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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의 설화

 

2024년 3월 14일, 황상무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은 MBC를 포함한 출입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MBC는 잘 들어"라고 말한 뒤, "내가 정보사 나왔는데 1988년에 경제신문 기자가 압구정 현대 아파트에서 허벅지에 칼 두 방이 찔렸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MBC 기자들은 선배 언론인이기도 한 황상무 비서관의 "잘 들으라"는 조언을 가슴에 새기기로 했는지 황 수석이 '정보 보고하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였다는 사실도 함께 보도했다. 보도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도 보도하다니 실로 선배 조언을 잘 귀담아 들어두는 후배 언론인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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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BC>

 

자고로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는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커리어를 무덤으로 가져가기 가장 좋은 자리다. 그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소재’가 될 만한 말을 해 줄 수 없으면 정치인으로 롱런할 수 없지만, 설화에 휩싸이면 한 번에 집에서 난이나 쳐야 할 수도 있다. 본고를 송고하는 필자와 딴지 편집부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다. 이 원고가 기사로 나오기 전까지 황상무 수석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 여부가 그것이다.

 

2. 관록의 이완구

 

2015년 2월,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는 기자들과의 식사 자라에서 자신이 언론보도를 통제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패기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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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 기사 캡쳐>

 

<녹취>이완구(국무총리 후보자) : "000하고, ***한테 '야 우선 저 패널부터 막아 임마, 빨리 시간 없어,' 그랬더니, 지금 메모 즉시 넣었다고 그래 가지고 빼고 이러더라고. 내가 보니까 빼더라고."

 

<녹취> 이완구(국무총리 후보자) : "윗사람들하고 다 내가 말은 안 꺼내지만 다 관계가 있어요. 어이 이국장, 걔 안 돼, 해 안 해? 야, 김 부장 걔 안 돼, 지가 죽는 것도 몰라요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

 

녹취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완구 전 총리는 이 말을 하면서 참 ‘신이 난’ 상태다.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점심 식사하는 직장인들 대화만 들어봐도 알 수 있지만, 저런 자리에서 자신이 상위 포식자임을 재확인하고 싶어 하는 윗사람들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곤 한다. 이완구 전 총리도 저 말을 하는 당시에는 무척 신났을 것이다.

 

물론 녹취를 한 기자들도 신났을 것이다. 아직 총리 임명도 안 된 후보자가 일용할 속보 거리를 선사해 준 셈이니. 문제는 그가 흥취 도도하여 뱃전을 두드릴 기세로 말을 이어간 덕에 말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적당한 펀치 라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초기에는 ‘의혹 제기 막아’ 같은 별로 맛깔나지 않은 제목이 붙었으나, 결국 기자집단의 집단지성이 활약한 끝에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가 가장 흡입력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지금도 ‘한국 언론은 어떻게 죽는지 알고는 있나’ 같은 자조 섞인 당시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3. GOAT 나향욱

 

역시 이 분야의 Greatest of All Time(역대 가장 뛰어난 자)은 나향욱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 기획조정부장일 것이다. 민중은 개돼지 발언의 그 양반 맞다. 혹시나 모르시는 독자 제위가 계실지도 모르는데, 이분은 오랜 법정 싸움 끝에 공무원 신분을 되찾고 지금도 개돼지 민중들이 내는 세금에서 나오는 월급을 잘 받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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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기사 캡쳐>

 

‘기자들과 식사 자리에서 하는 말로 자신의 커리어 망가뜨리기 경진대회’가 있다면 나향욱은 종신 심사위원장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인물이다. 나향욱의 민중은 개돼지 발언은 2016년 7월에 나온 것인데, 이때 기자들과 밥을 먹다가 충분히 노려볼 수 있던 차관 자리가 날아갈 수 있음이 처음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진 크고 작은 설화 사건들은 ‘나향욱의 전례를 보고도 배우지 못할 만큼’ 답답한 인물들이 저지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4. 빠지면 섭섭한 홍준표

 

물론 그렇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무려 <나는 꼼수다>가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던 2011년은 어떤 기준으로도 21세기였지만, 지금 와 돌아보면 그 시절 특유의 거친 바이브가 남아 있었다. 여기자에게 ‘너 그러다 맞는 수가 있다’는 막말을 한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그런 면에서 참 상징적인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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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머니투데이 기사 캡쳐>

 

사실 홍준표 대구 시장은 언론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그가 2009년에 출간한 자서전 ‘변방’에는 검사 시절을 회상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퇴근했다가 한밤중에 다시 검찰청으로 돌아온 남부지청 간부는 대검 지시라면서 담당 국장의 신병을 풀어주라고 했다. 한참 실랑이하다가 간부의 뜻대로 석방을 결정하고 새벽에 집으로 차를 몰고 가려는데, D 일보의 L 기자가 내 차 문을 열면서 덥석 옆에 탔다. 그는 노량진 사건의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신문사 사회2부장이 피해자의 친척이어서 노량진 수산시장의 경영권이 강탈당하는 과정과 관련 인물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올림픽 도로를 타고 개포동 집으로 가는 30여 분 동안 나는 사건의 공개 여부를 고민했다. 그날 새벽까지 나는 그 기자에게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고 기술적으로 공개하라고 했다. 어차피 수사하지 못할 바엔 언론의 힘을 빌려 수사를 계속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홍준표 시장은 1987년부터 1995년까지 검사로 재직했다. 당시 윗선 검사가 압박해 온 사건을 ‘변방의 이단아 검사’가 어떻게든 풀어보려면 언론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고, 이런 식으로 시작된 그의 언론과의 관계는 그가 대선에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꽤나 돈독했다. 물론, 그 시절 방식으로 돈독했다는 뜻일 테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이어야 할 공직자-기자 관계에 쉽게 호형호제를 들먹이던 그 시절 구태는 21세기의 입구에서 결국 저런 설화 사건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5. 황상무의 길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 현직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이 실제로 벌어졌던 언론인 테러 사건을 들먹이며, 그것도 언론 전반의 보도 분위기를 운운한 게 아니라 MBC라는 특정 언론사를 직접 겁박한 이번 일은 필자가 보기엔 나향욱 사건에 버금간다. 그런데 그것 이외에도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과거의 설화들은 보통 그 말을 한 개인이 문제의 주체였다. 나향욱은 말할 것도 없고,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신이 났던 이완구 전 총리도, 신변에 관한 아픈 지적을 받자, 평소 성격대로 폭언해 버린 홍준표 시장도, 개인적인 품성의 문제가 가장 컸다.

 

황상무 수석, 'MBC 잘 들어'라며 '언론인 회칼 테러 사건' 언급 (2024.03.14_뉴스데스크_MBC) 2-13 screenshot.png황상무 수석, 'MBC 잘 들어'라며 '언론인 회칼 테러 사건' 언급 (2024.03.14_뉴스데스크_MBC) 2-33 screenshot.png

황상무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발언

출처-<MBC>

 

황상무 수석비서관은 그 점에서 조금 특이하다. 물론 5.18 북한 개입설 등을 주워섬기는 걸 보면 그가 평소 어떤 유튜브 채널을 애독하는지 알만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도 테러까지 언급하며 MBC를 겁박하는 걸로 황상무 개인이 얻을 것이 너무나도 적다. 그가 개인 황상무 품성의 발로로 저런 겁박을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대통령실의 분위기를 전달하다 보니 단어 선택이 저렇게 된 것이라면, 문제는 정말로 심각해진다. 부디 이것이 기우이길 바란다.

 

독자 제위가 이 기사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가 현직이었다 하더라도, 기사를 다 읽으신 지금은 ‘전 수석비서관’이길 바란다. 이런 발언을 하는 자를 고위직에 두고 민주주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