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개봉한지 한 달도 더 지난 영화 <파묘>가 드디어 1,000만을 넘었다. 아직도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말이다. 한국 오컬트 영화 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로 인해 <파묘>가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파묘파묘.jpg

출처-<연합뉴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이 분위기를 틈타 언능 ‘조선시대 파묘 썰’을 또 올려 <파묘> 덕 좀 보려 한다. 

 

 

조선을 뒤흔든 무덤 사건

 

mbc.PNG

출처-<MBC>

 

18세기 초 영남 지방. 

 

무덤과 관련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현감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점차 커져 파묘와 방화,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은 조선 전체의 이슈가 되었다. 파장이 워낙 컸던지라 훗날 한글 소설 등 각종 문학작품으로도 재탄생했다. 

 

이 사건이 갖는 다른 의미도 있다. 보통 조선 시대에 무덤(조상의 묘) 관련 사건의 관계자는 대체로 남성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여 중심 역할을 한 사건이다.

 

이쯤 되니, 무슨 사건일지 아주 궁금하다. 후딱,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집 선산에 모르는 묘가 생겼다

 

박수하.PNG

출처-<채널A ‘천일야사’>

 

경상북도 성주 지방에 ‘박수하’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당시는 숙종 재위 시기로 당쟁이 심했던 때이다. 그리고 숙종은 이런 당쟁 간 알력 다툼을 잘 이용했다. 그는 한 당파에 권력을 몰아줬다가 세력이 꽤 커지면, 싹 조지고 다른 당파에 권력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런 숙종의 정치 방식을 ‘환국’이라고 칭한다.

 

박수하에게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이런 당파 싸움의 영향으로 영남 선비들의 중앙 정계 진출이 어려운 때였다. 박수하 역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채 고향에서만 활동하는 처지였다. 

 

두 딸 박수하.PNG

 

이런 박수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첫째 ‘박문랑’과 둘째 ‘박효랑’이었다. 평온하게 살고 있던 이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 건, 대구 지역 현감 ‘박경여’가 자신의 조부 묘소를 이장하면서부터였다.  

 

성주 지도.PNG

대구와 성주 지도

 

 

“여봐라! 내가 말한 명당 자리는 아직도 찾지 못했느냐? 아무래도 내 출셋길이 더딘 것은 할아버지 묏자리가 안 좋아서인 것 같단 말이다.”

 

“현감 나리! 분부하신 대로 기가 막힌 명당을 찾았사옵니다. 허나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좀 멀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자리를 다른 이가 이미 묘로 쓰고 있사옵니다.”

 

“흠, 그럼 어찌한다....”

 

박경여.PNG

 

박경여는 고심 끝에 그 명당 자리에 조부의 묘를 투장(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가문의 묘를 쓰는 것)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즈음이면 예상이 갈 것이다. 맞다. 그 명당 자리가 원래 박수하 가문의 선산이 있는 곳이었다.   

 

얼마 후, 박수하의 하인들이 문중의 묘를 관리하다 못 보던 묘를 하나 발견했다. 하인들은 즉시 박수하에게 알렸다.

 

“나리, 평소 못 보던 묘가 선산에 생겼는뎁쇼.”

 

“뭐라?”

 

박수하는 60년도 더 이전부터 자신의 가문이 선산으로 쓰고 있는 곳에 누군가 투장을 했다며 관아에 즉시 고발했다.

 

“이런 무례한 자를 보았나! 남의 선산을 몰래 쓰다니. 관아에 알렸으니 금세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박수하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투장의 범인이 박경여인 게 밝혀지긴 했으나, 관아에서 박수하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관아에서는 어느 한쪽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박수하와 박경여는 기나긴 송사(소송)에 돌입했다. 

 

송사1.PNG

 

송사가 지지부진하게 계속 늘어지자, 박수하는 왕에게까지 상소를 올렸다. 숙종에게 말이다. 숙종은 절차에 따라 사건을 소상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숙종의 명에 따라 경상감사는 즉시 조사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건은 1년 넘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송사가 늘어진 이유

 

왜 그랬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조선의 3대 송사

 

1.  노비송 : 노비와 관련된 송사

2.  전답송 : 토지와 관련된 송사

3.  산송 : 무덤과 관련된 송사

 

이중 산송이 유난히도 해결하기 어렵던 이유 중엔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법전에 무덤과 관련된 조항이 이렇게 쓰여있었다.

 

‘(남의 묘지의) 좌청룡 우백호 내에는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좌청룡 우백호는 객관적인 범위가 아니었다.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아예 ‘사방 몇 미터 안에는 묘를 짓지 못한다’라고 쓰여 있으면,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했었을 텐데 말이다. 암튼 이러한 부분 때문에 산송에서 맞붙은 양측은 해석 싸움을 이어가며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박수하와 박경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박수하 박경여 사진.PNG

 

 

종잡을 수 없이 커지는 사건

 

세월만 무심하게 흐르는 동안 박경여는 점점 대담해졌다. 투장한 자신의 조부 묘를 단장하고 묘비까지 세운 것이다. 이에 분개한 박수하는 박경여의 노비를 잡아다 매질을 했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남의 묘를 세운단 말이냐! 우리 선산이란 말이다!”

 

“나리, 소인은 저희 현감 나리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요.”

 

화를 참지 못하고 애꿎은 박경여의 노비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박경여 또한 이러한 박수하의 행동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하여 이번엔 박경여가 박수하를 관아에 고소했다(박경여도 현감이지만, 박수하가 사는 고을 현감에게 제소한 것).   

 

박경여33.PNG

 

“성주 현감, 이것 좀 보시오. 묘지 송사가 언제 끝날지 몰라. 후손 된 도리로 조부의 산소에 비 하나 세웠는데, 저 자가 글쎄 우리 종을 자기 맘대로 끌고 가 볼기를 때리니 내 억울해서 살 수가 없소이다.”

 

사건이 더 얽히고 복잡해져 갔다. 박경여의 고소로 송사가 접수되었으니, 성주 관아에서는 박수하를 소환하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선산에 투묘한 건 박경여인데, 결국엔 지금 자신이 피의자가 되어 조사받는 게 된 것이 너무 억울했던 박수하는 특권층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현감 나리! 지금 이 송사가 공정하게 다루어지고 있소이까? 박경여에게만 유리하게 진행되는 이 송사가 진정 박경여가 경상감사와 친인척인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박수하의 주장은 성주현감 → 성주목사 → 경상감사에게까지 들어갔다.

 

“나리 아주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요. 박수하 이 자가 쉽게 물러날 거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감사 나리를 들먹이고 난리입니다. 아무래도 제 선에서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이런 건방진 자를 봤나!”

 

건방진 자를 보았나.PNG

 

열이 뻗친 경상감사는 성주로 직접 내려와 박수하를 심문했다. 

 

심문.PNG

으아아악!!!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박수하가 심문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다.

 

“무엇이라? 박수하가 죽었다고?”

 

“네, 유생이라 그런지 몸이 허약한가 봅니다. 그저 ‘탁’하고 쳤을 뿐이 온 데, 이 자가 그저 맥없이........”

 

박수하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러나 분통이 터진 것과는 별개로 문중의 남자 중 선뜻 나서서 항의하는 이가 없었다. 그 상대가 권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첫째 딸의 죽음

 

이런 상황에서 장녀 박문랑이 들고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이 묘지 송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박경여가 우리 가문 선산에 투장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박경여를 직접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흑흑...”

 

박문랑2.PNG

 

어머니를 비롯하여 집안 사람 모두가 박문랑을 말렸다.   

 

“애야 안 될 말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그 먼 길을 네가 어찌 혼자 가서 그자를 죽인단 말이냐.” 

 

“그냥 앉아서 참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자를 찾으러 가지 않고 그자가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겠습니다.”

 

다음 날 밤, 박문랑은 하인 몇 명과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박경여 조부의 무덤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박문랑과 하인들은 괭이를 집어 들고 파묘를 시작했다. 단순히 파묘가 끝이 아니었다. 파묘한 뒤, 문랑은 박경여 조부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 불을 질렀다. 

 

“이 집안 족속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내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관.PNG

 

이 소식은 당연히 박경여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박경여는 곧 노비들을 무장시켜 파묘된 묫자리로 보냈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냐. 아주 난리가 났네. 탄 시신이라도 찾아야 할 텐데, 그 계집은 도대체 태운 시신을 어디다 둔 것이냐!”

 

그 순간이었다. 칼을 든 누군가 말을 타고 무장한 노비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박문랑이었다. 박문랑도 알았을 것이다. 이 묘지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자신의 죽음뿐이라는 것을. 

 

 

둘째 딸의 묘책

 

장례식.PNG

 

박문랑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당연히 (성주) 관아에서 조사가 들어갔다. 그리고 곧 결과를 발표했다.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박문랑의 죽음은 파묘, 방화 등 자신이 저지른 죄에 죄책감을 느끼던 나머지 자결을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박문랑의 집안 사람들은 다시 한번 분개했다. 산송 문제는 해결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문랑의 죽음마저 자결이라고 하니 모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선뜻 앞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때, 박수하의 막내딸이자 박문랑의 동생 ‘박효랑’이 나섰다.

 

“제가 아버님과 언니의 원수를 갚겠사옵니다.”

 

“안 된다. 너까지 죽게 둘 순 없다. 상대는 현직 현감과 감사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는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리고 무모하게 덤벼들진 않을 것입니다. 제게 묘책이 있습니다.”

 

박효랑이 선택한 방법은 보복살인도, 관할 관아와 경상감영을 상대로 송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박효랑의 선택은 임금(숙종)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한양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둘째 딸1.PNG

 

고생 끝에 박효랑은 한양에 당도했다. 하지만 왕을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궁에 들어가 왕을 만날 순 없는 법이다. 박효랑이 세운 작전은 숙종이 궁에서 나와 행차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박효랑은 저잣거리에 머물면서 숙종의 행차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숙종이 궁에서 나와 행차를 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던 박효랑은 숙종이 나타나자 냉큼 달려가서 갓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주상 전하! 너무 억울하옵니다. 만백성의 어버이신 주상 전하께 세 가지 청이 있나이다. 소녀의 아비와 언니를 죽인 박경여를 법에 따라 처벌하시고, 편파적으로 한쪽 주장만 들은 관리들을 처벌하여 주시옵소서.”

 

“아녀자가 이렇게 머리까지 풀어헤치며 고할 일이 무엇이냐? 소상히 말해 보거라.”

 

박효랑의 묘책은 성공했다. 숙종이 이 사건에 대해 공정하고 엄중하게 수사하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아비인 박수하가 상소를 올려 숙종이 명을 내렸을 때도 사건이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박효랑은 계속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을 갖고 있었다. 박효랑은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한양에 계속 머물며 사건이 정말 해결되는지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흐지부지되는 듯한 것이다. 박효랑은 바로 행동을 재개했다. 매일 같이 궁으로 가서 출근하는 관리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박효랑555.PNG

 

이런 박효랑의 사연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민심은 그녀를 지지하게 되었다. 

 

“아휴. 저 어린것이 얼마나 당찬지 몰러. 임금님 앞에서도 말도 잘하고.”

 

“얼마나 원통했으면 그랬겠어! 제발 효랑이의 원통함을 누가 좀 풀어졌으면 좋겠어.”

 

박효랑의 당찬 행동은 백성들의 입을 타고 번져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노래로까지 만들어지니 그녀의 사연은 더욱 빠른 속도로 조선 각지에 퍼졌다. 

 

마침내 민심과 함께 각처의 유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숙종 38년, 안동 지역의 유림 379명이 숙종에게 상소를 올리며 스타트를 끊었다. 이후로 다른 지역 유림들도 상소를 올렸다. 효녀 박효랑의 등장은 허구한 날 당하기만 하는 백성들과 당파 싸움으로 인해 정계 진출 길이 막힌 유생들의 한을 풀어 주는 기폭제가 됐다. 민심은 더욱 요동쳤고, 상소 또한 더욱 빗발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숙종도 더욱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다시 한번 엄명을 내려 재조사를 지시했다. 

 

지진희.jpg

다시 확실하게 조사하라

 

결과는 절반의 승리였다. 산송에서는 현직 현감인 박경여가 승리했다. 하지만 그의 관직이 박탈됐고 곤장형까지 내려지게 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문랑과 효랑 자매는 조선시대에 이례적으로 여성임에도 집안의 족보에도 이름이 올랐고, 훗날 영조의 명으로 효녀각이 세워졌다. 또한 서두에서 말했듯, 문학작품으로도 탄생하여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박효랑전1.PNG

박효랑전2.PNG

박효랑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