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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2. 월요일

사회부장 산하

 

 

 

 

 

 

 

"영인아. 영인아." 2005년 11월 11일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비닐하우스촌 어귀에서 나이 쉰 넷의 교사가 안타까운 어조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담임의 출산휴가로 임시로 두 달 전부터 맡게 된 반에서 영인이는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띄어쓰기를 전혀 배우고 익히지 못한 아이의 글을 보면 기가 턱 막혀 온 터에 다른 아이들 말에 따르면 엄마 아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혼자서 비닐하우스를 지키며 살고 있다고 했으니 교사 이전에 아이 기르는 부모로서 마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땟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옷은 아이를 돌보는 손길이 전혀 없음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40분 걸리는 학교를 꼬박꼬박 나오던 아이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결석했기에 아이의 집을 찾은 것이다.

 

 

 

 

 

10월 11일 교사는 아이를 불러 면담을 했다. 면담 결과 교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이의 공식적인 보호자는 외조부와 외조모인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살던 이모가 결혼을 해서 서울로 떠났고 아이의 외조부 외조모는 충남 당진으로 농사를 지으러 갔다는 것이다. 즉 9월 중순 이후 아이는 비닐하우스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정말 너 혼자 산다는 거니?" 아홉 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알게 된 학교는 의왕시에 사실을 전달하고 대책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반문은 "그 아이 수급자입니까?"였다. 절차와 조치를 기다리면서 교사는 일단 아이의 통학부터 챙기기로 했다. 출근할 때 마을 어귀에서 아이를 만났고 퇴근할 때는 아이를 태워 주었다. 아이도 선생님을 따랐다. 1시면 끝나는 수업 뒤 아이는 다른 데 가서 놀 생각도 않고 선생님 옆에서 놀면서 선생님의 퇴근을 기다렸다. 허기야 집에 가봐야 친구들은 다 학원에 갔을 것이고, 게임기 하나 집에는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교사의 아내는 갑자기 차에 실리기 시작하는 라면 박스와 빵에 놀랐다. 아니 이걸 어디에 쓰는 거예요. 아, 우리 반 애 줄 거요. 당장 어디로 옮기고 싶은데 맘대로 안되네. 애가 너무 불쌍해서...... 그렇게 챙기던 아이였는데 어느날 아침 클랙슨을 울리면 밝게 웃으며 선생님 차로 뛰어오던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가 볼까 했지만 친구 집에 가서 잤나 싶기도 해서 학교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 교사는 1교시 수업을 마치고 사정을 보고한 후 아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영인아 영인아."

 

 

 

 

 

막 집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교사는 혼비백산한다. 몸길이 130센티미터가 넘는 곰같은 개가 거칠게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엄두가 안난 교사는 경찰을 불렀지만 경찰도 개를 잡을 방법은 없어서 일행은 뒷문으로 비닐하우스 영인이 집으로 들어갔다. 전기밥솥의 밥은 새까맣게 썩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아이는 집에 없었다. 교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구나. 하지만 여전히 사납게 짖어대고 있는 개의 울음은 뭔가 불길하고 흉폭했다. 교사는 수업 후 다시 영인이의 집을 찾는다.

 

 

 

 

 

 

 

 

 

 

그때 교사는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접한다. 영인이는 양말만 신은 알몸으로 개에게 물어뜯겨 죽어 있었다. 옷들은 개가 찢어발긴 것 같았고, 이빨 자국은 수십 군데였다. 아이를 물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 듯 긁힌 상처도 깊게 나 있었다. 아이는 그 끔찍한 순간을 죽어서도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영인이를 물어죽인 개는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앞에서도 무섭게 저항하다가 경찰관의 권총 세 발을 맞고서야 고개를 떨궜다. "개밥을 주는 게 재미있다."고 일기에 썼던 아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밤과 낮을 맞던 아이는 전기밥솥의 밥 썩는 냄새 진동하는 집에서 선생님이 준 라면을 유품으로 남기고 개에게 물어뜯겨 죽음을 맞았다.

 

 

 

 

 

"시장에 가서 할머니가 책가방을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공부 열심히 할게요."라고 또박또박 일기에 쓰던 할머니는 먼곳에 있었고 개가한 어머니는 죽은 뒤에도 며칠 동안 아들을 찾지 않았다. “신발이 더러워서 빨았습니다." 라며 자신의 빨래를 스스로 했던 아홉 살 어린이는, "밤에 무섭지 않으냐?"고 묻는 교사에게 "안무서워요!"라고 짐짓 크게 답하던 가엾은 어린이는 그렇게 죽었다. 더 끔찍한 상상 하나. 그나마 아이를 챙기던 교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작은 육신조차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개에게 먹이를 주던 아이가 죽었으니 개의 먹이는 그 아이 밖에 없었을 것이니.

 

 

 

 

 

한겨레 21 2005년 11월 22일자 "미안해 아이들아 우리가 죄인이란다" 기사에는 위 사연과 함께 아이의 그림과 일기 일부가 실려 있다. 선생님과 친구들만이 있고 가족은 없는 그림 한 장과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일기장 일부. 돈이 궁했던 아이는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댔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차칸 영인이가 될께요." 아이다운 그림과 빼뚤빼뚤한 글씨는 보며 마음에서 열천이 솟았다. 대체 영인이에게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무심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엄마를 주먹 부르쥐고 성토하면, 입으로 때려죽이고 찢어죽이고 당장 구속하라 외치면 되는 걸까. 결국은 혼자 남겨졌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아이에 대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돗자리를 펴고 이마를 땅에 짓찧어 피를 흘린들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뼈저리게 슬퍼한들 또 다른 "착한 영인이"를 구할 노력에 무심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 개보다 나을까.

 

 

 

 

 

얼마 전 장애가 있는 동생을 제 몸처럼 돌보던 누나가 화재로 숨졌다. 동생이 싼 똥을 부모보다 빨리 치우고, 그 놀기 좋아할 나이에 동생에만 매달려 보냈다는 천사같은 아이는 그렇게 죽은 다음에야 사람들을 일깨웠고 해당 지자체는 생전에는 없던 지원을 하고 부조금이 쏟아졌다. 자신을 죽인 개와 함께 며칠 동안 병원에 안치되어 있는 동안 찾아오는 사람 하나 제대로 없었던 영인이보다는 나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흔히 "애들 가지고 장난치는 새끼들은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형반대론에 공감하지만 아동성폭력범이나 유괴범 같은 자들은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공감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애들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과연. 과연...

 

 

 

 

 

 

 

 

 

 

 

 

 

 

 

 

사회부장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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