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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분과 남편 송일영, 두 사람 인생엔 두어 번의 경제적 상승 곡선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1991년 6월, 송일영의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 취득이었다. 동분 표현 빌리자면 “개인택시 받고 나니까 정말이지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풀리기 시작”했단다.

 

송일영이 처음 회사택시 몰기 시작한 건 1980년이다. 그러니 꼭 10년(1982~1983, 대한생명 충북지사장 수행비서로 1년 근무)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여기서 잠시 송일영 말을 들어보자.

 

“10년 만이었으니까 엄청 빨리 개인택시 받은 겨. 그때 아빠가 37살이었는데, 30대 개인택시 기사는 거의 없었어~~! 보통 40대, 늦는 사람은 50대에도 받고 그랬지. 아빠 주변에 회사택시 평생 굴리고도 끝끝내 개인택시 못 받은 사람이 태반이여. 말이 쉬워 7년 무사고지, 운전이라는 게 어디 내 뜻대로만 되겄냐?”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4조(면허 등) 및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규칙」 제19조(개인택시운송사업의 면허기준 등) 등을 충족해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특별자치시장ㆍ도지사ㆍ특별자치도지사에게 받는 면허를 말한다. 쉽게 말해 개인택시를 끌 수 있는 면허증이다. 1991년 당시엔 법인택시 무사고 운전경력 7년(현 5년)을 충족해야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점에 있어서, 송일영 자부심은 대단하다. 벌써 30년이 넘은 일인데도 이렇듯 개인택시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한껏 높아지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한다. 아마도, 송일영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어릴 적 꿈을 이뤄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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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여름 송일영의 자랑

로얄프린스 개인택시 앞에서

송일영(37살) 주홍(5살)

 

그렇다. 송일영 어릴 적 꿈이 다름 아닌 ‘개인택시’ 운전기사였다. 1955년에 태어난 송일영은 3살 터울 형 송갑영과 함께 학교에 걸어 다녔다. 자그마치 10리(약 4km) 길이었다. 끝도 안 보이는 비포장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학교 오갈 때, 아주 가끔이지만 검은색 개인택시가 뿌연 먼지 일으키며 옆으로 지나가곤 했다. 당시 기사들은 꼭 ‘라이방’ 선글라스에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었다. 10살 남짓 송일영 어린이 눈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하여, 먼지 뒤집어써 가며 택시를 쫓곤 했다. 물론, 얼마 못 가 숨을 헐떡거려야 했지만. 그때 송일영 어린이는 그런 결심을 했더랬다. 나중에 크면 택시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그냥 택시 말고, 멋지고 근사한 ‘개인택시’ 기사. 송일영은 기어코 꿈을 이뤄냈다. 그리고 여기엔 동분의 절대적인 조력이 있었다.

 

굶어 죽지 않은 게 다행

 

이야기는 다시 1988년으로 간다. 지긋지긋한 시집살이 끝내고 분가하던 시점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시댁에 들어갔을 때, 니네 아빠랑 얘기했던 건 큰아빠 감옥에서 출소할 때까지였어. 그때까지만 시댁에서 살기로. 그러다 1988년에 니네 큰아빠가 출소했고, 얼마 안 있어서 가출했던 큰엄마도 집으로 들어왔단 말여. 그러니까 이제 우리 가족은 분가해도 되잖어. 니가 생각해 봐라. 시골집이라 아무리 방이 많다고 해도 니네 할머니, 삼촌, 엄마, 아빠, 주성이, 너, 큰아빠, 큰엄마, 영희, 철수까지. 뭐 한다고 그 많은 식구가 다 같이 사냐고. 그래가지고 니네 할머니 몰래 신탄진에 집을 얻어놓고, 이제 돌 지난 너를 업고, 6살이었던 주성이 손을 잡고, 니네 할머니한테 폭탄선언을 한 거지. 이제 그만 나가서 따로 살겠다고. 물론, 니네 아빠랑은 얘기가 끝난 상태였지. 그랬더니 니네 할머니가 난리, 난리가 난 겨.”

 

동분의 시어머니 입장에서 성질머리 대단한 큰아들 송갑영이나, 한 번 집 나갔다 돌아왔을 만큼 뻣뻣한 큰며느리나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 터. 그나마 상대적으로 편한 둘째 내외가 있어, 모진 세월 견뎠다. 그랬는데 갑자기 분가하겠다고 하니 탐탁지 않았던 것. 시어머니는 동분 옷자락을 잡아끌며 절대 못 보낸다고 막았다. 나가겠다는 동분과 막으려는 시어머니 사이에 한차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때였다. 등에 업혀있던 작은아들 주홍이 울기 시작했다. 겨우 13개월 된 주홍은 알았던 걸까. 엄마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니가 울기 시작하니까 니네 형도 따라 울고 아주 눈물바다였어. 도저히 안 되겠어서, 우선 방으로 들어왔지. 그랬더니 니네 할머니가 내 신발이랑 니네 형 신발을 마당에 막 집어 던지면서 악다구니 쓰는데, 아휴 무섭더라니까? 저녁에 니네 아빠 와가지고 겨우 탈출한 거여. 그때 니네 큰아빠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쌀 반 가마니 사주더라? 그게 엄마가 시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거여. 쌀 반 가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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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봄, 시댁에서 분가하기 직전

 동분(28살), 주성(6살), 주홍(2살)

 

1988년 6월, 마침내 분가해서 들어간 집이 바로 ‘공주슈퍼 집’(당시 동분이 살던 집은 상가건물 2층이었다. 1층에 슈퍼가 있었다. 슈퍼 이름이 ‘공주슈퍼’였다. 하여 동분은 이후에도 그 집을 ‘공주슈퍼 집’이라고 표현했다)이다. 친정아버지 정명식과 마지막 추억을 나눴던 바로 그 집 말이다.[11번째 에피소드 참고](링크) 동분 가족은 이 집에서 1988년 6월부터 1991년 6월까지 3년간 살았다. 그 3년을 떠올릴 때마다 동분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았나 싶다.

 

“니네 아빠가 1991년 6월에 개인택시 받았잖어. 그러니까 1990년부터 개인택시 받을 때까지 거의 1년 반은 우리 집이 완전 개털이었어. 너도 운전 오래 했으니까 잘 알겄지만, 7년 무사고가 쉬운 일이 아니잖어. 내가 운전 잘해도 남이 와서 박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가지고 니네 아빠가 무사고 6년 차부터는 운전을 아주 소극적으로 하더라고. 이게 뭔 말이냐면 회사택시 끌고 나가서도 영업을 제대로 안 했단 얘기여. 아차 하는 순간 사고 나면 도로 아미타불인데, 평소처럼 죽자 살자 손님 태우고 쌩쌩 달릴 수 있겄냐? 그러니 뭐, 사납금을 제대로 채웠겄어, 월급을 제대로 받았겄어. 굶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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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공주슈퍼집 시절

처음으로 찍은 가족사진

주성(7살), 송일영(35살), 주홍(3살), 동분(29살)

 

신발 밑창 붙이다 불 내먹은 사연

 

동분은 그때부터 갖가지 부업을 시작했다.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주성과 4살밖에 안 된 주홍 놔두고 직장에 다닐 순 없었다. 제일 많이 한 건 신발 밑창 붙이는 일이었다.

 

“엄마가 제화공장에 3년 정도 다녔잖어. 아 왜 있잖어~!! 고순화 만난 게 제화공장 아녀~!! 그래가지고 신발을 좀 만질 줄 안단 말여. 집에 쪼만한 수레가 하나 있었어. 너를 업고, 수레를 끌고 한 30분 걸어가면 신탄진역 너머로 신발공장이 있었어. 거기서 신발 밑창을 한 수레 받아다가 본드 칠 해서 붙이는 겨. 다 붙이면 다시 실어다 주고, 또 받아오고. 그러다 집에 불난 거 아녀.”

 

때는 1990년 늦가을이었다. 일찌감치 주성과 주홍 재우고 부엌에서 신발 밑창을 붙이고 있었다. 잘 자던 4살 주홍이 “똥 마렵다”면서 부엌으로 나온 건 늦은 밤. 공주슈퍼 집은 단칸방이어서 화장실이 외부에 있었다. 하여, 동분은 주홍이 똥 마렵다고 할 때마다 부엌 한쪽에 신문지를 깔아줬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한쪽에 신문지 깔아주고 신발 밑창 붙이는데 연탄불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 나오더라는 것.

 

“원래 본드가 굉장히 독한 거여. 그래가지고 평소엔 현관문 열어놓고 작업한단 말여. 근데 하필 그때 니가 똥 싼다고 하는 바람에 호호호. 추울까 봐서 잠깐 현관문을 닫았지. 그랬더니 금방 본드가 공기 중에 꽉 찼나 봐. 그게 둥둥 떠다니다가 연탄불로 들어간 겨. 갑자기 불길이 솟아 나와서 쭈그려 앉아있던 너를 덮치는데 엄마가 얼마나 놀랬게. 주성 아빠~~!!! 불났어~~~!! 빨리 나와봐~~!! 막 소리치면서 너를 얼른 안아가지고 밖으로 나왔지. 니네 아빠가 후다닥 나와서 불은 금방 껐는데, 그 잠깐 찰나에 니가 화상을 입은 겨.”

 

곧바로 응급실로 간 주홍은 오른쪽 다리 전체와 엉덩이, 오른쪽 손가락 일부까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응급처치하는 내내, 동분은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응급처치 끝내고 병실로 온 주홍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이제 겨우 4살밖에 안 된 꼬마였다. 그 자그마한 몸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고 동분은 또다시 쓰러졌다.

 

“지금 와서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아휴, 그때는 진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더라고.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자식 아픈 거 보는 부모 마음이 성하겄냐. 근데 또 웃긴 게 뭔 줄 아냐? 그때도 니가 참 독하다고 생각했는데, 호호호. 그 어린놈이 아빠가 장난감 사준다는 말 한마디에 울음을 뚝 그치더라고.”

 

그것이 나의 어린 시절 최초 기억이다. 붕대를 칭칭 감고 아빠가 사준 장난감 갖고 놀던 기억, 퇴원 무렵 붕대 풀고 의사 앞에서 검진받던 장면, “이 정도면 크게 흉터는 안 남겠네요.”라는 의사 말에 안도하던 엄마의 모습 등등. 의사 소견과 달리, 내 오른쪽 다리엔 제법 선명한 화상 흉터가 남았다. 그게 콤플렉스였던 난 중학교 때까지 반바지를 거의 안 입었다. 다행히 나이 먹을수록 흉터는 점차 희미해졌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머리가 크면서 ‘흉터 따위 아무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턴 편하게 반바지 입는다. 지금은 한겨울에도 반바지에 슬리퍼 찍찍 끌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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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동분과 작은아들 주홍

주홍은 오른쪽 다리에 화상을 입은 후로

주로 긴 바지를 입고 다녔다

 

다시 돌아와, 부업만으로는 살림 해결이 안 됐다. 그때마다 동분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김치와 밑반찬은 물론이고, 참기름이며 고추장, 고춧가루까지 얻어다 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할 땐 언니 정동순에게 전화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동분은 그렇게 버텨냈다. 그리고 기어이 그날이 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