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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 <파묘>가 흥행하고 있다.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1,000만을 목전에 두고 있다.

 

파묘 포스터.jpg

출처-<쇼박스>

 

<파묘>는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무덤과 관련된 썰이라면 재미없는 이야기라고 치부되지만, 요즘에는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꽤 생겼다.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이 분위기를 틈타 독자들께 무덤과 관련된 흥미로운 썰을 풀어볼까 한다. 

 

 

조선 시대 최다 소송의 원인 : 무덤

 

‘투장’은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가문의 묘를 쓰는 것이고, ‘산송’은 무덤과 관련된 송사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조선 중·후기에 산송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산송은 어느덧 조선 3대 송사가 되어 있었다.

 

조선 3대 송사

 

1.  노비송 : 노비와 관련된 송사

2.  전답송 : 토지와 관련된 송사

3.  산송 : 무덤과 관련된 송사

 

이중 조선 중·후기에 최다 송사를 차지하는 건 ‘산송’이었다. 사실 조선 초기만 해도 산송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산송이 점점 심각하게 대두된 이유에는 효를 강조하는 조선의 성리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송사1.PNG

조선시대 송사 모습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산송은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해 18세기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 양반들을 중심으로 문중과 선산이라는 개념도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에 한때 시대정신이었던 풍수지리까지 합쳐지며 묏자리는 조상에 대한 효의 차원을 넘어 당대의 부귀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신분 상승을 꿈꾸는 각계각층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노비로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 내 자식새끼는 양반으로 살게 해야겠다.”

 

두 눈으로 똑똑히.PNG

내 새끼가 양반으로 사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거유!

 

노비들이 양반집 무덤을 파헤쳐(파묘해서) 자신의 조상을 묻기도 했고, 권력을 가진 관리들은 더 높은, 탐해서는 안 될 왕실의 무덤까지 침범했다. 산 자가 죽은 자에 의지해 신분상승을 꿈꾸고, 죽은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 산 자가 밤잠을 설치며 현재를 살지 못하게 되었다.

 

산송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영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사이 올라온 민원을 보면, 산송이 열 중 여덟, 아홉에 달한다.”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산송 문제를 개탄했다.

 

‘묘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송사가 이제 폐 속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살인 사건의 절반이 이에서 비롯된다.’

 

묏자리를 놓고 투장, 파묘가 끓이질 않으니 송사로 이어지고, 관리나 왕조차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영화 <명당>을 보면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 위해 살림까지 파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마련한 거금을 들고 그가 찾아간 곳은 절이었다.

 

“주지 스님! 여기 이 돈이면 되겠지요?”

 

흥선대원군은 이 절이 길지라는 풍수지리를 믿었고, 전 재산을 걸었다. 스님에게 돈을 건넨 그는 절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전소된 절터에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 

 

영화 명당 불.PNG

명당2.PNG

출처-<영화 '명당'>

 

산송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문제였는지, 심지어는 조선시대부터 21세기까지 무려 400여 년간 묏자리를 두고 분쟁을 이어간 두 가문도 있다. 

 

 

400년 간 이어온 두 집안의 묏자리 분쟁

 

사건의 발단은 고려 시대 명재상이자 명장군이었던 윤관 장군의 묘가 사라지면서 시작되었다. 

 

윤관 장군은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창설하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개척하여 고려의 북진 정책을 완수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 윤관 장군의 묘가 세월이 흐르며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표준영정.PNG

윤관 장군 표준영정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북 9성.PNG

동북 9성 위치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있지 않아서

현재로선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동북 9성 위치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중 가랑 유력한 동북 9성 위치가 위 사진이다.

출처-<KBS1 역사저널 그날>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윤 씨 집안은 특히 조선 영조 대에 이르러 잃어버린 윤관 장군의 묘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우리 문중을 대표하는 윤관 장군(1111년 사망)의 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다. 반드시 장군의 묘를 찾아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윤관 장군 사후 650년이 지났고, 그간 왕조가 바뀌었지만 윤관 장군 정도 되는 인물의 묘를 후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고려 시대의 풍습을 알아야 한다. 

 

‘장가 든다’ ‘장가 간다’라는 말이 있다. 장가의 장은 ‘어른 장(丈)’, 가는 ‘집 가(家)’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장가 간다’는 말은 장인어른의 집에 간다는 말이다. 왜 이 말이 생겼느냐.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남녀가 결혼하면, 상당 기간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향을 떠나 처가에서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처가와 친가가 가깝지 않은 한 조상의 묘를 관리하기 힘들었고, 이런 상황이 수백 년간 이어지다 보니 먼 조상의 묘는 잊게 된 것이었다.

 

자, 그렇다면 윤관 장군의 묘를 잊은 건 이해할 수 있겠다. 근데 의문이 하나 더 든다. 윤 씨 가문은 650년이나 지난 조상의 묘를 어떻게 찾겠다고 한 것일까? 

 

그들은 역사 사료를 뒤적이다 한 줄기 희망을 봤다. 동국여지승람에 그 힌트가 있었다.

 

「윤관 장군의 묘는 경기도 파주 분수원 북쪽에 있다.」

 

동국여지승람.jpg

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 증보판)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때

총 50권으로 편찬된

조선 전기 대표적 지리서이다.

 

가문의 명을 받은 윤동규란 인물이 윤관 장군의 묘를 찾기 위해 파주로 떠났다. 그가 의지할 것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 단 한 줄이었다. 그는 몇 년간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윤관 장군의 묘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어허!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구나. 그나저나 이거 참 난감하구나.”

 

윤관 장군 묘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조선시대 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부친 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심 씨 가문의 묘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윤동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그곳이 윤관 장군의 묘라는 물증을 찾기 위해 은밀히 심 씨 가문의 묏자리 주변을 면밀히 관찰했다. 

 

“어! 이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기이한 일이구나. 이것은 이 씨의 묘가 아니더냐. 심 씨 문중 묘역에 어째서 이 씨의 묘가 있단 말인가?”

 

‘선략장군 이호문 묘’라는 비석을 발견한 그는 마을로 내려가 이호문의 후손을 수소문했다. 마침내 이호문의 손자인 이형진이라는 노인을 찾아냈다.

 

“이보시오. 암장이나 투장, 파묘는 나라에서 엄히 다스리는 일이오.”

 

윤동규 이호문.jpg

출처-<채널A '천일야화'>

 

윤동규의 끈질긴 추궁에 노인은 심 씨 가문에서 암장을 감추기 위해 세운 허묘라고 실토한다. ‘암장’이란 큰 인물 무덤에 자기 조상을 몰래 묻는 행위를 말한다. 큰 인물의 시신이 묻힌 곳에 자기 조상 시신을 같이 묻음으로써 그 생기를 가로채거나 같이 받게 하여 복을 누리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즉, 심 씨 가문은 윤관 장군의 묘를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그 위를 덮어 이호문이란 자의 허묘를 만들고, 그 주변에 자기 조상을 매장한 것이었다. 

 

“옳거니! 역시 그랬구나.”

 

추론에 확신을 얻은 윤동규는 주변 땅을 판 끝에 깨어진 윤관 장군 묘의 비석을 발견했다. 

 

“드디어 찾았구나! 이제 조상님 볼 낯이 생겼다. 어서 서두르자. 문중 어른들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자.”

 

윤 씨 가문은 부사직으로 재직 중이던 윤면교를 내세워 위 내용이 포함된 상소를 영조에게 올렸다. 당대 명문가인 심 씨 가문에서도 윤 씨 가문의 산송에 맞대응을 했다. 

 

심지원은 광해군 때였던 1614년,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1658년 영의정에 오르자, 효종이 그 부근 땅을 하사했다. 이후 심 씨 가문은 그 땅에 문중 묘역을 조성했다. 

 

“이곳은 이미 백년 넘게 우리 가문의 선산이었는데, 650년이 지나 자신들의 조상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1763년, 두 가문의 상소가 이어지자, 영조는 윤 씨 가문과 심 씨 가문의 대표를 불러 원만한 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임금 앞에서도 절대 자신들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주상 전하! 저희 가문의 억울함을 다시....”

 

“전하! 저자의 말은 앞뒤의 이치가 전혀 맞지 않는....”

 

“어허! 이런 답답한 자들을 보았나?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내 요즘 산송 문제로 여간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다. 두 가문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어명을 따르도록 하라. 윤관 장군의 묘도, 심 씨 가문의 묘도 그대로 유지하고, 이호문의 묘만 없애도록 하라.”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기엔 몹시 애매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왕비를 많이 배출한 윤 씨 가문은 내심 영조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했었다. 

 

“전하.... 아리옵기 황공하오나 전하께서도 윤 씨 가문의 손이신 온 데......”

 

“무엇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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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퀴가 보자 보자 하니까...!

출처-<영화 사도>

 

대노한 영조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가문의 수장인 윤희복과 심정최에게 곤장형을 내리고, 유배를 보냈다. 일흔이 넘었던 두 노인은 망가진 몸을 이끌고 귀양길을 갔고, 그 도중에 윤희복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이고! 이렇게 원통할 수가! 심 씨 가문 것들을 가만두고는 분해서 살 수가 없다.”

 

두 가문의 원한과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두 가문의 산송 문제는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현대까지 이어진 두 집안의 싸움

 

일제 강점기에도 두 가문은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진정서를 냈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상대 가문 묘비를 부수기도 했으며, 해방 후에는 파묘를 시도하다 옥살이하게 된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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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장군 묘와 심 씨 가문 사람들의 묘

출처-<뉴시스>

 

윤관 장군의 묘 바로 위쪽으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 심 씨 가문의 묘가 위치해 있다. 그러다 보니 윤 씨 가문에서 윤관 장군을 향해 절을 하다 보면, 심 씨 가문의 조상에게도 절을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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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윤관 장군 묘

출처-<오마이뉴스>

 

이런 불상사(?)를 막고자 윤 씨 가문은 장군의 묘역을 조성한다는 명목하에 10단에 이르는 담장을 올렸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심 씨 가문 조상의 묘가 완전히 가려지게 된 것이었다. 두 가문은 또다시 분쟁했다. 도대체 산송 분쟁은 누가 해결해 주어야 할까? 두 가문에게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만큼 어려운 난제이다.

 

2006년 4월에서야 두 가문이 드디어 극적인 합의에 이르게 됐다. 심 씨 가문이 자신들의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윤 씨 가문에서는 심 씨 가문 조상들의 새로운 묏자리를 위한 부지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400년 넘게 이어진 산송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2007년 로이터 통신에 의해서도 보도되며 다시 한번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로이터 통신.PNG

제목: 앙숙의 한국 집안들 400년 넘은 무덤 분쟁을 끝내다

출처-<로이터 통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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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링크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는 송사에서 그치지 않고, 파묘와 의문사,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 사건에 정치 문제로까지 번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진진한(?) 두 가문의 묘지 분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