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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믿지 않을 거다. 그러나 연재를 마무리하는 오늘만은 용기를 내야겠다. 나는, 정말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이다유아(あいだゆあ)의 비디오를 딱 한 번 봤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유아, 유아 하는 통에 ‘남국의 섬에서 붕가붕가...’ 하는 제목의 비디오 한편 구해다가 쓱쓱 넘기고 5분 만에 팽(烹)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당연히 혈액순환 보조제(전문 용어로 표현 하자면 딸감)로 활용했을 리 만무하다. 사실 이번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여러 사람 얼굴 가운데서 아이다유아를 찍어내라면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잘 몰랐다는 말이다.


 



뒷통수 맞은 얼굴을 하고 계실 독자 제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다 본인, 지금 고해소 앞에 무릎 꿇은 어린양의 목소리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출연자 같은 각오로, 허위 학력 기재를 사죄하는 연예인의 심정으로 고백한다. 나는 유아를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날 의심하지 않았고 나 역시 위기 때마다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몇 마디 갖다 붙이면 그럴 듯한 아는 척 매뉴얼이 됐던 것이다.


 





‘절륜의 허리를 가졌죠’



‘유아는 얼굴로 보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스타일로 보는 겁니다.’



‘사실 매너리즘에 가까울 지경이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잘 팔리는데’


 



그것은, 흡사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의 것과 같은 삶이었다. 맑스와 자본론에 대한 주석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맑스 이론가이로 알려졌지만, 정작 본인은 이면에서 전전긍긍했던 알튀세르의 삶. 그는 사실 자본론을 제대로 통독한 적조차 없었으며 이 같은 사실로 인하여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는다’ 같은 저서를 낼 때마다 문자 그대로 ‘무식이 탄로 날까 두려워’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독자와 평단은 꿈에도 몰랐을 일이다. 바로 유아와 나의 관계가 그러했다. 사람들이 망상적 특수 욕정 지명(妄想的特殊欲情本指名)이니, 하이퍼 기리기리 모자이크(ハイパ?ギリギリモザイク)같은 유아의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 때, 나는 남몰래 위축되어 화제를 돌려야 했다. 반대로 표정은 다소 딱딱하게 관리하면서 이렇게 말해온 거다, 그거 하도 질려서 이제는 감흥도 안 옵디다.


 



그래서 처음 원고 청탁을 받고 이 본좌 오딧세이를 구상하면서부터 나는 떨고 있었다. AV인물 열전을 시대 순으로 추리자면 아이다유아가 빠질 수 없는데, 나는 유아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본좌 오딧세이의 마지막 시간, ‘우리 시대의 본좌, 아이다유아’를 논할 때가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대체 내가 어떤 이유로 유아와 담을 쌓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변명처럼 말하자면 이 취향이라는 게 꼭 ‘역사 발전 5단계 설’ 마냥 선형적 순서를 밟고 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앉을 줄 알아야만 일어서는 게 아니고 선다고 걷는다는 보장도 없는 반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달리는 놈이 있을 수도 있는 법. 이렇듯 비선형적 파편들의 집합이 곧 취향이라. 그래서 우연찮게 내 취향과 거리가 먼 유아가 내겐 무인도처럼 남은 것 같다. 내 일부러 ‘남들 다 보는 국민AV를 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난 특별하니까!’ 하는 유치한 스노브 되기의 일환으로 유아를 멀리 한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건 마치 가요를 들으며 조용필을 몰랐다고 하는 말처럼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 아이다 유아에 대해서 말하기로, 말해야만 한다. 오랫동안 마음 한켠에 쌓아둔 부채와 죄의식을 이제는 청산하고 싶다. 물론 데뷔부터 은퇴까지 출시된 비디오 수십여 편을 한꺼번에 몰아 봤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단지 이제, 조금은 뭔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치열교정 전의 풋풋한(?)


아이다 유아(2005년 5월)


 



한마디로 그녀는 전범(典範)을 제시한 AV의 교과서였다. 교과서적이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쓰일 때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게 되지만 실은 그만한 칭찬이 없는 말이다. 모두가 인정하며 누구에게나 가르칠 만한 한 분야의 근간을 담은 게 교과서다. 교과서는 상투적 지루함의 상징이기 전에 물과 공기처럼 너무나 중요한, 그래서인지 되려 그 중요함을 사람들이 쉽게 잊곤 하는 기본의 상징이다. 교과서는 뼈다. 살이 붙고 내장을 지탱하는 뼈다. 교과서는 기본이다. 그리고 본좌는 기본에 충실할 뿐이다.


 





아, 마침내..그 흔한 후장 한번 내놓지 않고 AV에서 손을 씻다 (2007년)



 


소중한 기회였다. 결국 수많은 응용과 묘수도 기본과 정석에서 파생됨을 나는 아이다유아를 통해서 다시 확인했다. 축복받았다고 밖에 달리 설명이 어려운 천혜의 육체- 복근이 드러나는 체지방률과 저렇게 풍만한 젖가슴이 어떻게 공존 할 수 있는지, 잠시 보형물 삽입 가능성도 의심해 봤으나 저것이야 말로 조물주가 내린 축복이 아닐까 싶다 -와 담백하고 정석적인 명랑행위, 그것만 가지고 끌고 가는 아이다 유아의 120분. 이것은 잘 지은 햅쌀밥에 깔밋한 밑반찬만 가지고 차려낸 밥 한상에 비유 될 만하다. 담백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 안에 모든 것을 품고있다. 이것이 바로 기본을 중시하는 이유다.


 



훗날, 우리는 AV사를 돌아보며 아이다유아와 동시대에 호흡했음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에필로그


 


딴지 사상 초유의 일일 업데이트가 반년가까이 지속되면서, 누적된 피로와 격무에 짓눌려 신음하시는 부장님, 부장님 우리 부장님.


 



나는 너부리 편집장을 나홀로 부장님이라 부른다. 편집장님이라는 공식적인 호칭이 있지만 편집장님, 편집장님하고 꼬박 꼬박 챙겨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편집증 적이지 않나? 언어적 경제성을 놓고 봐도 받침이 세 개씩이나 들어가는 편집장님은 영 비즈니스 후렌들리 하지가 않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몰라도, 아무튼 그런 연유로 나는 깜냥 껏 ‘아 딴지일보도 명색은 신문이니 만큼 편집국, 기획부, 기술지원팀 같은 조직구성이 있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편집국장님]하고 부르자니 너무 재래언론의 냄새가 나고...’ 하여 고심 끝에 국장님 대신 선택한 호칭이 부장님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맘대로의 고심과 선택이지마는 아무튼 부장님, 부장님, 우리 너부리 부장님. 부장님이라는 호칭은 너부리 편집장을 부를 때 지구상에서 나 혼자 사용하는 일종의 단독 지정 콜 싸인 이자, 마감 맞춰 원고 상납하는 비상근 노예와 편집장 사이의 사무적 관계를 넘어선 친밀감의 표현인 것이다.


 



나는 왜 굳이 호칭까지 바꿔가며 너부리 편집장에게 어필하는가? 그가 그저 막연한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일종의 동지의식을 바탕에 둔 전관예우와 비슷한 감정 같다. 사실 너부리 편집장은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명랑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거물이다. 본격 성인용품 벤치마킹, 명랑완구 부르르 개발, 디즈니랜드 출연자 인터뷰 등 그가 남긴 굵직굵직한 족적과 남로당 사무총장이라는 경력은 숭앙하기만하다. 당시에 출사표는커녕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풀 버젼도 아닌 다이나믹스넷에서 긁어온 클립 나부랭이로 소일하던 나에게 너부리라는 이름은 그저 아득한 저 하늘의 별이었다.


 



그런 너부리 편집장과 면접을 빙자한 술자리로 첫 만남을 가졌던 날을 기억한다. 에로스 토토, 야문, 김C의 구속, Stoangel로부터 내려오는 한국 딸계의 족보 등을 안주삼아 한참 야부리를 푸는 나를, 부장님은 대략 이런 표정으로 바라 보셨지.


 




이 샛기 이것 좀 보소...


 



이윽고 내 눈앞의 거물은 담뱃불을 비벼끄며 한참을 웃다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런 골 때리는 시끼, 나도 왕년에 남로당에서 놀아봤지만 너 같은 놈은 또 처음이다’


 



서글픈 칭찬이다. 나와 별세계에 사는 줄로만 알았던 거물에게서 칭찬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이내 밀려드는 이 서글픔은 대체 뭘까. 한 때 남로당을 이끌던 카리스마적 존재에게서 ‘골 때리는 시끼’ 로 인정받을 만큼 내가 컸다는 말도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 평범한 보통사람을 두고 ‘골 때리는 시끼’라 부를 만큼 편집장의 일상도 유해졌다는 뜻이리라. 한 때 남로당을 이끌며 수많은 아수라를 이시섭혈(履尸涉血)해온 그도 이제 술자리에서 휴대폰을 들고 ‘어,, 아들, 그래 아빠 술 안 먹었어. 그래 금방 갈게, 아, 안먹었다니까.....엄마 좀 바꿔줘’ 라고 말하는 아버지 인 것이다. 그러니 이 서글픔은, 소년이 청년이 되고 청년이 총각이 되고, 총각이 아저씨가 되고, 아저씨가 할아버지가 되어야만 하는, 거스르지 못할 흐름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젊은 친구들 앞에서 혀를 차며 ‘나도 소시 적에 딸 좀 잡았지만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본다’ 고 말하게 되겠지.


 



하지만 이 흐름이란 무작정 슬프고 되돌리고 싶은 게 아니다. 묵묵히 흐르는 조류는 필연이며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그렇게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일단 나의 본좌 오딧세이는 여기서 마친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시대의 본좌 들도 시대와 불화하는 퇴물이 되거나 아예 역사의 장에서 기억조차 되지 않는 한미한 존재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것을 무작정 슬퍼하지 마시길. 그 날이 오면, 그 시대의 눈으로 그 시대의 언어로, 붓을 이어받아 그 시대의 본좌 들을 이야기할 사람 또한 있으리. 하루하루 내일의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 또한 충분히 아름답다. 다시 한 번,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충용무쌍(dbscnddy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