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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7. 01. 월요일

논설우원 파토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에 미국의 한 천재 발명가가 기계 인간을 만들었다. 이것은 무쇠 보일러에 사지를 붙여 놓은 것 같이 단순무식하게 생겼지만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며 질문에 대답할 수도 있었다. 큰 키와 강철로 된 몸으로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졌던 이 기계는 당대의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함은 물론, 1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여러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기계인간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쟁 중 결국 실종되어 사라졌거니와 원래의 이상적이고 숭고한 뜻을 달성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발명가이자 부호 아치볼트 캠피언이 설계도 등 관련 정보를 몽땅 파기했기 때문이다(그는 1938년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기적 같은 기계의 공식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별명인 ‘보일러플레이트’, 즉 보일러 판때기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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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플레이트의 모습. 

1893년이라는 제작연도를 반영하듯 열라 고전적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일단, 로봇의 안정적인 2족보행 능력은 혼다의 아시모를 필두로 최근에 와서야 개발된 것 아니더냐. 헌데 보일러플레이트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 19세기에 이미 두 발로 걸으며 험한 지역에서도 거뜬히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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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폐허를 뚫고 전진하는 보일러플레이트

 

 

 

허나 이 놀라운 2족 보행 기능도 보일러플레이트가 갖춘 인공지능에 비한다면 하찮은 능력일 뿐. 기록에 따르면 녀석은 단지 입력된 명령만을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 전술을 학습하고 복잡한 명령을 기억한 후 북극과 남극, 사막에 이르는 다양한 지역의 임무에 투입되곤 했다. 이런 식이면 인간보다 못할 게 별로 없는데 첨단 과학과 컴퓨터의 시대인 지금도 못 만드는 걸 100년 전에 이미 만들어 운영했다니,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럴리가.

 

 

머,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아주 약간의 과학과 역사 지식만 있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이런 기계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는 사실처럼 주장한다면? 수많은 역사적 사실 및 인물과의 그럴듯한 결합 속에서 엄청난 양의 ‘당시’ 잡지 기사와 신문기사, 사진, 일러스트 등을 들이대며 당연한 것처럼 능청을 떤다면 어떨까. 아마도 열에 여덟은, 음, 혹시 진짜 있었던 건가 하고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 해 볼 거다.

 

 

우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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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세계챔피언 잭 존슨과 스파링하는 보일러플레이트

 

 

 

기억하는 넘은 하겠지만 원래 이런 짓은 본지의 전통적인 장기다. 초기 딴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역사탐방 시리즈.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가 한때 한국의 속국이었음이 밝혀짐은 물론 댄스뮤직, 화투, 골프 등이 모두 우리민족 고유의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증명된 바 있었다. 우원은 1999년에 ‘캐나다는 한국의 속국이었다’라는 글을 썼는데 수백 명의 감동한 독자들이 ‘잊혀진 역사를 파헤치고 민족정기를 일깨워줘 고맙다’는 진지한 감사 메일을 보내와 잠시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사실 우원은 이 책을 첨 손에 넣었을 때 좀 심드렁했다. 딴지는 이미 10년전에 손 뗀 일인데 뭐 이제 와서 이런 짓을 해 바보들. 머 이런 류의 잘난 척이 가미된 심술 비슷한 것 말이다. 하지만 본서를 일단 펴고 몇 페이지 안 넘겨 우원은 스스로의 경박한 비판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런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4대 원칙에 대해 열거해 보자.

 

 

일단 맨 먼저 필요한 것은 능청심이다. 이건 능력이라기 보다는 자세 혹은 철학인데,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인지를 알면서도 뻔뻔하게 입장을 고수하는 태도다. 일단 몰입하면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자기 내면에서도 불분명해질 정도로 집중을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물론 작업이 끝나면 거기서 반드시 깨나야 하지만서도.

 

 

두 번째는 끈기. 어떤 못난이라도 잠깐 동안이라면 능청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긴 기사 하나를 완성하거나 연재물을 쓰거나, 나아가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낼 정도가 되려면 그 능청심을 작업 기간 내내 제 2의 본성으로 승화시켜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과의 싸움, 인내심과 끈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구성과 디테일이다. 능청을 제대로 떨려면 이야기 구성이 그럴싸해야 하고, 그걸 그럴싸하게 만들려면 디테일의 확충은 절실한 과제다. 훌륭한 구성과 디테일을 구축한다는 말은 각 요소들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아 떨어지고 충분한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이때 디테일 확충의 최고 경지는 극 전개상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부분들까지 깨알 같은 내용으로 채워 넣은 경우다. 작가가 굳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 보이는 부분들까지 가득 차 있으면 이거야말로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

 

 

네 번째는 사진 등의 자료 제시 능력. 여기에는 뽀샵질로 대변되는 사진합성, 변조 능력이 포함된다. 말로만 떠드는 것과 그럴듯한 사진, 영상을 들이대는 것의 효과는 천지 차이다. 허나 뽀샵력이 충분히 뛰어나지 못하거나 쟝르나 내용상 적합하지 않은 경우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하니 그럴 땐 안 하느니 못하다.

 

 

 

이런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비로서 우리는 차원 높은 구라논픽션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래 두 작품은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 최근의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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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우원의 작품. 

쑥스럽지만 읽어본 이들이라면 여기에 집어넣는 게 무리는 아니라는 점에 동의할 터.

 

오른쪽은 최근 개봉된 영화의 원작 소설. 팩션, 혹은 구라논픽션의 철학과 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하곤 내용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제 보일러플레이트가 등장했다.

 

 

일단 씨바, 엄청난 디테일의 폭격이다. 기계인간을 만든 장본인인 아치볼트 캠피언의 탄생과 성장 과정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이 부분에만 수많은 그림, 사진 등과 함께 근 10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이 책의 디테일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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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 캠피언의 매형 휴 매키는 미 해군으로 복무 중 신미양요에 참전, 조선 땅에서 전사한다. 

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후일 아치에게 사람 대신 전쟁에 내 보낼 기계에 대한 발상을 던져 주게 된다.

 

 

 

와중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 자체와 관련해서는 최대한 충실하게 사실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역사공부도 된다. 예컨대 위의 경우처럼 로봇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신미양요가 등장하고, 큼지막한 지면 두 페이지를 통으로 할애하면서 전쟁의 배경과 상황, 영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든 보일러플레이트와 관련된 구라도 반드시 들어가 있는데, 첨엔 긴가민가하다가 읽다 보면 대략 구별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책 속의 수많은 그럴싸한 스토리와 디테일은 아래와 같은 사진과 그림에 의해 뒷받침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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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비야와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

혁명 과정에서 보일러플레이트의 친(親) 멕시코적 행적은 다소의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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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기념 행사에 참석중인 보일러플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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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 한 보일러플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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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플레이트의 활약을 과장되게 표현한 당시 소설의 표지. 

‘늑대개’로 유명한 소설가 잭 런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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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마술사 후디니와 함께 등장한 영화 포스터 (보일러플레이트는 인간 배우가 대역 출연)

 

 

 

이런 류의 사진, 일러스트가 300장이 넘게 들어있으니 구라논픽션의 창시자를 자처하는 우원으로서도 마 할말을 잃게 된다. 이런 미친 짓이 가능한 것은 저자 폴 기난 (책에 한글로 이렇게 표기되어 있는데 영문은 Paul Guinan 이고 폴 ‘가이넌’ 이라고 읽어야 맞다)이 원래 만화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폴은 아내 아니나 배넷과 함께 이 스토리와 디테일을 10년 동안이나 갈고 닦았다고 하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퀄리티가 나오는 게 놀랄 일만은 아니다.

 

 

머 이 정도 차원이면 능청심과 인내심은 이미 증명된 바겠지만, 책 맨 처음에 나오는 작가의 정식 인사말을 통해 그 수준을 또 한번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기 때문에 우원조차도 가끔 고개를 갸우뚱한 거다.

 

 

 

보일러플레이트의 일대기를 연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아래 분들께 감사드린다.

 

기록 보관소 열람을 전례 없을 정도로 너그러이 허용해 주신 캠피언 재단의 탁월한

 

큐레이터들,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책이 주는 교훈이나 그 속에서 우리가 배울 건 뭐냐고? LA 타임즈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기계인간 버전이라는 말도 했고 책 표지에 ‘세계를 감동시킨 기계 인간의 모험’ 이라고도 써져 있지만, 솔직히 뻔한 류의 감동 놀음 같은 건 이 책에 없다. ‘역사적’ 내용을 다루는 만큼 문체는 담담하고 객관적이며 이런 점은 보일러플레이트의 미스테리한 최후를 서술하는 데까지 일관되다. 그래서 이 책은 감동이나 교훈 보다는 완성도를 즐기는 책이다.

 

 

사실 진한 감동을 주는 책이라면 유명한 세계문학에 이미 널렸고, 때로 그런 감동은 무겁거나 진부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거 없고 그림책 보듯 보면서 이 정교함과 디테일과 능청에 감탄하면 되는 거다. 본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그런 특성과 가치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인생의 의미는 뭔지 사랑은 뭔지 우주는 왜 존재하는지 그런 거는 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아니냐.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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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매해 보시라


<보일러 플레이트> 예스24링크



 




<추신>

그야말로 옥의 티랄까. 청말(末)의 의화단 사건이 나오는데 (아치의 누나인 릴리 캠피언이 휘말려 좀 고생한다) 당시 청의 실력자는 서태후(西太后)고 본문 중에 언급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천년 전 당나라 때 사람이다.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 오류인지 모르지만 고쳐야 쓰겄다.

 

 




파토

트위터 :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