭포 소리처럼 들리는 것, 누군가의 손길이 피부에 슬쩍 닿았을 때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 등. 그렇다면 그녀와의 키스는 코카인 같은 것이었다. 당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대는 순간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것. 당신 몸의 모든 솜털이 바짝 긴장해서 일어서고, 피부가 일제히 숨구멍을 터뜨리는 것.

 

당신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고 그녀의 혀가 당신의 혀를 맞이하기 위해 조심조심 다가올 때, 당신의 감각은 미세한 돌기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감지할 정도로 예민하게 벼려졌다. 신경들은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혈관의 피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달은 지상에 너무 가까이 내려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세상은 세상의 첫날처럼 환했다.

 

당신의 사랑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당신의 손이 그녀의 손위에 포개진 것은 언제이고 당신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고, 당신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간 것은 언제였는가. 코카인을 흡입한 것만 같았던 당신과 그녀의 첫 키스는?

 

그런데 기억해야 하는가, 그 순간을?

 

 

카리브해에서 만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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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쯤, 서른일곱 살의 당신은 카리브해에서 그녀를 만났다.

 

종합상사에 근무하고 있는 당신에게 회사는 카리브해로 출장을 가라고 지시했다. 마야의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었다. 출장 업무에 지친 당신에게 주말 휴식이 찾아왔을 때였다. 같이 출장 온 50대 중반의 상무 이사가 고혈압 증세를 호소하며 뻗어버렸다. 그 소중한 시간을 상무 이사 옆에서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하던 당신은 호텔 방을 나섰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카리브해의 밤바다였다. 도시 치안이 좋지 않으니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현지 여행사 직원의 말조차 당신을 말릴 수 없었다.

 

낯선 도시에서 당신은 바다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호객꾼들까지 문제였던 그때, 그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대단한 인연이었다. 당신은 그곳에서, 가이드로 일했었다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당신을 바다로 안내했다. 그녀 역시 바다로 가고 싶었으나 혼자 갈 수 없었기에 마침 만난 한국인 남자의 동행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당신과 그녀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이뤄졌다.

 

바닷물에 반사된 달빛은 그녀의 얼굴에서 부서졌다. 그녀는 달이 만든 바닷물 위의 하얀 길을 홀린 듯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당신은 문득, 물 위를 걸었다는 이천 년 전의 갈릴리 사람 예수를 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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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바다 위로 하얀 길을 만들었다. “저 달빛이 만든 길 위에 올라서면 어딘가로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당신과 그녀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그녀가 깼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깊고 나른했다.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운무처럼 피어올랐다. 당신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달빛이 만든 흰 길을 보았을 때, 그 길이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 있음을 느꼈을 때 어쩌면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방파제에 걸터앉았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어른거렸다. 당신에게는 그 모습이 바다가 그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였고, 바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바다를 향해 넋두리를 늘어놓듯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가끔 울음기가 끼어들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눈치챘다.

 

그녀는 혼자 사는 여자였다. 두 해 전까지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녀가 멕시코에서 가이드일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일정에 맞춰 휴가를 낸 남편이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녀는 멕시코 공항에서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다가 그들이 탄 비행기의 추락 소식을 들었다. 생존자는 없다는 말과 함께. 

 

그 이후로 그녀는 가이드 일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 사건이 그녀의 삶을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현실감 없게 만들었고, 바다를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허망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삶은 그저 장송의 세월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녀의 이야기, 당신에게 하는 것이 아닌 바다에게 하는 혼잣말 같은 것을 들으며 낮고 무거운 음악이 배음처럼 깔리는듯한 착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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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녀가 정말로 물속으로, 혹은 물 위로 걸어갈 것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당신은 여차하면 그녀의 몸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긴장했다.

 

당신은 그녀에게 숙소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양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당신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녀는 너무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신과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녀의 방 앞에서 당신은 망설였다. 그녀가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 동안 당신은 그냥 가야 할 지 커피라도 한잔 얻어 마시자고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 망설임을 깬 것은 그녀였다. “들어올 거예요?” 당신이 그녀의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고대 마야의 도시 ‘욱스말’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다는 피라미드에 대해 말했다. 그 불가사의에 대해서 말이다. 상무 이사도 인천 공항을 떠날 때부터 줄곧 욱스말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곳의 피라미드에 대해 전혀 기대감이 없었다.

 

당신이 정말로 들어가기를 원한 것은 그녀의 방이었지 욱스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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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스말에 있는 피라미드

 

그로부터 사흘 뒤, 당신은 욱스말의 피라미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당신에게 마야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의 몸이 점점 당신에게 기울었다. 당신의 무릎에 그녀의 무릎이 닿고, 그녀의 팔이 당신의 팔에 눌렸다. 당신의 숨은 그녀의 얼굴을 간질였고, 그녀의 숨은 당신의 얼굴을 간질였다. 점점 어두워지는 욱스말의 하늘 아래서 그녀와 당신의 코카인 같은 키스가 이루어졌다.

 

 

H시에서 시작된 당신과 그녀의 동거

 

“나는 안 가요.” 

 

당신은 아내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했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6개월간 항구가 있는 H시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었다는 당신의 말에 당신의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당신이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당신과 당신의 아내는 서로가 예상하고 있는 반응만을 보이는 관계가 되었다. 그것은 서로를 당황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었다. 당신과 아내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얼마 전 당신의 아내는 일방적 통보만 던지고 처가가 있는 C시에 갔다. 사흘간이나. 그러나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당신과 당신 아내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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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H시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당신이 한 첫 행동은 그녀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어쩌면 당신이 H시 발령을 받아들인 이유가 그곳에 사는 그녀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은 마치 그러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짐을 들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H시에서의 첫날을 술과 함께 시작했다. 당신도 취했고 그녀도 취했다. 그리고 비어있는 방 하나가 당신에게 주어졌다.

 

욕조는 거대한 바다로 변하고, 바다는 다시 방으로 변했다가 욕조로 변했다가 했다. 그런 순간이면 카리브해를 바라보며 그녀가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거대한 욕조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집에서 당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매일 밤, 그녀의 방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의 방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물, 그녀의 욕조를 가득 채우는 물, 물속으로 스며드는 물, 그녀의 방 벽을 타고 오르는 물. 불면의 고통이 당신을 괴롭혔고, 당신의 눈은 아침부터 붉게 충혈되곤 했으며, 당신의 정신은 하루 종일 몽롱했다.

 

간혹 그녀가 당신을 욕조 속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당신은 흥분할 수 없었다. 물속에서 만지는 그녀의 몸은 마치 근친의 몸을 더듬는 듯한 불편한 감정만이 들었다. 때때로 그녀가 당신의 침대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당신의 몸 위에 얹었다. 당신의 침대는 물로 흥건하게 젖었고, 당신은 젖은 그녀의 몸을 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끝내 그녀를 밀쳐 냈다. 당신은 밤의 물소리를 견디지 못했다. 당신은 한 달째 되는 날, 그녀의 집을 나왔다. 

 

 

당신 아내의 옛 애인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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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데일리한국>

 

본사로의 귀환이 결정되던 날, 당신의 아내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울었다. 아내는 K가 죽었다고 말했다. K는 당신 아내의 옛 애인이었다. 그는 온몸에 퍼진 임파선 암환자로 C시의 요양원에 있었다. 

 

당신은 알고 있다. C시로 가 사흘간 머물다 온 당신의 아내가 처가가 아닌 요양원에 있었다는 것을.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다그쳤다. K가 어떻게 죽었는지 안 물어보냐고. 당신은 궁금하지 않았기에 아내에게 강요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스스로 답했다. 이 시한부 환자의 사인은 암이 아니고 질식사라고.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K는 아내가 보는 앞에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사인은 질식사라고.

 

“나는 그의 몸이 물속으로 스미는 걸 보고만 있었어요. 영혼이 몸속에 스미듯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제지할 수가 없었어요. 물이 그의 몸을 삼키는데도, 내 눈 앞에서 그의 몸이 조금씩 지워져가는데도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물이 그의 몸을 받은 마지막 몸이었어요.”

 

역설이지만 사실인 것도 있다. K의 존재가 오히려 당신과 아내의 관계를 아슬아슬하게라도 유지시켜 온 힘이라는 것. 이제 당신의 아내는 남편인 당신에게 떳떳하게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K의 죽음으로 당신의 아내는 이혼할 수 있는 상황을 확보한 것이다. 당신은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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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에게 누군가다. 욕조에 누워 있는 그녀의 마른 몸이 떠올랐다.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때 그녀는 잠든 것 같았고, 그럴 때 욕조는 침대처럼 보였다. 때때로 그녀는 거의 육체를 탈피한 것처럼 보였고, 그럴 때 욕조는 관처럼 보였다. 

 

 

이별의 절차, 당신의 물건을 가져가세요

 

당신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서랍 안쪽에 있는 그녀의 집 열쇠를 꺼내 들고 그녀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의 엔진을 잠에서 깨웠다. 당신은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오직 침묵만으로 대응했다. 당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것이기도 했던 그녀의 마음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전화기 저쪽의 침묵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으로 바뀌자, 당신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쑥스러워졌다.

 

그 조급함과 쑥스러움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우려를 만들어내었다. 이 년 전에 카리브 해안의 보름달이 만든 하얀 길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면도기와 액자를 가져가세요.

 

이별의 절차는 상대방의 흔적을 지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이 추억의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휴대 전화 속 문자메시지를 보는 순간 발신인이 누구인지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문자메시지는 이제 당신의 용기가 되고 당신의 핑계가 되었다. 당신은 그것을 핑계로 그녀의 집, 당신이 몇 달 전 기거하던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아무 계획이 없다. 단지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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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vN>

 

 

당신은 욕조가 놓인 방 앞에 서 있다

 

당신은 그녀가 집에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방 한가운데 익숙한 욕조가 보였다. 욕조 안에는 물이 차 있었다. 당신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안의 물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당신은 그 물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물이 깨어나며 당신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당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유리창을 통해 하늘에 걸린 둥근달이 보였다. 달빛은 유리창을 타고 넘어와 욕조에 담긴 물속으로 파고들었다. 문득 당신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이 맑을수록 달빛은 창백하고, 달빛이 창백할수록 길은 뚜렷해요.’ 당신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전혀 다른 삶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H시를 떠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당신의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당신은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인생이 고통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 계속되는 행복 속에서 어쩌다가 찾아오는 고통이라면 그럭저럭 참고 살아보겠는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행복은 작고 고통은 크다고 할까요. 힘든 일을 마치고 마시는 술 한 잔이 주는 작은 행복과, 그 술이 깨면서 다시 시작되는 힘든 하루처럼 말입니다. 하루하루 그렇게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다만 생존 의지가 시키는 대로 고통에 대하여 벌이는 휴전 없는 싸움의 연속이며, 인간은 그러다가 허무하게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어가는 존재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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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 인간이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성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 감정적 전 영역에 걸친 인간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두 요소를 감성과 이성이라고 볼 때, 음악이나 빛의 밝기 등으로도 변하는 감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항상 흔들리는 것이고,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이성마저도 결국 오류를 수정할 줄 아는 것이 능력의 최대치일 뿐이니 말입니다. 불완전함,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불완전한 존재인 만큼 고통은 감추어야만 합니다. 흔들리는 나를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됩니다. 이 비정한 사회와 현실 앞에서,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 경쟁사회에서 타인에게 내 내면의 고통을 보인다는 것은 곧 자신을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받는 존재, 약자임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타인들에게 비참하게 물어뜯길 것입니다. 치료하지 않고 감춰둔 상처가 덧나듯이 고통은 점점 더 커져서 끝내는 나를 갉아 먹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술 때문에 아내가 떠난 건지, 아내가 떠나서 술을 마시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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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

 

여기 죽기 위해 술을 마시는 남자가 있습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입니다. 그는 직장에서는 해고당했고, 가족에게는 버림받은 남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알콜 중독은 벌이 아닌 선물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돈을 들고 한 손에는 운전대를, 다른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라스베가스로 향합니다. 환락의 도시에서 대략 한 달 정도 술을 마시다 죽으려 합니다. 그러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창녀 ‘세라’가 나타납니다. 벤은 세라에게 돈을 지불하고 섹스가 아닌 대화를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아가는 두 사람, 알콜중독자와 창녀는 서로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것이 둘을 동거하도록 만듭니다.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어느 순간, 혹시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느낀 순간 벤은 세라의 삶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진심과는 반대로 모욕을 주기도 합니다. 세라는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참아냅니다. 

 

짧은 행복이 영원한 불행을, 짧은 사랑이 영원한 이별을 가져옵니다. 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 준 세라에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내게 마찬가지였다. 난 그의 삶을 사랑했다.” 

 

-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中 세라의 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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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과 세라

 

수많은 시인들과 예술가들. 그들이 수천 년 동안 생산해 낸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사랑이 진짜 가능한 것이며 현실에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과대포장된, 혹은 헛된 희망과도 같은 환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선남선녀들의 사랑 이야기 역시 불합리한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불순한 의심도 듭니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존재의 완전한 사랑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끼리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것, 상대의 고통을 위로하며 자신의 고통을 내보이는 것, 그리고 위로받는 것. 그것이 환타지가 아닌 진짜 현실 세계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윗글의 ‘당신’과 ‘그녀’처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과 세라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나의 인생에 사랑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보여줄 상대가 없었거나 그것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꼭꼭 숨겨 감추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도 괜찮을 사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감추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한번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겠습니다. 못난 사람들끼리 만나 못난 사랑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이것이 예순 번째 소설 속 인생을 보며 떠오른 생각입니다. 생텍쥐뻬리의 말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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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뻬리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서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것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 A.생텍쥐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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