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6.월요일
김지룡
마흔이 되기 전까지 거울을 보다가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많았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에는 '신체적인 나'와 '정신적인 나'가 있는 것 같다. '정신적인 나'는 아직 스물다섯 정도인 것 같은데, '신체적인 나'는 사십을 바라보고 있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마흔이 넘은 이후로 거울을 보면서 놀라는 일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젊음을 잃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고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 사람은 늙어간다. 하지만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 가는 것이 아니라 쌓여 가는 것 같다. 앨범에 사진을 붙여 나가듯이 하루하루를 삶에 쌓아간다. 그 속에는 기특하고 듬직했던 열 살 때의 나도 있고, 세상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스무 살 때의 나도 있고, 철부지 같았던 서른 살의 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하루하루가 행복한 마흔 다섯 살의 나를 삶에 쌓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삶이 많이 쌓여있다는 것이다. 삶이 두터워진 만큼 현명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성숙함을 쌓아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드는 것이 서글프고 억울했던 것은 그만큼의 성숙함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은 나이는 들어가는데 그만큼 현명해지지도 성숙해지지도 않는 삶일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항상 "나는 왜 철이 들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10대나, 20대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재기발랄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왜 인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재미를 느끼며 살아도 허전했나보다.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한 것 같다. 하긴 아내가 아이를 낳은 가장 큰 이유는 '아이를 낳으면 내가 철이 들 것 같아서'라고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나이에 맞게 성숙해지는 것 같다. 내 스스로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한 뒤로, 거울 속의 나를 보면 놀라는 일이 사라졌다. 거울 속의 내게 묻는다.
"지난번보다 나이가 더 쌓였구나. 그만큼 더 성숙해졌니?"
하루하루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현재를 즐겨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 뒤부터였다. 십여 년 전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현재를 즐겨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너무 멋진 말이지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현재만을 즐기면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이를 낳고 아빠가 되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지면서 '현재를 즐겨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흥청망청 즐기라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한 순간밖에 살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날아갈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 즐거운 날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현재를 즐겨라'의 의미를 깨닫고 난 뒤로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졌다. 어렸을 때 내가 제일 싫어했던 일이 '글 쓰는 일'과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방송에 나가는 일이 직업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여전히 거북하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다. 누가 '일이 즐겁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말한다. 진심이다.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일을 모두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빠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하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것과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전혀 동떨어진 별개의 일이 아니다. 아빠라는 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아빠라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아빠라는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하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 글이 막혀서 오전 내내 두 줄밖에 쓰지 못해도, 강연장이 텅텅 비어 썰렁해도, 일 때문에 만난 인간에게 아무리 불쾌한 일을 당해도 모두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회사 일이 지긋지긋하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가족 때문에 참는다. 사는 것이 재미없다. 지루하고 따분하다. 10년 뒤를 생각하면 앞이 막막하다. 술자리 모임에 가면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남자 나이 40줄에 들어서면 모두 '투덜이'가 되는 것 같다. 제대로 아빠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빠라는 것을 즐기게 되면 투덜거릴 일이 없어진다. 회사 일도 그 어떤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미래도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즐겁게 하는 것은 잘하는 지름길이니까.
내 자신도 그랬지만 30대는 멀리 떠나가려는 청춘의 끝자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시기다. 20대처럼 친구를 만나 부어라 마셔라 놀고 싶고, 주말에는 활동적인 취미생활을 하고 싶고, 밤늦게까지 밤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시기다.
아빠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청춘이 아니라는 말이다. 떠나가는 청춘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추하다. 웃으면서 손수건을 흔들어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청춘과 아름답게 작별하고 아빠가 되는 것이 행복을 찾는 지름길인 것 같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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