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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화요일


내몸에흐를柳


 




장만옥. (張曼玉)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언제였는지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배우들보다 홍콩배우들의 이름을 더 또렷하게 기억하던 그 시절. 그때 그 홍콩배우들의 이름 가운데서도 유난히 촌스러워서 이름만은 절대 잊을 수 없었지만 단지 그런 이유 뿐, 장만옥이라는 배우가 출연했기 때문에 봤던 영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비단 장만옥 뿐이랴. 필자가 홍콩 영화를 광적으로 접했던 청소년기에는 주로 남자배우들 위주의 편협한 대여 기준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기에 여배우들은 그야말로 ‘아웃오브안중’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물론이고 모든 삶의 이치가 음양[陰陽]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보니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남자배우들의 영화를 보면 장만옥 뿐 아니라 역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배우들을 겉절이(?)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알게 된 여배우들. 임청하, 왕조현, 원영의, 유가령, 양채니, 그리고 장만옥...... 그 중 장만옥은 다른 여배우들과 일찌감치 외모부터 달랐다.


 


앞서 임청하를 비롯한 여배우들이 누구나 아름답다고 말할 이목구비로 전형적인 미녀포스를 풍겼다면, 장만옥은 뭐랄까.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미스 홍콩 2위에 빛나는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아름답다고 말할 외모는 아니었다. ‘남다른 미모’는 틀림없지만 보는 이에 따라 극과 극의 취향 차가 발생하는 외모라고 해야 할까. (신기한 것은, 그 취향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더라는 거다. 어렸을 땐 원영의가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었는데 나이든 지금은 장만옥의 얼굴이 더 좋다. 그것은 비단 내 취향이 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통통하기만 했던 얼굴에 감춰진 굴곡들이 드러나고 그 완만하지 못한 굴곡들이 표출해내는 그녀만의 이미지에 어느새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고전적인 외모에 쐐기를 박는 것은 그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발음하긴 어려웠지만 그다지 촌스럽다 여긴 적은 없었던 홍콩 배우들의 이름들이었건만, 장만옥, ‘만옥’이라니...... 중국은 모르겠으나 과거 우리나라에서 주로 남자이름에나 쓰일 법한 ‘만’자와 옛날 여자이름 끝에 ‘자’자와 더불어 촌스러움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옥’이 만나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미지를 연출하니 그 이름이 주는 느낌은 정말이지, 구슬 옥(玉)이 주는 순진한 식당 집 이모스러운 풋풋함에 (좋게 표현해 수줍고 청초한) 몸에 꽉 끼는 치파오를 입은 농염한 여인에게서나 풍기는 성숙미, 그리고 그 이면에 의외로 숨어있을 강인함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매우 복합적인 느낌이었다. (이는 과거, 이름에 가졌던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뭐 이제는 Maggie Cheung 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만.)




다작의 시기




1966년 홍콩에서 출생.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홍콩에 들른 그녀는 미스홍콩에 뽑히면서 순조롭게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었다. CF모델과 TV활동을 하다가 배우가 된 장만옥은 당시 대부분의 잘나가는 홍콩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장르 불문하고 쉼 없는 다작활동을 벌여왔다. 근래에 와서야 일 년에 한두 편 찍을까 말까지만 과거에는 한 해 최소 6~7편, 많게는 11편까지 찍을 정도로 리버럴한 작품 활동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당시 초기작들은 진지한 성찰이나 검토의 과정 없이 자신의 1차적인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소모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생기기 전이다보니 무수히 쏟아지는 작품들 가운데에는 운 좋게 작품성 있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녀 스스로도 창피해서 못 볼 만큼 형편없는 영화도 있었다 한다.(형편없다 함은 작품의 질, 본인의 연기 둘 다 아니겠나.)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미인대회 출신이라 부족한 연기력은 출중한 외모로 대략 커버가 되어 연기력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연기력이 좀 딸리는 부분은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였다는 얘기다. 당시엔 그 누구도 장만옥이라는 여배우에게서 걸쭉한 연기내공이 뿜어져 나오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음양의 조화로움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 묘하게 예쁜 여주인공쯤으로 인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폴리스 스토리(警察故事 Police Story, 1985)〉를 비롯한 대부분의 초기작에서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쁜 표정을 짓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100%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해도) 상황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주인공을 자신도 모르게 곤경에 빠트리는 다소 멍청하고 미련한 여주인공을 도맡았었다.


 


그렇다고 초기의 다작 활동이 그녀에게 무조건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녀를 흥행배우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도와준 면에서는 의미 있는 작품들이긴 하나 장만옥이 아닌 그 누구라도 할 수 있었던, 감정표현이 심하게 결여된 존재감 제로의 여주인공 역할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얘기다. 주로 남주인공이 필사적인 힘으로 2시간짜리 극을 이끄는 와중에 안구정화용 투입조가 되어 눈을 즐겁게 해주는 미녀 여주인공쯤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또다시 말하지만 그녀를 처음 본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 왕가위와의 만남




그러나 필자의 부실하고도 안습인 기억력을 조롱하듯 그녀는 점점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라도 다양한 작품들을 두루 거치다보면 언젠가는 배우로서의 그만의 존재이유를 체득할 날이 오겠지만, 장만옥 입장에서는 그 시기가 비교적 빨리 찾아왔다. 바로 왕가위와의 만남. 그녀 스스로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 ‘왕가위를 만난 이후로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고 말할 만큼, 그저 눈만 깜빡거리는 예쁜 인형에서 벗어나 작은 손놀림이나 뒷모습, 걸음걸이만으로도 내면이 표현되는 그런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다. 




순전히 유덕화가 나온다길래 빌린 〈열혈남아(旺角卞門 (몽콕하문) As Tears Go By, 1987)〉는 으레 별다를 것 없는 홍콩느와르려니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봤다가 한 며칠 헤어 나오지 못했던 영화다. 그간의 느와르에서도 흔히 볼 수 없었던 시각적 강렬함은 물론이고 비주류 인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수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폐병을 앓는 여주인공으로 (내 기억이 맞다면) 그리 많지 않은 대사 속에서도 기존의 무협물이나 오락물에서 보았던 찡찡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아닌 권태로움과 허무에 찌든, 그러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캐릭터로 분했다.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화면 속의 그녀를 제대로 바라본 것은.


 



 


열혈남아는 90년대 초반, 친절한 가이드북 없이 우리나라에 선보이게 된 왕가위의 첫 영화로 복수와 배신으로 점철된 홍콩 느와르 식 스토리 라인이었지만, 스텝 프린팅 기법이라든지 그간의 느와르나 무협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왕가위 특유의 조명기법이나 거친 감각이 그대로 드러난 문제적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왕가위로 인해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던 장만옥은 열혈남아 이후 관금붕의 <인재뉴약 (人在紐約 : Full Moon In New York, 1989)>에 억척스런 레즈비언 역으로 출연하면서 그해 대만 금마장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된다. 차츰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찾게 된 장만옥은 이후 〈아비정전 (阿飛正傳 : Days Of Being Wild, 1990)〉, 〈허안화의 객도추한 (客途秋恨 : Song of the Exile, 1990)〉 등을 통해 기존에 보여줬던 예쁜 여주인공의 이미지에서 탈피,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고집스럽게 오므린 입술, 각이 진 기묘한 얼굴선을 드러내며 얼굴선에 드리워진 음영만으로도 허무와 상실이 표현되는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게 된다.


                                                       



                                         


이어 초기 중국 무성영화의 헤로인이었으나 스물다섯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완령옥’으로 분한 장만옥은 다시 한 번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면서 홍콩 배우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물론 〈완령옥 (院玲玉 : Centre Stage, 1992)〉이후에도 ‘묻지 마 다작’의 시기는 계속 이어졌으나 다행히 1994년 이후부터는 자신의 이미지를 헛되게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한해에 두 편 이상의 작품을 찍지 않는 자기관리모드로 들어선다. 그러던 것이〈첨밀밀(甛蜜蜜 : Almost A Love Story, 1996)〉부터는 한해에 한편 이상의 작업을 하지 않고 작품선정에 있어 이전보다 좀 더 심사숙고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올리비에 아싸야스와의 만남




같은 해 〈이마베프 (Irma Vep, 1994)〉를 촬영하면서 시작된 감독 올리비에 아싸야스와의 교제는 이후 3년 6개월간의 결혼생활로 이어졌다. 재밌는 것은 이 영화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배우 장만옥’으로 출연했다는 점이다. 극 중 한물간 프랑스의 중견 감독 르네 비달 (쟝 피에르 레오드)은 신작으로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영화를 기획하던 중  <동방삼협>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장만옥(장만옥 분)을 캐스팅하기로 하는데, 영화는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좌초되어버리고 복잡한 성의식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장만옥은 다른 영화촬영을 위해 떠나버리게 된다.





 


올리비에 아싸야스와의 그리 길지 않는 결혼 생활, 이혼을 하고 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독특한 우정은 이후 그녀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 영화 〈클린 (Clean, 2004)〉으로 만개한다. 전 부인이기 이전에 배우로서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싸야스는 이 영화에서 장만옥에게 전형적인 중국 여인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두 나라를 넘나들며 남다른 성장과정을 거친 그녀에겐 한물간 록가수의 아내 에밀리 역은 실제의 장만옥 그녀와 꽤 맞닿은 부분이 있다. 그리하여, 뒤늦게 찾은 모성애와 갱생의 의지를 열연한 장만옥은 이 영화로 그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 번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인생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 때




이후〈화양연화 (花樣年華 : In the mood for love, 2000)〉로 다시 만나게 된 왕가위와 장만옥. 왕가위는 이 영화에서 장만옥에게 많은 대사를 할당하는 대신 그녀의 몸이 빚어내는 이야기에 더욱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장만옥 뿐 아니라 같이 출연한 양조위 역시 대사는 그리 많지 않은데, 영화전반에 흐르는 'Yumeji's Theme'는 같은 아파트, 변심한 배우자의 외도라는 같은 상처를 가진 그들의 마음과 모습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렇게 닮아있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가까워지지만, ‘이별연습’을 하고 결국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는 느린 호흡으로 따라간다.


 


‘인생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 때’를 의미하는 화양연화는, 그 한 때가 영원할 수 없기에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애틋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대적 배경과 인습이 누르는 개인의 욕망과 닿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비밀스런 사랑을 끝내 떠나보내고 마는 여인 수리첸으로 분했다. 치파오를 입은 고혹적인 자태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장만옥은 이후 금상장 여우주연상과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그야말로 인생의 화려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어쩌면 장만옥, 그녀를 처음 본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는 그저 단순히 예쁘기만 한 여주인공으로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게 된 것은 그녀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안타까운 사랑의 편린들 속에 지나간 내 사랑의 기억들이 함께 떠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열혈남아의 아화, 아비정전의 수리첸, 동사서독의 자애인, 차이니스 박스의 진, 화양연화의 수리첸 등, 대부분의 영화 속에서 그녀는 늘 엇갈리는 사랑의 지점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변심에 의한 배신이건, 갈등과 오해 속에 결국 진심이 왜곡되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건, 혹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버린 사내를 향한 안타까운 망부석이건, 그녀는 늘 미완의 상태로 홀로 남아 지나간 사랑에 생채기를 내며 처음의 그 설렘을 기억하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투명하여 아름답게 빛나고, 연마하면 광택이 나는 옥(玉). 그러고 보니 그녀의 눈빛은 짙은 푸른색의 비취옥 (翡翠玉)을 닮았다. 갈수록 쌀쌀해져가는 한겨울의 문턱에서 나는 오늘, 눈이 시리도록 푸른 자태의 그녀 모습을 다시 볼 작정이다.


 


'....그 엇갈리는 순간들이 나를 얼마나 많이 멈춰 세웠는지...당신은 알까? 


나는 늘 당신의 부풀린 머리와, 단정한 옆 모습과,


안타까운 뒷모습에 눈길을 주며 시간을 보냈소.


아픔도 늘 삭히기만 하는 나였지만


당신을 보고 돌아서는 순간만큼은


수천개의 작은 화살들이 나를 찌르는 듯 마음이 아파오곤 했소....'


 


- 화양연화 中에서 -


 


 


내몸에흐를柳(lefteye5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