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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8.목요일

이동현







작년에 무작정 떠난 50일 정도의 여행기록. 매일의 일기와 사진을 올려봅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여행은 아닌지라 혼자 걸어다닌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즐거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행기를 읽는 분들도 이야기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인천 (49).JPG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최승자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고 했다. 서른 살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꼭 그런 느낌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불안하고 당혹스럽고 지쳐있었다. 딱 그만 둬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일상에 관성이 붙어버려서 그만두기도 어려웠다. 새로운 일 따위 시작하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무언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공부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새로움이 주는 충격은 아득하게 먼 과거에 경험해본 일인 것 같고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인 것 같기도 했다. 현재가 없었다.

책에서 이런 글귀를 보았다.

결국 놀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리의 즐거움을 맘껏 표현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장 좋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삶이 황폐해졌다면 놀이를 통해 활기를 되살릴 수 있다. ... 놀이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 인생에서 놀이가 차지할 자격이 있는 자리를 되찾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스튜어트 브라운 ·크리스토퍼 본,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 윤미나 옮김, 흐름, 2010, pp.302-303)

그래서 다음 날 출발하는 중국 텐진 행 선박의 티켓을 예매했다.

내일 여행을 가요, 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엄마는 갑자기 건강을 생각해서 운동을 하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꽤 오래 하셨고, 아빠는 이럴 땐 네가 참 싫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셨다. 저녁에 동생과 산책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생은 호언장담했다.

"(부모님은) 내가 쉴드 쳐줄게. 내가 집에 없는 동안에 누나가 쉴드 쳐줬잖아."

동생이 쉴드를 쳐준다니 이해받는다는 확신과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동생은 나를 나무라며 몇 마디를 더했다.

"근데 참 누나도 누나다. 어쩜 하루 전에 얘기를 하냐."

"하지만 오늘 티켓을 끊었는 걸."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아침 일찍 인천으로 출발했다. 아버지는 요즘 동인천에 있는 창호제작 회사로 출근을 하는데, 아버지 차를 얻어타고 나온 덕분에 전혀 서두르지 않아도 9시가 되기 전에 인천항 근처에 도착했다.

텐진으로 가는 배는 오후 1시에 떠나고 두 시간 전인 오전 11시까지 제2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면 된다고 한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관찰해본 결과로는 12시까지 도착해도 충분할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근처에 내려주고 회사로 가셨다. 나는 시간이 많이 남은 김에 좀 걸을 생각이었다. 길에는 사람이 없고 차들만 다녔다. 차도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덤프트럭이 주로 다닌다. 큰 차가 다니기 때문인지 주유소도 황량하게 넓었다. 지나가는 덤프트럭 허리의 연결 부위가 덜컥덜컥 출렁이는 소리가 들리면 괜히 무서웠다. 인도에는 사람이 거의 안 다니는 모양이었다. 포장된 보도블럭 사이로 풀이 자라나 수북하게 올라와 있었다.






걷기 시작한지 삼십분이 지난 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도를 대충 보고 서쪽으로 가면 항구가 나올 것 같아 아침해를 등지고 무작정 걸었으나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되돌아 다시 삼십분 쯤 걸어가다 보니 연안부두, 제1국제여객터미널,이란 도로표지판이 나왔다.

동인천에는 여객선이 출발하는 항구가 두 군데 있다. 텐진으로 가는 '천인호'는 제2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제1국제여객터미널은 동인천역을 기준으로 제2국제여객터미널에서 더 멀리 떨어진 해안에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제1국제여객터미널 앞에 와 있었다. 이 부두가 아닌데... 난 누구 여긴 어디...





스마트폰 지도앱을 다시 켜서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인천항제2국제여객터미널
인천제2국제여객터미널



검색결과가 이렇게 두 군데가 있다. 딱 한 글자 차이다. 그런데 인천제2국제여객터미널은 어째서인지 제1국제여객터미널과 같은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인천'항'제2국제여객터미널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길 잃은 길치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지도앱 제작사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다. 음모다!




걸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돌아왔다. 한 시간 정도 걷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시간 째 길을 잃고 헤매는 건 꽤나 지치는 일이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도 넓은 길에 큰 차만 가득했다. 투덜투덜 터벅터벅 걷는데 길가의 철망담에 붙어 핀 나팔꽃이 보였다. 뜬금없이 시 <담쟁이>가 떠올랐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하지만 난 혼자니까 담을 넘지는 말고 길을 따라 돌아가야지. 넝쿨넝쿨 가다 보면 도착하겠지.

한참 헤매던 와중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뭐해?"

"중국 가."

"오, 공항패션은?"

"공항으로 안 가. 배 타고 가."

"배 타고 갈 거면 남자 샤워실을 조심해."

"아무리 궁해도 남자 샤워실을 기웃거리진 않는다."

"영화에 보니까 중국 가는 배에서 장기밀매 조폭들이 어떤 여자를 납치해갖구 남자 샤워실에 끌고 가서 장기를 적출하더라."

"아우 야, 무섭잖아."

"그러니까 조심하라구."



중국은 사람 많고 땅 넓은 나라니까 인육을 먹거나 장기를 밀매하는 미친 놈도 많고 걔들이 도망칠 데도 많겠지. 그런 만큼 그런 악당과 내가 마주칠 가능성도 낮아진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인구대비 자살율은 우리나라가 세계 1등, 교통사고 사망율이나 강간율 같은 걸로도 꼬박꼬박 순위권 안에 드는 나라에서 잘도 살았는데 중국이라고 별 일 있겠나 싶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가 무사히 중국에 가는 배에 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풀이 수북한 인도에 누군가의 신발이 버려져 있었다. 낡은 작업화 한 켤레. 이 길을 신발 없이 걸은 사람은 누굴까?

헤매고 헤매다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버스 탈 걸 그랬지. 아침 산책을 거창하게 했구나. 하지만 살다 보면 돌아가는 길이 나을 수도 있다고, 아침 아홉시부터 두시간 넘게 터미널에서 멍때리고 있었다간 심심해서 죽었을 수도 있다고, 덕분에 나팔꽃도 보고 담쟁이와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도 해보지 않았느냐고, 정신승리를 위해 변명해본다.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버스정류장 바로 맞은편에는 이마트가 있었다. 여기 이마트는 당당하게 휴무일 없이 영업한다고 써붙여 두었으니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구입해도 좋겠지만 무엇이든 동네에서 미리 준비해 오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터미널 입구는 철로 공사 중으로 단선을 복선화하려는 모양이었다. 레일이 깔린 공사현장을 지나 대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오른쪽으로 입국장이 보이고 그 뒤로 출국장이 있었다. 출국장에는 위해, 청도, 천진 행 여객선 티켓 발권창구가 있었다. 출항하는 요일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창구는 모두 닫혀 있었으므로 헷갈릴 건 없고, 열려있는 창구에 가서 예매한 티켓을 받으면 된다. 이때 추가로 유류할증료 2만원과 출국세 4300원을 지불해야 한다. 선상비자를 신청해야 한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면 된다.


선상비자에 대해


이번에 배를 타고 출국하는 이유 중 하나는 비자, 중국 여행비자(L)를 사전에 받으려면 급행 1박2일, 보통 4박5일을 기다려야 한다.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이라 그 며칠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1박 2일을 배에서 보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시간이 단축되는 이점이 없을 수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출발 시점이 중요했기 때문에 선상비자를 택했다.

게다가 선상비자는 싸다. 요즘 중국비자 개별신청을 안받아줘서 여행사에 맡겨야 하는데 급행은 7만원 이상, 일반은 4만원 이상의 수수료를 달라고 하더라. 선상비자는 인민폐 170위안. 우리돈으로 3만원이 좀 넘는 정도다. 그리고 여행사에 여권을 맡기고 찾으러 가거나 등기로 주고받거나 하는 일도 꽤나 번거로운 과정인데, 선상비자는 배에 탑승한 뒤 신청하며 여권을 맡기고 도착하면 바로 받아갈 수 있으니 편리하다.

선상비자를 받으려면 유효기간이 6개월 이상 남은 여권과 수수료 인민폐 170위안, 여권사진을 한 장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야 하는데, 중국정부에서 탈북자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새터민의 주민번호가 아닌지 확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는 너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문제) 여튼 운전면허증은 취급 안 한다니 주민등록증 잊지 말고 챙기길.





발권수속을 하고 환전소에 들러봤다. 1위안에 190원 한다더라. 바로 어제 우리동네 국민은행에서 환전 수수료 우대 전혀 없이 181원에 바꿨는데. 정확한 통계를 내본 적은 없지만 환율은 공항이나 항구 같은 곳이 언제나 더 비싼 것 같다.

11시가 지나고 나서 출국장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줄줄이 줄을 서서 배를 타러 들어갔다. 배를 타는 사람들 중에는 여행자보다 소규모 무역상(aka 보따리장수, 따이공)이 더 많아 보였다. 커다란 가방과 상자를 여러 개 들고 가는 분들이 먼저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빈둥빈둥 기다리다 거의 마지막으로 출국수속을 받았다.





가방은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서 투시검사 당하고, 사람은 금속탐지기 지나서 삐 소리 나면 몸수색도 당하고 이러는 건 공항이랑 똑같다. 신발은 안 벗는다. 요새도 인천공항에서 신발 벗으라 그러나 모르겠다. 그거 쫌 기분 나쁘던데. 여튼 안으로 들어가면 면세점이 있다. 술이나 담배 같은 면세제품을 팔고 인삼 같은 특산품도 보이고 화장품도 있고 그런 걸 파는 상점이 양쪽으로 두 개.

어수선한 면세점 구역 지나서 문밖으로 나가면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항구는 넓으니까 배 있는 데까지 데려가주는 셔틀버스. 오 분 정도 타고 가니 배가 보였다. 천인호는 굉장히 큰 배, 전체 사진은 아이폰 렌즈로 담을 수가 없고 일부만 찰칵찰칵 찍었다.




가설계단을 올라가면 직원들이 선표를 확인하고 방을 알려준다. 선상비자 신청자는 로비에 가서 여권을 맡기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한다. 중국어로 써야 하는데 한국말을 하는 직원들이 대신 써준다.


"출생지 어디?"

"응"

"사진 있어?"

"응"



중국인 승무원 언니가 상냥한 표정으로 반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가 어설프게 중국말 하는 것도 귀엽게 들리면 좋겠다.




내가 끊은 선실은 이코노미 클래스. 복도식으로 2층 침대가 있다. 베개와 매트리스 시트와 얇은 이불 세팅되어 있고 들어가서 커튼 치면 캡슐호텔 들어온 기분이다. 남녀 방을 나눠놓진 않았지만, 발권할 때 알아서 남자들은 저쪽 여자들은 이쪽 배치하는 모양이다. 내 주변에는 한국 화장품 쇼핑백을 주렁주렁 들고 온 중국 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좀 비싼 표는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는 방이고 방안에 샤워실과 화장실도 딸려 있다. 나는 공동화장실과 샤워실 이용, 처음엔 깔끔했는데 밤 되니까 지저분해지긴 하더라.






페리는 로비가 있는 곳이 6층이고 여기서부터 8층까지가 승객들이 이용하는 선실과 선내시설들이 있는 공간이다. (1층부터 5층까지는 컨테이너 박스가 들어 있겠지.) 배 안에는 식당과 술집과 가라오케와 면세점과 일반상점 등이 있다. 상점에선 술담배인삼 등등 기호품과 과자나 음료 같은 것들 팔고 여행용품점도 있었다. 상점은 늘 열려있는 건 아니고 시간을 정해서 운영한다.

배에 타니 12시가 지나 있었다. 짐을 풀어놓고 식당으로 갔다. 식비는 그리 비싸지 않았고 가성비 괜찮았다. 두 가지 메뉴 중에서 고를 수 있는데 내가 먹은 음식은 점심 물만두 4,500원, 저녁 회덮밥 6,500원. 중국에서 만두 먹고 후회해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물만두는 꽤나 맛있어서 기뻤다. 한동안 회 못 먹을테니까 저녁으로 회덮밥을 골랐는데 평범했다.

배가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은 오후 1시 30분 경, 이 커다란 배가 윙윙 떨면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니 징그러웠다. 아빠랑 통화하고 엄마한테 문자 하나 넣고 휴게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멍때리다 내 자리로 돌아와서 낮잠을 잤다.

K선생님이 등장하는 꿈을 꿨다. 고궁 같은 곳을 한참 헤매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 피곤해진 채로 침대에 벌렁 누웠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등장했고 어디선가 라크리모사의 노래가 들렸다. 웅장한 노래가 깔리고, 선생님은 나한테 접근하지 않은 채 염력 같은 걸 사용해서 내가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어머나 이 선생님이 나한테 왜 이러지. 아니, 이건 꿈이니까 내가 선생님한테 이러는 거구나.

꿈에서 깨자마자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꿈 얘기를 다 했으면 선생님이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냥 여행갔다옵니다, 하는 안부문자. ㅇㅇ, 이란 단순한 답을 받고 나서, 전화기를 켜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4시가 좀 넘었다. 아직도 통신연결 중, 배가 출발하지 않은 걸까?





선실 밖으로 나가보니 배는 여전히 느리게 웅웅대며 움직이고 있다. 갑판에서 수면 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이 보였다. 지도앱으로 위치를 확인해보니 아직 서해안이다. 근해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는 배가 천천히 움직이는 모양이다.




아이폰 배터리가 달랑거려서 배에서 충전할 곳을 찾아다녔다. 콘센트는 복도 여기저기 많지만 콘센트 모양이 우리랑 달라서 제각각이다. 대부분 11모양이나 \ /모양이고 몇 개 있던 00모양 콘센트는 이미 누군가 충전 중. 잠시 11모양 변환 콘센트를 챙겨올 걸 후회했다. 그러나 배를 샅샅이 뒤지다가 빈 콘센트를 발견, 샤워실 앞에서 충전시켰다.





이번 여행에 가져온 디지털 기기는 작은 똑딱이 카메라와 아이폰 뿐이다. 아이폰으로는 간단한 문서 작성도 가능하고 (지금 이 이야기도 아이폰으로 쓴 초고를 조금 수정한 것) 사진촬영도 되고 업로드도 되니까. 한달동안 로밍을 하려니 너무 비싸서, 중국에 들어가면 옌통 3G USIM을 구입해 바꿔 끼울 계획이다.

배 여행은 심심하다. 가지고 온 책은 더 심심할 게 분명한 기차여행 때 아껴서 읽으려고 미뤄두었다. 오늘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요약하면, 중국에 가는 배를 탔다, 이게 전부인데, 구구절절 시시콜콜 썼다.

지루할 때 시간은 정말 느리게 지나간다. 재미있을 때는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말이다. 절대적인 시간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모르겠다. 지난달에 시간에 대한 꿈을 꾸었다.

왕이 즉위하면서 명령했다. "오늘 이 시간을 기념해서 모든 백성들은 시계를 멈추어라. 내가 즉위한 이후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 왕의 군대는 모든 시계를 파괴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시간을 모른 채 살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자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게 되어 제각기 말이 달랐다. 왕의 즉위로부터 평생 시간을 세 온 여자가 있었다. 그는 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처벌당할까 두려워 시계의 번호판을 지우고 시침과 분침을 빼고 초침만 사용했다. 누구도 그것이 시계인 줄 몰랐지만 그 여자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초침을 세었다. 팔천육백사만초가 지나고 여자가 죽었다. 이후로는 누구도 시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밤 11시가 되자 안내방송이 나왔다. 중국 시간으로 변경하라고 한 시간을 앞당기란다. 그래서 10시가 되었다.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배를 타는 여행의 즐거움은 역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잔잔하게 일렁대는 해수면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작은지 실감하게 된다.






간밤에는 파도가 좀 심하게 일어서 배멀미를 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나는 생리통이 느껴져서 진통제를 우걱우걱 먹고 잤다. 아홉시간 이상을 자고 났는데도 계속 잠이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침상에서 뭉그적거렸다.

열시에 선상비자 수속이 마무리 되었는지 확인하러 로비에 갔다. 선상비자 신청자는 텐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선해서 수속을 밟는다고 했다. 두시쯤 안내방송이 나왔다. 세시가 되면 천인호가 텐진항에 도착하고 세시반에 하선할 예정이라고 한다. 홈페이지에 공고되어 있던 도착시간인 오후 두시보다 늦어지는 이유는 파도가 심했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상비자 수속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출국장 건물에 들어서면 바로 선상비자 발급처가 있고, 창구 직원에게 천인호 승무원이 만들어준 서류를 내밀면 비자스티커를 붙여준다. 내 경우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여권에 붙어있는 사진은 스무살 때의 사진이라 지금과 많이 다르게 보인 것이다. 직원이 여권 사진과 이번 비자 발급 서류에 붙인 사진, 그리고 내 얼굴을 한참 비교해보더니 다음에는 여권을 바꿔오라고 충고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택시 기사들이 달려와 호객을 시작한다.

"너 어디로 가니?" "베이징 가니?" "텐진역 가니?"

여기저기서 막 달려들어 물어본다. 근데 나 어디로 가지? 내가 묻고 싶다.





이동현

(트위터 : @Leetre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