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2.11.13.화요일

 

무천

 

 

 

 

 

 

 

 

 

 

 

 

 

부산의 한 일본어 학원을 잠시 다닌 적이 있다. 원장이 LG가와 같은 성씨를 썼는데, 전형적인 여성형 마초(?)였다. 수강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해 몇번 같이 술을 마신적이 있는데, 이 원장이 늘 달고다니던 저주가 ‘무임승차자’에 대한 혐오였다. 사회의 어느 계층이나, 역할없이 그저 얹혀가는 무임승차자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되서는 안된다는 거다. 사회를 위해 시스템하에서 제 몫을 하지 않고, 그저 기생하는 ‘것들’을 방치하면 안되고, 나아가 강하게 제재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한 견해가 자리잡게 된 배경에 대해 여러모로 추정을 했었는데, 결론을 내리기 전해 학원을 그만뒀다.

 

 

 

 

 


 

 

 

 

 

위대한 정치가란 죽은지 30년이 지난 사람이란 농담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이해당사자들에게 배제돼, 시간과 공간이 격해진 객관적인 검토가 이뤄졌을 때야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할테지만, 결과적으로 당사자는 생전에 그의 업적과 노력에 대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래로 혁명과 독립의 과실을 맛보는 이는 항상 소수였으며, 숱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에게 돌아간다.

 

 

 

 

 

예컨대, 민족주의 및 민족운동이 성공을 이루었을 때 얻는 이득은 모두가 동등하게 공유된다. 조선에 있어 광복의 결과는 모든 조선의 인민에게 적용됐으며 어느 누구도 새로이 얻은 민족의 독립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독립이라는 대의에 하나도 기여하지 않은 구성원도, 심지어 친일적 성향의 시민들까지, 독립을 이루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던, 임정이나 독립투사들 만큼이나 독립이 가져다준 이득을 맛봤다는 얘기다.

 

 

 

 

 

 

 

 

 

 

그럼 독립투사와 그러한 무임승차자(변절자)가 똑같은 자유와 독립의 과실을 누림에도, 왜 일단의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희생과 죽음을 무릅쓸까. 왜 열사들과 지사들, 그리고 선각자와 선구자들-그리고 주위의 ‘소위’ 운동가들-은 생애를 바쳐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걸까?

 

 

 

 

 

스미스형이 좋아했던,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대의에 헌신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혁명의 수행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높을 수록, 혁명에 투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진화심리학에서는 사람은 종족보전을 위해 민족의 복지와 번영을 위해 싸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족은 혈연이 확대된 하나의 확대가족이며, 비록 현재 민족내의 타인이 생면부지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이 결혼할 사람 또는 자기의 자손이 결혼할 사람의 부모와 조부모가 될 수 있으니, 큰틀에서 민족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싸우는 것은 미래의 자기가족과 자손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민족에 의해 이러한 경향이 진화를 통해 유전적으로 선택되고 확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민족을 확대가족이라 정의할 때, 독립투사들은 종족의 보전을 위해, 확대가족의 복지와 번영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운동에 헌신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비합리적이지만 진화적, 생물학적으로는 합리적이다.

 

 

 

 

 

 

 

 

 

 

이렇게 볼 때 무임승차자가 많은 민족은 진화적으로 퇴행가능성이 크거나, 혹은 멸절의 위험성이 큰 종족들이다.

 

 

 

 

 

저항시인으로 대표되는 김지하는 그의 치열했던 저항사와 그로인해 기구했던 그의 가족사를 통해 시민적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이다. 김지하를 생각하면 ‘타는 목마름’으로 대표되는 그의 저항시나 혹은 호기 넘쳤던 풍자시 ‘오적’이 생각나야 함에도 그보다, 김훈의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가 떠오르는 건 시민이 김지하와 그의 가족들에게 진 부채감이 두고두고 짓누르기 때문일 테다.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1975년 2월 15일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7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영하 12도 아래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북서풍이 불었고, 그날 밤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 영등포 교도소 앞 거리에는 라면 껍질과 연탄재가 북서풍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솟구치고 있었다. 1974년 7월 13일에 군사재판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형법 상의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김지하는 1975년 2월 15일 밤 아홉 시 사십 분께 형집행정지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했다.

 

 

 

 

 

 

 

 

 

 

나는 그날 아침 열 시께부터 서울 영등포 교도소 정문 앞에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신이 선포되던 1974년부터 신문기자의 업을 시작했던 나의 밥벌이였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희망이란 없었다.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포기한 사람과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아마도 포기한 사람 쪽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청춘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라는 것이 부재한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을 향해 필사적인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들은 스스로의 소망이나 지향성을 외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폐기처분해버린 소망과 지향성이 타인에 의하여 불붙여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기약 없는 겨울을 통과해 나가고 있었다. 그날 영등포 교도소 앞에는 대낮부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교도소 쪽은 김지하의 석방 시간을 예고하지 않았다. 또 예고했다 하더라도 정치범의 석방 시간에 관한 약속을 법무 당국은 번번이 지키지 않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출소자들은 새벽이나 심야에 교도소 뒷문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하였음으로, 기자들은 하루 종일 교도소 문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교도소 앞 거리에서 나무토막이나 종이상자를 주워 와 모닥불을 때거나 혹은 인근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구공탄 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불기 주변에 모여 언 발을 녹여가면서 교도소 정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교도소 문이 열리고 김지하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음으로, 기자들은 저녁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교도소 정문은 텅 빈 벌판이었고, 그 벌판 가장자리에 매우 더러운 몰골의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우리는 수습기자 한 명을 그 음식점으로 보내 저녁밥을 배달시켰다. 나는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서 짬뽕을 시켜달라고 했다. 기자들 대부분은 자장면보다는 짬뽕을 주문했다. 그런데 배달되어 온 짬뽕 국물은 차게 식어 있었다. 우리는 내버린 연탄재 주변에 모여 그 차가운 짬뽕을 후루룩거리며 들이마셨다. 지방판 마감은 대체로 오후 6시였다. 김지하가 다섯 시 삼십 분 이전에 출감하지 않는다면, 조간기자들은 지방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간기자들은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서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이 아니냐”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교도소 측 답변은 출소자들에 대한 소장의 정신 훈화가 남아있고 또 교도소 담장 밖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어 있어 출감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루 종일 추위에 떨고 나서 지방판을 포기해버린 저녁에, 우리들은 연탄재와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얼음이 잡혀오는 짬뽕 국물을 마시면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아마도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쯤이 아니었을까. 내가 짬뽕 그릇을 입에 대고 국물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연료를 아끼느라고 택시 안의 히터를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 업은 여인네는 자동차 밖에서 떨고 있었다. 그 여인네는 자꾸만 허리춤을 들어 올려 미끄러져 내리려는 아이를 등의 한복판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저 여인네가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짬뽕 그릇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기자의 무리를 떠나서 그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음으로 멀리서는 인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네는 과연 박경리 선생님이었으며, 그 아이는 그 아버지가 수배망을 피하여 도망다니던 1974년 4월 19일날 태어난 강(岡)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김지하는 1973년 4월 7일 김영주와 혼인하였고 강은 그로부터 일 년 후인 1974년 4월 19일에 태어났으므로, 강은 그 부모의 신혼 초에 점지된 것이 확실하고 강이 태어난지 일주일 후에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바로 그날 흑산도에 피신해 있던 그의 아버지 김지하는 검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박경리 선생님의 등에 업힌 저 아이는 생후 10개월 미만일 터였다.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 것을 업고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바람부는 교도소 앞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집 안에 아이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 쪽으로 바짝 접근해서 그분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위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분을 마음 놓고 관찰했다.

 

 

 

 

 

여기 “박경리가 왔다”라고, 나는 내 동료기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 혼자서 그분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불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울지 마라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려 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여인네는, 교도서 정문 앞에서 들끓는 그 어떤 사람과도 무관해 보였다.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돌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無名)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의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네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 될 텐테,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독재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 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따뜻한 것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뜻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입을 벌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원천이었음을. 가로등 하나 없는 형무소 앞 광장은 캄캄하게 어두워졌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 고 있었다.

 

 

 

 

 

밤 아홉 시에 옥문이 열렸다. 나는 언덕 위의 박경리를 버리고 김지하를 맞기 위해 교도소 정문 앞으로 내려가서 기자의 무리들 속에 섞였다. 이제 김지하가 나타나면 기자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서로 김지하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난투극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구두끈을 졸라매었다. 그날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한 정치범은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걸려든 학생들이었고, 김지하와 박형규, 백기완이 이날 석방의 초점이었다. 적어도 기자들에게는 그랬다. 밤 아홉 시부터 학생들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학생 한 명이 나올 때마다, 만세 소리가 터지고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 교도소 정문 안쪽에서, 그내 가로등 불빛 속에 머리를 빡빡깍은 김지하가 나타나 정문 쪽으로 걸어오자, 교도소 정문 밖 사진 기자들은 전원이 전투배치되었다. 그들은 교도소 정문 위로 기어올라가거나 교도소 수위실 지붕 위로 몰려 올라갔다. 취재기자들은 제2선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팔꿈치로 인접 기자를 찍어서 물리치고 또 딴지를 걸며 쑤시고 들어가는 전법으로 김지하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일군의 기자들 속에 낄 수 있었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고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등 태워서 캄캄한 교도소 앞 광장을 미친 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그때 무등 위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종신형을 받았다. 이제 풀려나니 세월이 미쳤는지 내가 미쳤는지 아니면 둘다 미쳤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은 순수한 민주구국투쟁이며 정정당당한 합법운동이다. 이제 참으로 끔찍스런 사실이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나는 부패한 정권, 무능한 권력과 끝끝내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나는 김지하에게 바싹 붙어서 취재를 하면서도, 교도소 광장 건너 언덕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아이 업은 여인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지하가 무등을 타고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휩쓰는 동안에도 그 여인네는 어둠 속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여인네는 다만 바라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출감한 옥문 앞에서 장모를 만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의 안부를 물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김지하는 무등을 타고 기세를 올린 후 그의 지지자, 찬양자들의 무리들이 미리 준비해놓은 승용차에 올라타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날 밤 명동성당에서 하룻밤을 세웠다. 김지하가 떠나버린 어둠 속에 그 여인네는 혼자 오래오래 서 있었다. 아무도 여인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지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기자단의 대부분은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환영 나온 학생들, 기독교인들의 무리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교도소 앞 광장은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고, 아직도 출감하지 않은 백기완을 기다리는 사람들 몇 명이 남아 있었다.

 

 

 

 

 

나는 김지하가 출감하던 순간을 기사로 엮어 전화로 본사에 송고하고 다시 백기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백기완은 밤 열한 시께 석방되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기자단은 백기완의 석방이 늦어지는 이유를 교도소 당국에 가혹하게 추궁했다. 이미 발이 시려서 마비 지경에 이르렀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기자들은 악에 받쳤다. 기자들은 교도소 당국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교도소 당국의 설명은, 백기완의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형집행정지가 되었으나, 그로부터 6년 전에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또 있어서, 그 벌금 십만 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교도소 담 밖에 알려지자 즉각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군중들, 기자와 학생들 대부분이 김지하를 뒤쫓아서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모금이 될 리가 없었다. 기자들은 모금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해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다만 만져볼 뿐, 그 돈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때 나는 또 박경리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십만 원에 얽힌 백기완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던 모양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어느새 언덕에서 내려와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있었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은 좀 보태시오”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리고는 그분은 대절해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그분은 등에 업었던 아이를 풀어서 무릎 위에서 재우고 있었다. 시간은 밤 열두 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감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고문을 직접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앞세대와 달리 우리 후세대는 여러증언들을 통해 고문을 간접경험한다. 곧 개봉된다는 남영동 등도 있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상황을, 고문 후유증으로 차마 치과 치료대에 눕지 못했다는 김근태의 일화를 통해, 편린으로나마 짐작할 뿐이다.

 

 

 

 

 

 

 

 

 

 

세간에 읽혀지는 단편적인 사실들만으론 김지하가 왜 박근혜를 지지했는지 모르겠다.

 

 

 

 

 

안철수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박근혜 대통령도 나쁘지 않겠다는, -박근혜와 여성은 무관한 연결임에도 불구하고- , 그런 판단을 하셨을 수 있다. 변절의 논거로 회자되는 죽음의 굿판을 치우라는 조선일보의 칼럼과 석방 후의 건강에 대한 여러 염려들도 한 근거가 될 수 있을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근거에, 그 모든 사실에 기인한 비판들이, 그를 변절자로 매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삶은 미학적 전시물이 아니다. 왜 삶이 일관되어야만 하는가. 왜 지사에게 지사적 삶을 강요하는가. 특정의 시공간에 바친 그의 희생과 열정을 존중할 수는 없는가. 그의 '변절'을 애석해하며 침묵으로 배웅해 줄 수는 없는가. 김지하의 생각바꿈이 악의적으로 인용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 사상의 자유에 있어 무엇이 본질인가. 주변부를 고려해 내 생각을 감추는 것인가. 주변부와 상관없이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인가.

 

 

 

 

 

 

 

 

 

 

김지하가 변절했는가?

 

 

박근혜가 변절의 대상인가?

 

 

박근혜로 대변되는 정당과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변절의 상대방인가?

 

 

뭣보다 사람의 생각은 바뀔 수 없는가?

 

 

 

 

 

내가 황망해하며 분개했던 것은, 박정희 시대의 무임승차자들의 후손이 대다수인 현세대들이 김지하의 입장바꿈을 들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작태들이다.

 

 

 

 

 

현재의 누림을 위해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지불했는가?

 

 

이명박 정부를 위한 우리의 의기로운 분개도 사실은 '기대한 누림에 대한 결핍의 반동'아닌가?

 

 

 

 

 

무임승차자들이 기사를 그리고, 온당한 승차자를 뻔뻔하게 조롱하고 멸시하는, 이러한 부당이라니!

 

 

 

 

 

 

 

 

 

 

 

 

 

무천

 

 

트위터 : @Mucheo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