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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9.금요일

 

임지선

 

 

 

 

 

 

 

 

그를 위로할 이는 아무도 없다

 

 

 

 

 

대형마트 안은 백야의 사막이다. 태양보다 눈부신 형광등은 수만 종류의 제품을 환하게 비추며 하루 종일 고객을 유혹한다. 시간을 잊은 고객들은 이리저리 카트를 민다. 고객의 쾌적한 쇼핑을 위해 365일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마트 안은 적정 온도를 유지한다.

 

 

 

 

 

 

 

 

 

 

2011년 7월 2일 새벽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이마트 탄현점. 소비 천국의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해 돌고 또 돌아야 할 지하 1층의 어둑한 기계실 안 냉방설비가 멈췄다. 큰일이다. 이마트 쪽은 고객의 쇼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정이 넘은 새벽 시간에 사람을 불러 보수작업을 시작하도록 했다. 작업을 위해 냉방설비 제작업체에서 한 사람, 유지·보수 업체 대표와 직원이 각각 한 사람, 그리고 아르바이트생 한 사람, 이렇게 총 네 명이 파견됐다.

 

 

 

 

 

몇 시간 뒤 기계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마트 경비 직원이 기계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240제곱미터 규모의 기계실에 들어찬 가정용 냉장고 열 배 크기의 터보냉동기와 보일러 사이로 쓰러진 인부들이 보였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네 명 모두 숨진 뒤였다. 경비 직원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계실 안에서 가스 냄새 같은 것이 났다”고 말했다. 출동했던 소방대원들과 경찰도 현장을 본 뒤 네 명의 인부가 누출된 냉매가스 등에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했다.

 

 

 

 

 

사망자 중에는 몇 달 전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서울시립대 학생 황승원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물두 살의 그가 숨진 채 발견된 곳은 출입문에서 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마트 고객들의 쾌적한 쇼핑을 위해 냉방설비를 고치다 죽었건만, 누구도 이 죽음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마트 쪽은 “우리는 냉방설비를 구입했을 뿐이고, 고장이 나서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마트는 숨진 인부들의 장례식장에 조화조차 보내지 않았다.

 

 

 

 

 

냉방설비는‘트레인코리아’라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판매한 것이다. 판매만을 대행하는 트레인코리아는 냉동설비의 유지와 보수를 서울 신당동의 자그마한 보수업체인 ‘오륜’에 맡겼다. 오륜의 직원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이마트는 제품 이상이라며 트레인코리아를 탓했다, 트레인코리아는 작업 중 과실이라며 오륜에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오륜의 사장님도, 바로 밑의 경력자도 사망했으니 오륜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된 황 씨의 죽음을 위로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학생의 빛과 빚

 

 

 

 

 

하여 장례식은 끝도 없이 길어졌다. 누가 이 청년의 죽음을 보상해줄 것인지, 당장 장례비는 누가 지불할 것인지 책임 미루기와 경찰 조사가 지루하게 늘어졌다. 황 씨의 주검은 40일이 넘도록 동국대 일산병원 냉동고에 보관됐다. 쓸쓸한 장례식장을 지킨 사람은 황 씨의 어머니와 열여섯 살의 여동생뿐이었다.

 

 

 

 

 

 

 

 

 

 

황 씨의 여동생을 처음 만난 날은 황 씨가 사망한 지 보름이 지난 후였다. 황 씨의 어머니는 빈소 한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검은 상복을 입은 황 씨의 여동생은 우두커니 구석에 앉아 있었다. 영정 사진 속, 하얀 피부와 맑은 미소를 지닌 오빠의 얼굴과 매우 닮았다. 오빠에 대해 묻자, 여동생은 조용히 입을 열며 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오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스물두 해 짧은 삶 내내, 오빠는 책임감에 짓눌려 살았다. 오빠가 중학생, 동생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 어린 남매가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가 얼마나 크게 망했는지를 알 길은 없었다. 다만 그날부터 가족은 쫓기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족은 주변 사람들 몰래 외국으로 나갔고, 갖은 고생을 했다. 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에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또 어딘가를 떠돌았고 어머니는 몇 년 전 홀로 한국에 들어와 식당, 찜질방, 공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서울 신당동에 보증금 1000만원, 월세40만 원짜리 반지하집을 구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오빠는 늘 동생에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여섯 살 어린 여동생을 “우리 애기”라고 부르며 끔찍하게 아꼈다. 가끔이지만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들어오는 날에는 오빠는 “아이고, 우리 애기”라며 자는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빠는 열다섯에도, 스무 살에도 늘 동생에게 하늘 같은, 아빠 같은 존재였다. 동생은 “늘 어른스러운 오빠였는데 우연히 들춰본 일기장에 ‘또래 아이들처럼 게임하고 싶다, 놀고 싶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빠는 한 번도 그런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빠는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학원비를 낼 돈이 없어 검정고시 학원을 한 달 만에 그만두어야 했지만 2007년 독학으로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이후 이종사촌 형에게 어려운 문제를 물어가며 혼자 수능을 준비했다. 2008년엔 세종대 호텔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여동생에게도 검정고시를 권했고 영어, 수학 개인교습을 해주었다. 덕분에 동생도 손쉽게 중학교 졸업 자격을 따냈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딸 참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800만 원에 가까운 등록금 때문에 늘 고민했다. 공장에 나가 100만 원이 간신히 넘는 월급을 받아오는 어머니에게 부담을 줄 수 없었다. 1학년을 마치는 동안 두 학기 등록금 1000여만 원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오빠는 등록금에 비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없고 학교가 너무 노는 분위기라며 괴로워했다. 공부에 매달린 결과 2학년 1학기에는 성적우수자로 뽑혀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됐지만,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알바해서 학자금 대출부터 갚을거야”

 

 

 

 

 

그렇지만 대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빠는 다시 수능을 봤다. 등록금이 사립대의 절반 수준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등록금 부담은 덜었지만 1000여만 원의 학자금 대출은 오빠를 숨 막히게 했다. 결국 한 학기만 다닌 뒤 군대에 갔다. 쌓여가는 학자금 대출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서울시립대에서 한 학기를 다니는 동안 친구도 거의 사귀지 않았다. 돈이 들까봐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다. 모꼬지를 가도, 축제가 열려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따금 학생식당에서 2,500원짜리 점심을 같이 먹던 오빠의 과동기는 오빠를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수업이 끝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꿈이 뭐냐고 물으니 “엄마 모시고 편하게 사는 게 꿈”이라는 답이 돌아왔었다고 한다.

 

 

 

 

 

군대에 가서도 오빠는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 군 복무 중에도 월급 5만 원을 집으로 부쳤다. 짧은 휴가를 나와서도 인력사무소를 찾아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동생의 공부를 도와주고 빈곤노동에 지친 어머니를 위로했다. 휴가 동안 쓰라며 어머니가 건넨 3만 원을 여동생의 책상 위에 남겨두고 부대에 복귀하는 사람이었다.

 

 

 

 

 

2011년 5월 18일 오빠는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분주했다. “복학하기 전까지 바짝 벌어서 학자금 대출부터 갚을 거야.” 군대에 있는 내내 1000만 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이 목에 걸렸다. 이것부터 해결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제대 후 며칠 동안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를 살펴보던 오빠는 “동네에 있는 냉동설비 수리업체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반가워하며 면접을 보러갔다. 그리고 “월급이150만 원이나 된다”고 기뻐하며 출근했다.

 

 

 

 

 

아르바이트는 머리보다 몸을 쓰는 일이었다.‘오륜’은 직원이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영세한 회사였다. 주로 하청을 받아 설비 고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황 씨도 이곳저곳 현장에 투입됐다. 선임자를 따라 나사를 조이고 망치질을 했다.

 

 

 

 

 

오빠는 출근 뒤 며칠 동안은 회사를 다녀오면 온몸이 아프다고 끙끙거렸다. 여동생은 제대하자마자 고생하는 오빠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끙끙 앓는 오빠 곁에 앉아 가만가만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오빠, 이렇게 힘든데 좀 편한 일하면 안 돼?”라고 물으면, 오빠는 “이 정도는 괜찮아, 월급 150만 원 벌 수 있는 데가 흔치 않거든”하고 말했다. 또 “9월에 1학년 2학기 복학할 때까지 넉 달 동안 계속 일하면 세종대 다니면서 빌렸던 학자금 대출도 좀 갚고, 서울시립대 다음 학기 등록금도 낼 수 있어”라며 활짝 웃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오빠는 여동생에게 용돈이라며 5만 원을 건넸다. 여동생은 미안해서 그 돈을 받지 못했다.

 

 

 

 

 

 

 

 

 

 

가족 모두 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은 좀처럼 벗을 수 없었다. 오빠가 죽던 날, 2011년 7월 2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신당동의 영세 공장에서 완성된 제품에 라벨 붙이는 일을 하며 월 110만 원을 버는 어머니가 쉬는 날이었다. 여동생은 어머니 옆에 누워 나른한 토요일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지하방에는 빛이 천천히 들었다.

 

 

 

 

 

지난밤에 “이마트에 야간작업을 간다”며 집을 나간 오빠는 아침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고생하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날이 밝고도 한참이 지났다. 슬슬 걱정이 될 때쯤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걱정 반, 반가움 반에 어머니가 전화를 받고 다짜고짜 물었다. “너 안 들어오고 뭐해, 어디야?” 잠시 뒤,어머니가 몸을 벌벌 떨며 전화기를 떨궜다.

 

 

 

 

 

“어떡해…, 어떡해….”

 

 

 

 

 

“엄마, 왜 그래”

 

 

 

 

 

“…오빠가 죽었대.”

 

 

 

 

 

어머니의 말을 동생은 한동안 알아듣지 못했다.

 

 

 

 

 

 

 

 

창문만이라도 열 수 있었다면

 

 

 

 

 

이후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 병원에 가서 어머니와 이모부가 오빠의 주검을 확인했다. “승원이가 나 때문에 죽었어. 승원아, 엄마 왔는데 왜 안 나와….” 어머니는 오열했다. 사망 당시 오빠가 갖고 있던 휴대전화와 지갑 등이 ‘유품’이란 이름으로 여동생에게 전달됐다. 잠시 뒤 오빠의 휴대전화로 군대 동기들이 전화를 해왔다. “승원아, 오늘 술한잔 어때.” 동생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저희 오빠가… 죽었어요. 질식해서 죽었대요.”

 

 

 

 

 

가족들은 황 씨의 주검을 사망 40여 일 만인 2011년 8월 15일에 발인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이마트 등 관련 기업들의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하며 발인을 미뤄왔던 유족들은 결국 대부분을 포기하고 장례를 치렀다.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고 국회의원까지 진상규명과 책임보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건만, 세상은 꿈쩍하지 않았다. 눈물과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황 씨의 어머니는 췌장염 진단을 받고 쓰러졌다. 유족은 지칠 대로 지쳤다.

 

 

 

 

 

 

 

 

 

 

진상규명을 오래 끌던 경찰은 보잘것없는 결론을 내놓았다. 사건을 담당한 경기도 일산경찰서는 황 씨의 발인이 있기 3일 전, 트레인코리아의 안전관리자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하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수사 결과 현장의 작업환경 관리 책임은 트레인코리아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하청업체이자 황 씨가 소속돼 있던 냉동설비 보수업체 ‘오륜’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되지만, 대표가 사망해 공소권이 없다”고 밝혔다. 이마트 기계실의 작업환경이 열악한 부분에 대해서조차 이마트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환기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창문만이라도 활짝 열 수 있었다면 인부들이 질식사하지 않지 않았겠냐는 의문에는 답이 없었다.

 

 

 

 

 

황 씨가 죽을 때까지 걱정했던 학자금 대출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제 학자금 대출이자 내는 날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여동생은 물었다. 늘 자랑스러웠던 성실하고 착한 오빠가 남긴 것이 빚뿐이라는 사실을 동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승원 씨를 짓누르던 학자금 대출을 어머니와 여동생이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사망 직후 3개월 안에 법원에 ‘상속포기 신청’을 해야 한다. 현실은 냉정하다.

 

 

 

 

 

다행히 서울시립대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민들이 모금을 해주었다. 모금액으로 황 씨의 학자금 대출은 갚아질 것이다. 장례식장을 찾은 대학생들은 황 씨의 여동생을 위로하며 서로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동생의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그렇다면 동생도 대학에 가게 될까. 값비싼 대학 등록금을 내고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아름답게 꿈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오빠의 죽음 앞에 동생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당장 다가오는 검정고시를 치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너무 혼란스럽지만 단 하나 제가 아는 것은 이제는 오빠를 보내줘야 한다는 거예요. 불쌍한 우리 오빠, 이제 그만 힘들고 편히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동생은 그렇게 오빠를 보냈다. 떠나기에도 떠나보내기에도 너무나 젊어 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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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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