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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범인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타인에게 베풀고 서로 아끼며 착하게 살아라.

 

각종 종교에서 공통으로 권장하는 내용이다. 조금만 마음먹으면, 그다지 지키기 어려운 내용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암묵적 규칙을 개인적인 이득이나 편의를 위해서, 교묘히 어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업보 마일리지를 차감하듯,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교회나 절을 찾아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죄를 사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이런 유형은 괘씸죄가 더해져, 분명 사후에 형벌 폭탄을 맞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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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작년 7월. 신림동 칼부림 사건 직후, 나라 곳곳에서 칼부림 사건과 칼부림 사건 예고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정신과 치료 이력 유무를 떠나, 칼을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인간은, 앞서 언급한 ‘인간으로서의 암묵적인 규칙’을 깨버리고 짐승이 되길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신림동 사건 범인의 범행동기는 이것.

 

“사는 게 힘들어서...”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해명이다. 나였다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목표를 향했을 것이다.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면, 인적 드문 곳으로 떠나 조용히 생을 마감할 생각까지는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범인은 잔인한 선택을 했다. 길 가던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고, 심지어 칼을 들고 쫓아다니기까지 했다. 결국, 타인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버렸다. 내가 사는 게 힘들어서, 다른 사람을 해쳤다는 말. 티끌만큼도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에 밝혀진 범인의 추가 진술을 듣고 나서야, 퍼즐이 맞춰졌다.

 

“내가 불행하니,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니까 반쯤 망해버린 자기 인생처럼, 다른 사람 인생도 망쳐놓겠다는 악마 같은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개인적 성취에 대한 좌절감, 경제적 박탈감 등이 쌓이면, 자신이 무력하고 무능하게 느껴진다. 나에 대한 분노는 이내 사회에 대한 분노로 발전하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의 결과물로 테러를 벌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도, 타인의 목숨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해서, 혹은 나는 불행하니까 같은 동기가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권리가 된다면, 한국은 일찌감치 인구 절벽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림동 칼부림 사건 보도에 달린 댓글은,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사형제도를 부활시키자.

 

전과 17범을 사회에 풀어놨던 것? 진짜 법이 개판이네.

 

그 뒤 일어난 분당 AK플라자 사건은 신림동 사건과 성격이 달랐다. 신림동 사건의 범인이 정신이상자 코스프레였다면, 분당 사건의 범인은 분열성 성격장애로 정신과 진료를 받다 그만둔 병력이 있었다. 인터넷과 유튜브 댓글 창은 분노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범인에 대한 비난에 동참하고 있던 찰나, 댓글 하나에 눈길이 갔다.

 

왜 정신병자 새끼들을 밖에 돌아다니게 하냐. 저놈 가족들은 뭐 했냐?

 

멈칫했다. 범인은 욕을 먹어야 마땅하지만, 그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욕하는 것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범인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까? 욕을 먹을 만큼 자식을 방치하고 학대했던 사람일까?

 

가족들에게 범인은 가족의 일원으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칼부림 사건과 나의 연재 글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독자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내가 칼부림 사건을 꺼낸 이유는, 또 위 댓글에 눈길이 간 이유는, 나 역시 정신이 어지러운 가족과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든 정신’과 ‘칼’이 관련한 일도 직접 경험했다.

 

예측 불가능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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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황금빛 내 인생>

 

불안정한 정신의 가족 구성원이 있는 가족은 삶이 절대 순탄치 않다. 나는 아버지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내용을 어렴풋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내를 온몸 멍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고, 날마다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아버지의 만행을 순화해 표현한 것이었다. 그저 난봉꾼에 망나니로 태어났다고 표현하기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상과 전쟁 트라우마로 유추해 봤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었다. 조금만 들여다 보면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럴만한 전문적 지식도, 시간도, 용기도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겐 술 마시는 것 외에 또 하나의 버릇이 있었다.

 

바로, 칼을 사 모으는 것이었다.

 

칼이 낡으면 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부엌에 식칼은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새로 칼을 사들였다. 각종 접이식 칼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칼을 왜 샀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궁금했다.

 

칼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아버지는 캠핑하는 취미도, 낚시하는 취미도, 조각하는 취미도 없었다. 요리하는 것 외에는 쓸 일이 없지만, 아버지가 집에서 요리하는 일도 없었다. 사실, 흉악할 정도로 날카로운 칼을 쓰지도 않고 장롱 속에 넣어두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무언의 협박이었다.

 

어머니는 감정표현에 서툴러 무덤덤한 척하며 지금껏 사셨지만, 그러한 행동과 기복이 심한 아버지에게 항상 위기감과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버지가 칼을 사서 장롱에 넣어두면, 어머니는 아버지 없을 때 몰래 꺼내 버리거나 다른 곳에 숨겨두었다.

 

아버지는 의심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굳이 칼을 산 이유를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아버지 말마따나 어머니를 '길들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생각과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감. 이것이 마음이 병든 가족 구성원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괴로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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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남은, 아버지가 모으던 칼

 

1988년. 여느 날과 같이, 아버지는 무던히 어머니를 때리고 있었다. 맞으면서 한마디도 지지 않던 어머니 때문에 감정이 더 격해진 아버지는 장롱을 벌컥 열어 뒤지기 시작했다.

 

“칼 어디 있노!”

 

아무리 뒤져도 칼이 나오지 않자, 열불 뻗친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눈물범벅에, 맞아서 벌게진 얼굴로 어머니가 대답했다.

 

“칼 뭐할라꼬? 와? 죽일라꼬? 없다. 다 버렸다!”

 

단호한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화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걷어차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닦아주시고 나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아마, 이대로 있다가는 사달이 날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조용한 골목을 걸었다. 나는 울음을 그쳐도 콧물이 계속 나와 훌쩍이고, 어머니도 우셨던 건지 아니면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서였던 건지 코를 훌쩍였다. 한밤중에 엉엉 운다고 에너지를 한껏 쓰고, 목적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걷다 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엄마... 내 잠 온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업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귤처럼 따스한 색깔의 가로등 불빛이 어머니의 어깨 위로 퍼지는 것을 바라본 기억이 난다. 졸음에 눈이 감기면서, 이대로 아버지 없는 곳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내어준 등에 업혀 잠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길로 먼 길을 떠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날 내가 일어난 곳은 집이었다. 어머니는 새벽 거리를 한참 나를 업고 걸으시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잠에 들고 나서야 집에 들어온 것이다.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친정에라도 갈 법한데, 어머니는 무딘 건지 담력이 강한 건지 상식을 뛰어넘는 선택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아버지와 둘만의 여행

 

90년대 새마을호부터 화물열차까지! 90년대 열차 총망라 ! 🚃 🚃 🚃 🚃  _ Korean Train compilation in the 1990s 37-22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아침에 일어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을 들이밀거나 어머니를 때리는 일도 없이, 잠이 덜 깬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탔고, 부산역에서 다시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기차 내 스낵 카트를 밀고 다니는 직원에게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사서 나에게 줬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먹는다고, 달걀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부자지간이 어색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쭉 이어져 왔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기묘한 여행의 첫 도착지는, 큰고모님이 계시던 밀양.

 

“아이고~ 폭폭이 왔나? 밥 뭇나? 약과 줄까?”

 

큰고모는 나를 참 이뻐하셨다. 아침을 굶고 달걀만 먹은 터라 배가 고팠다. 나는 방 한구석에서 약과를 허겁지겁 먹었다. 평소 집에서 밥에 김치만 올려 먹었고, 군것질은 꿈에도 못 꾸고 살았던 지라 달콤한 약과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내가 방구석에서 약과를 먹을 때, 고모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우짠 일이고? 폭폭이 엄마는 와 같이 안 왔노?"

 

아버지는 고모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심각한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싸워가꼬... 누야, 내 이혼 할라요.”

 

“머라꼬?”

 

큰고모는 집안의 장녀로, 외모와 풍채부터 장군의 위엄이 풍기는 분이었다. 실제로도 성격이 괄괄해 남동생들이 기를 못 펴고 살았다. 그 당시 할머니가 살아 계셨음에도, 아버지는 집안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큰고모의 동의와 지지를 얻으려 밀양으로 간 것이었다.

 

“여자다운 데도 없고, 고분고분한 맛도 없고. 길을 들일라 해도 도무지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이혼해야 하겠소.”

 

아버지의 말을 듣는 고모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눈은 호랑이 눈이 되어갔다. 고모는 순간 고함을 빽 지르며 아버지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이 미친놈이! 인자 결혼해가 아 낳고 사람 구실 하는가 했드만, 또 미친 소리 하고 자빠짓노!!! 길을 들이긴 멀 들여? 니나 철들어라!”

 

고모는 아버지의 머리를 잡고, 사정없이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니가 그 아랑 안 살면 사람같이 살 거 같나? 만날 술이나 처묵고 돌아댕기다가 거렁뱅이 돼서 길바닥에서 얼어 죽것지! 정신 못 차리나?!”

 

고함을 지르며 한참 흔들던 손을 팍 당겼을 때, 아버지의 머리털이 한 움큼이나 고모의 꽉 쥔 손에 뽑혀 나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탈모는 이때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당시에 나는 이혼이니 뭐니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다만, 집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어 여포처럼 패악을 부리던 아버지가 고모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털을 쥐어뜯기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약과를 손에 들고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아버지는 진짜로 이혼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막 사는 아버지로서,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할 수 있다. 애초에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이혼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고모를 찾아간 것은 형제들과 할머니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어머니를 불러 앉혀 여자로서의 덕목을 가르치고 꾸짖으려는 의도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칼로 협박을 하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꺾는 데에 지쳤다. 하지만 고모는 성격부터 어머니와 비슷했다. 시누이 임에도 항상 이상한 남동생과 결혼해 살아주는 어머니에게 고마워했고, 친동생처럼 살갑게 대해주셨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이혼 선언은 고모로서 택도 없었다. 게다가 주먹을 부르는 소리였다. 머리가 뭉텅이로 뽑힌 아버지는 한참 욕을 들으며 방바닥만 쳐다봤다.

 

“헛소리 하지 말고 가가꼬, 토닥거리고 달래가면서 살아라.”

 

기나긴 욕설 뒤에 조촐한 덕담(?)을 들은 아버지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밥 묵고 가라.”

 

“됐소.”

 

고모 집에서 허탕 친 아버지는 다시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향에 가서도 할머니나 큰아버지의 반응은 고모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를 흔들어 놓기 위한 여정이었지만, 그 누구도 아버지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들은 말 대부분은 “헛소리 하지 마라”와 “정신 차려라”였다.

 

아버지는 고향 동네 구멍가게에서 날마다 소주 됫병을 들이켰다. 일주일 후, 엄마가 보고 싶다며 밤낮으로 우는 나 때문에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부모님 두 분을 불러 앉혀 놓고 타일러 부산으로 다시 돌려보내셨다.

 

고모와 큰아버지, 그리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혼하라고 했던 할머니까지 왜 아버지의 이혼을 말렸을까?

 

이것은 앞선 인터넷 댓글에서 보았듯, 정신이 병든 가족을 병원에 가두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에 있을 것이다.

 

가두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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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봄날은 간다>

 

정신이 아픈 가족을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 이유는 제법 많다.

 

첫 번째는 인권 문제.

 

아무리 이상행동을 한다 해도 사람을 병원에 가둔다는 것은 인권 측면에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입원하려면 본인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너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입원해서 치료 좀 받자.”

 

라고 하면,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난 이상한 것 같아. 병원 가자.”

 

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번째는 금전적인 문제.

 

돈이 많은 부자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예상했던 금액으로 한달 한달을 빠듯하게 산다. 더 심한 경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수입과 지출이 정해진 상태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거나 입원하게 되는 상황은 가정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가장이 입원하게 된다면, 그 타격은 더 크다.

 

세 번째는 이상증세를 확실히 확인할 수 없는 경우.

 

같은 집에 거주한다면 이상증세를 파악할 수 있기가 쉬울 테지만, 거주지가 다르다면 그런 상황을 모를 수 있다. 또 증세가 1년 365일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간혹 나타난다거나 특정 상황에서만 나타난다면 파악하기 어렵다.

 

네 번째는 사회적 인식.

 

해외에선 비교적 개방적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조차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나 정신과 상담을 받고 와서 약 먹고 있어.”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우가 일수다. 가벼운 상담을 받아도 심각한 정신병자 취급 받는 건 시간문제다. 마을에 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에는 뒤에서 수군거리고 일단 거리를 둔다.

 

다섯 번째는 살아가면서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가족들의 희망.

 

내 자식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형제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아지지 않겠냐는 가족들의 간절한 희망이 오히려 상황을 좋지 않게 흘러가게 할 수도 있다. 할머니, 큰아버지, 고모도 아버지에게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이도 하나둘 낳고 키우다 보면 전쟁 트라우마도 잊어버리고 말끔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옛날 분들의 사고방식은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힘들지만 그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티고 살았다. 그런 희망 하나 정도는 품고 사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그 작은 희망 마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일찌감치 각자의 길을 갔을 것이다.

 

온 가족이 희망을 품고 버티며 살아서였을까? 사회생활을 계속하고, 내가 자라고, 동생이 태어나고 커가면서 아버지의 손찌검은 줄었다. 이혼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을 사 모으는 건 여전했다.

 

병원에 갈 핑곗거리

 

흉기로 사람을 위협하거나 해치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가정환경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것들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살아오면서 습득한 내 좁은 경험으로 느낀 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언젠가 당당하게 나는 '과민대장증후군'이라고 밝힌 적도 있지 않은가!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과 상담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처방을 받는 것처럼,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을 두려움과 혐오로 보는 시선 역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정신적 치료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고, 그들의 자발적인 내원 확률이 올라간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제도개선과 관심이 필요하다. 사고가 일어난 뒤, 경찰특공대를 거리에 배치하는 등의 조치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며 보여주기식 대응이다. 범죄 발생에 대한 억제력이 있는가에 대한 것도 의문이다. 근본적인 사고 방지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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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지금까지 국가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국민 개개인의 몫으로 내버려뒀다. 아니, 방치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정신질환자가 구성원으로 있는 가정 중 입원을 시킬 정도의 재력을 갖춘 집안은 몇이나 될까? 또 환자의 입원 동의를 얻을만한 설득력 있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결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환자와 가족 모두 마음고생하고 살다가 결국,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을 오롯이 국민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경찰, 소방관, 군인에 대한 트라우마 케어도 꼭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직종은 다른 직업에 비해 비교적 험한 일을 많이 겪고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의 아버지처럼 참전한 군인에 대한 정신적 케어는 전무하다.

 

물론, 국가에서 보훈병원을 운영하고 유공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참전군인들은 대부분이 상남자라서 가족들이 정신적인 문제를 인식해 정신과 상담을 받자고 당사자에게 말을 해도, 격렬한 분노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그런 비인권적인 발상을 할 수 있냐고 비판받을 만한 생각도 한 적 있다. 강제적으로 또 정기적으로 상담과 치료를 받게 하는 방법이다. 칼을 구매한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장롱에 넣어두는 가족 구성원과 한집에 산다면, 밤에 불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해야 하는 그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쉽게 비판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가족도 가족이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본인도 말 못하게 괴로울 것이다.

 

다만, 트라우마가 있다고 무조건 진료를 받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증상을 파악한 뒤, 치료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편견 때문에 상담받고 싶어도 제 발로 가지 못하는 사람도 꽤 있기 때문이다.

 

“귀찮은데 나라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네!”

 

이렇게 병원 갈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복지마저 없다면, 국가가 국민을 필요할 때만 써먹고 방치당한 가족을 지켜보는 나머지 식구들은, 선거철에만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들과 국가를 혐오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진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그렇게 사회로 한 발 내디딜 수 있게 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돌아온 아버지는 병든 마음을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독한 소주만을 들이키며 상처가 소독되고 치료되길 바라며 살아갔다. 아니, 애당초 자신의 마음이 골병이 들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로 살아가셨을지도 모른다.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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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1997년 IMF. 한국에 외환위기가 오면서 대기업들의 줄도산이 줄 잇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자영업자들이 파산했다. 많은 사람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난 사실 우리 집이 더 곤궁해졌는지 어떤지 체감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개인 사업이기도 했고, 아버지는 매달 어머니에게 주고 싶은 만큼만 생활비를 주셨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천 원짜리 한 장 쓰는데 벌벌 떠는 집구석은 정권이 바뀌어도, 나라가 부도가 나도 똑같이 천 원짜리 한 장 쓰는데 손을 벌벌 떨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별다른 변화가 없던 97년 겨울.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버지는 항상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어머니가 촌스러워 부끄럽다고 말했다. 평생 옷 하나 사 입으라고 배포 크게 옷 살 돈 한 번 쥐여준 적도 없는데,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조롱했다. 덕분에 어머니는 평생 패션 테러리스트 같은 조합으로 옷을 입고 다니셨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 보는 정장을 위아래 차려입고 이리저리 점검했다.

 

"엥? 처음 보는 옷이네? 네 엄마 어디 가냐?"

 

항상 무뚝뚝하고 걱정 많은 표정의 어머니가 그날은 쑥스러움과 기대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인자 일하러 갈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