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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지난 2화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용암포 사건으로 이제 러시아와 일본이 붙는 일만 남았다. 참, 그 전에 진도부터 설명하자. 오늘까지 하면 이제 1905년까지 진도가 나간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약 60화에 이르러서야 목표인 서기 2000년에 다다르게 된다. 음... 필자가 미쳤었나 보다.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으나, 2000년까지 꼭 가도록 하겠다.

 




 

1. 러일전쟁과 한반도



용암포 사건으로 1903년 말엽에 이르면 러시아와 일본은 함대를 동원하여 한반도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각국도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운명의 1904년이 시작되었다.

 

1904년은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시작된다. 2화에서 말한 중립화 노력의 결과물로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 21일에 국외 엄정중립을 선언한다. 고종 황제는 이렇게 하면 러시아와 일본이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싸우지 않을 것이라 믿었었나 보다. 이 중립선언을 영국·프랑스·독일이 접수하게 된다. 고종 황제와 중립화를 추진했던 이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럼 뭐 하냐? 당사자인 일본과 러시아는 이 중립국 선언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당시 미국 공사 알렌은 아래와 같은 말은 한다.

 

"자위력이 없는 중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04년 2월, 일본 육군이 한반도로 상륙하기 시작하였고, 2월 9일에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 하루 전인 2월 8일 일본군이 여순 항을 기습하면서 러일전쟁을 시작되었다. 이후 러일전쟁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러일전쟁의 여러 전투에 대해서는 필자가 따로 얘기하지 않도록 하겠다. 밀리터리 전문가들이 더 잘 설명할 것이다. 필자는 당시 한반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본은 서울을 점령한 직후, 한일의정서를 고종 황제에게 내민다. 이것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의 첫걸음이 되는 중요한 내용이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을 옮겨 보겠다.

 

① 한일 양국이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믿고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②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할 것, ③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할 것, ④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이때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한 편의를 제공할 것, 또한 대일본제국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가능할 수 있도록 할 것, ⑤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 수 없다.

 

한일의정서에 기초하여 일본은 '대한제국과 황실의 보호를 위하여' 러일전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그리고 앞으로 추가적인 일본의 요구나 조약에도 응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도 이 의정서의 또 다른 의미이다.) 고종 황제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건설한 전기와 철도 등은 일본의 전쟁 편의를 위해서 사용되었고, 군대를 마음대로 주둔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종 토지를 빼앗을 수 있었고, 백성들과 군수물자를 빼앗다시피 징발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한일의정서에 근거한다는 구실로 이뤄졌다.

 

1904년 4월에는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한반도 주둔 일본군 사령부인 '주탑사령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에 남의 나라 군대사령부가 합법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이것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5월에는 대한제국과 러시아 간 맺은 '한러조약'을 폐기하여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였다. 7월에는 군사경찰제를 시행하여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와 대한제국 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권한을 명시적으로 빼앗기 시작한다. 이것의 시작이 바로 1차 한일협약이다.

 

1차 한일협약은 대한제국의 통신권과 항해권을 차지하고, 모든 부서에 강제로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이 1차 한일협약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하나하나 빼앗기게 되었다. 개항 이후 있었던 무수한 사건들로 인해서 대한제국과 조선의 국권이 침해되기는 했지만, 그 국권이 완전히 타국에게 이양되거나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1차 한일협약으로 이제 빼앗긴 국권은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것은 기존의 청일전쟁과는 완전히 양상이 다른 것이다. 이미 일본은 작심을 하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

 

일본이 이렇게 움직이자, 일본이 열심히 키워 놓은 친일파들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9월에는 진보회와 유신회라는 두 친일단체가 합쳐서 유명한 ‘일진회’를 설립하게 된다. 일진회는 일본과 손을 잡고 반일의병을 소탕하거나 정부 정책을 일본에 유리하도록 압박하고, 일본의 전쟁 지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오로지 일본 만을 위한' 매국 단체였다.

 

러일전쟁은 이후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1905년에 이르자 일본의 침략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1905년 1월에는 일본의 화폐인 제일은행권이 무제한으로 유통되도록 하였고, 1차 한일협약을 토대로 4월에는 통신권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5월에는 각 국의 공사관들이 철수하기 시작하여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불쌍한 고종 황제는 미국에게 끝까지 호소했으나, 미국은 외면했다.(2화에서도 설명했지만, 고종 황제는 답답하게도 미국이야 말로 공정하고 비제국주의적인 신사적인 나라로 끝까지 믿었다.) 오히려 미국은 1905년 7월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은 한반도, 미국은 필리핀을 먹는 데 서로 동의하고 협력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9월에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화 2단계를 시작했다. 바로 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마 1904년 1월에 살던 사람이 타임머신으로 1905년 11월의 모습을 본다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1년 10개월이라는 시간 사이에 한반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1904년 1월에는 그래도 외연적으로는 독립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대한제국이 1905년 11월에는 ‘식민지’라는 단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2. 일본·러시아·영국·미국



그러면 이 전쟁을 각 국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일단 전쟁의 승리자 일본은 총력을 다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일본이 국력이 러시아보다 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도 좋지 않았다. 일본의 전쟁 비용 19억엔 가운데 약 12억엔은 미국과 영국이 지원해 준 것이다. 그들의 지원을 받고, 한반도를 사실상 군사기지화 했음에도 늘 불안하였다. 유럽에 있는 러시아의 정예군이 투입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상황과는 달랐다. 러시아 측의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의 패배 요인은 2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먼저 러시아의 정예군들은 전쟁 마지막까지도 유럽에 투입되어 있었다. 물론 발틱함대가 전쟁 막바지에 지구의 2/3를 돌아서 대한해협까지 갔지만 기본적으로는 러시아의 중심과는 너무 먼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기에 총력을 벌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러시아 내부적인 상황이다. 러시아는 1905년 초에 일어나는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이 내부적으로 혁명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고, 전쟁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일본은 사활을 걸고 전쟁을 벌이는데, 러시아는 집중력이 사방으로 분산된 멍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한 것이다.

 

영국은 당시 전 지구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남진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일동맹과 일본 지원이 이뤄진 것이다. 영국 또한 일본을 내세운 대리전이었지만, 나름대로 매우 신경 쓴 전쟁이었다.

 

그리고 미국. 이미 영국과 맞먹는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 미국이 일본을 지원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질 않으실 것이다. 필자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미국은 동아시아로의 진출이 늦었다. 물론 1854년 일본을 개항하고, 1871년에 신미양요를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열강들에 비해서 진출이 늦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런 차에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집어 삼키면 정말 미국은 필리핀 외에는 송곳 하나 꽂을 곳도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진출에 묻어가면서 만주나 중국으로의 진출을 모색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러일전쟁은 아마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들의 이해가 걸린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4대 열강들과 불쌍한 피해자들인 대한제국과 청나라까지 합한다면 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된 나라는 6개국이 된다. 이 전쟁은 근현대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쟁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3. 당시 선조들의 인식



자, 그렇다면 이 러일전쟁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앞서 말한 내용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과연 당시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 담겨 있다.

 

먼저 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어떻게 이 전쟁을 보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대응했을까? 참으로 가관이다.

 

전쟁 분위기가 접어들자 고종 황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관파천처럼 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언제나 제일 믿고 있던, 미국에게 먼저 말을 건다. '저기, 미국 공사관으로 좀 가면 안 될까요?' 그러자 미국 공사 알렌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안타까운 짝사랑이여. 고종 황제는 미국이야 말로 중립적이고 비제국주의적인 열강이라는 개화파들의 얘기를 한 20년(1880년경) 전에 주워듣고는 그 이후부터 늘 미국에 먼저 기대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고종 황제를 골려 먹으면서 엄청난 이권을 얻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으로부터 팽을 당하게 된다. 왠지 21세기에도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이다.

 

고종 황제는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이 좌절되자, 러시아나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일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일본은 고종 황제가 지난 아관파천처럼 도망친다면 골치 아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황제폐하, 우리 일본은 결코 궁궐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고종 황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중립국 선언(1904년 1월 21일)이 이뤄졌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고종 황제와 당시 집권층은 매우 기뻐했다. 이제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일의정서(1904년 2월)가 체결되었다.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어 일본이 각종 요구를 해오자, 고종 황제와 집권층은 일본의 요구를 정말 순한 양처럼, 아니 양보다 더 심하게 잘 들어주었다.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기 전에도 고종 황제는 명령을 내려 ‘일본군의 편의를 봐줘라’고 하고, 이후 일본이 승리하자 고종 황제는 승리 축하금을 일본군에게 내리고, 일본군의 보급품을 수송하는 데 앞장섰다. 심지어 1904년 2월 15일 당시 외부(외무부) 대신 명의로 경기도 관찰사에게 내린 명령은 가히 엽기에 가깝다.

 

"일본 군대가 경내에 이르면, 영접과 편의시설 제공을 소홀히 하지 말며, 무릇 그들이 청구하는 것은 철저히 응해주도록 할 것이다. 이는 토비(활빈당과 항일의병)를 탄압하고 인민을 보호하는 뜻이다. 우민배가 의심을 품고 백성들을 선동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각별히 준비하여 소요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이 모든 것들이 한일의정서 체결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까 한일의정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아서 자발적으로 간과 쓸개를 내어 주는 꼴이다. 그리고 민중들의 저항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어서 이럴까?

 

당시 고종 황제와 내각의 머릿속에는 '이미 중립국 선언 했으니, 누가 이기던 우리랑은 무관해. 그러니까 쓸데없이 말썽 부리지 말고, 하자는 대로 조용조용 넘어가서 지들끼리 치고 박으면 알아서 승패가 결정 나면 지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비위 건드리지 않고 우리가 저들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지만 않으면 전쟁 끝나서도 중립국 선언을 했으니까 대한제국의 독립에는 영향이 없을 거야.' 뭐 이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의 인식을 딱 한 단어로 요약하면 '병신'이다.

 

자, 그렇다면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얘들도 나름대로 신기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개화파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윤치호이다. 윤치호의 말을 들어보자.



전쟁 직후 : 어느 쪽이 이기든 한국은 모든 당사국 중 가장 큰 피해국이 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한국이 그 정부의 무능 부패 압제를 통해 현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견제받지 않은 전제정치가 나라를 파멸시켰다. (고종 황제를 욕하고 있다.)

 

전쟁 중 : 한국을 일본에 의존시키기 위해 타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므로 그들의 충고도 한국의 복리가 아니라 일본인만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데 있다. 한국인이 저항할 경우 개처럼 차고 때리고 종종 죽여 버릴 것이며 심지어 한국인을 노예화하려는 자신들의 잘 알려진 의도와 정책을 숨기려 들지도 않는다.

 

을사늑약 당시: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나 2시쯤 조용히 사라졌다.

 

뭐, 이 정도면 상대적으로 양호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일전쟁이 제국주의 세력 간의 침략전쟁이라고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좀 신기한 인식이 있다. 살펴보도록 하자.

 

발틱 함대 격파 소식: 한국인으로서 나는 일본의 잇따른 승리에 대해 좋아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모든 승리는 한국독립의 관(무덤)에 못질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인종으로서 한국은 일본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본은 황인종의 명예를 옹호했다.

 

일본 승전 직후: 나는 일본이 러시아를 패배시킨 것이 기쁘다.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한국의 모든 것 독립마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거참.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까 한국인으로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게 생겼으니 슬프지만, 황인종으로서는 기쁘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 인식은 윤치호 말고도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이 참여한 신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의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1904년 3월 1일: 독립성 유지를 필수 전제로 한 내정개혁의 원칙을 확인하고 민중에 의한 변혁운동을 외국군대를 이용해 탄압하는데 완강히 반대한다.(뜬금없이 내정개혁은 뭐람?)

 

1904년 5월 3일: 일본의 승패가 동양 전체의 존망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1904년 5월 6일: 황인종의 나라인 동양3국이 단결해야 하며 한 나라만 생각하게 되면 동양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1904년 8월 초: 러시아가 승리하면 2천만 한국인민이 모두 죽게 될 것이고, 일본이 승리하면 이권을 모두 주어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일본군의 여순 함락 직후: 국가의 행복이요, 동양의 보호이다.

 

1904년 1월 초: 한일의정서의 한국영토와 독립보존 항목을 앞세워 일본의 보호운운은 속국화 정책이며 일본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이익을 잃는다면 전국이 무너진다.

 

대한매일신보도 다를 바 없다.



1904년 9월 4일: 설혹 일본에서 승첩하더라도 한국을 일본에게 허여할(넘길) 리 없고 또 아국(러시아)에서 승첩을 하는 경우라도 만주를 아라사(러시아)에게 양도할 리 없는 것이... (누가 이겨도 한반도가 누구에게 점령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인식이다.)

 

1904년 9월 14일: 일본이 자국의 이익만 챙기지 않는다면 그들의 내정개혁 추진으로 한국이 개명하고 진보하게 되어 한국에 막대한 이익을 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역시 뜬금없이 내정개혁을 들먹이고 있다.)

 

을사늑약 당시: 보호국이라는 것이 잘되면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피차 균리(균등한 이익)을 나눌 때가 있다.

 



 

개화파들의 인식을 살펴보면, 이들은 상당히 이중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침략에는 탄식하면서도 일본의 승리에는 동양인으로서 반기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사실상 먹었으니 개화파들이 그토록 원하던 근대적 내정개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보이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이중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대부분 일본을 통하거나 일본에 유학을 하면서 개화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들에게 일본은 개화 문물을 가르쳐 준 나라이다. 그러니 일본의 침략 의도가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었나 보다. 이후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자, '일본의 침략'에 대한 인식은 '체념'으로 사그라 들었고, '우리도 힘을 길러 일본처럼 되자'는 것으로 바뀌어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자, '그래도 일본이 있으니 우리가 그나마 근대적 문물을 접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인식패턴이 왜곡되기에 이른다. 이후 이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로 나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당시 민중들의 인식을 살펴보자. 필자의 생각으로 그나마 가장 현명했던 이들이 당대의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일본군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들의 자료를 살펴보자.

 

1904년 6월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이 요구하자 일군의 의병집단들은 13도 방방곡곡에 격렬한 반일통문이 보내며, 한일의정서를 조목조목 따졌다.



시정개선에 관해 일본의 충고를 수용한다는 조항은 얼핏 보아 좋아 보이나, 실은 그야말로 내정에 간섭하려는 것이고, 대한제국 황실 및 영토가 위험에 처할 경우 일본정부가 속히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조항은 겉으로는 우리를 위하는 듯 하나, 실은 우리의 국권을 박탈하려는 것이며, 군사상 필요한 지역을 수시로 수용한다는 조항은 우리나라를 병탄하려 하려는 뜻이 분명하다. 이 조약은 만국공법을 위반한 것이다. 또한 일본이 어업과 철로를 이미 장악하는 등 전국의 이익을 빼앗고도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는 것은 일국의 강토를 삼키려는 것이므로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 일제히 총궐기 하자.

 

1904년 9월 강원도 춘천에서는 의병장 명의로 통문을 돌려 일본의 역부 모집과 황무지개척권을 규탄하며, '강약의 형세가 다르면 압제하기만을 일삼으며, 이욕을 알아서 남의 재물 빼앗기를 일삼으니, 지금 그 형세가 다 죽고야 말게 되었다. 더구나 요즘은 일본이 우리나라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의 의식을 침탈하니 혹 도리를 아는 자 있더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05년 9월 제천지역 의병군의 중군장을 맡고 있는 원용팔은 아래와 같은 통문을 붙인다.



일본이 말로는 고문이라는 명색을 가지고 있지만, 나라의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니 소위 10부 대신이라는 자는 벌써 일본정부로 화해버려서 칼자루를 남에게 맡겨서 나를 죽이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삼림천택을 첨거하는 일이나 호구를 등록하고 군대를 개혁하는 일 같은 것을 제 마음대로 하고, 일찍이 우리를 나라로 보는 일이 없으니 아아 사람으로서야 이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간악한 백성들을 깊이 맺고 악한 무리들을 널리 벌여놓으니, 소위 일진회라는 것이 어떤 난적의 무리인지, 만일 저들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이 하고서야 말 것이다. 또 고문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지방관의 직책을 빼앗고 8도에 가득 차게 그 무리들의 앞잡이들을 배치하여 온 나라 안을 그물질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올가미를 씌운다.

 

훗날 원용팔은 일본군과 일진회의 공격으로 체포당한다.

 

또한 당시 평양 주민들은 일본의 침탈을 참지 못하여 언론에 아래와 같은 투서를 한다.



일본관리가 우리나라 관헌을 대할 때는 아주 간교하게 농락하는 수단을 썼다. 처음에는 감언이설을 늘어놓다가 나중에는 위협과 협박으로 우리 고혈을 빨고 생명을 해쳤다. 그들의 천백가지 간악한 흉계를 일일이 지적하기 어렵지만 평양에서 저지른 일 10가지(상업 요충지 및 정거장 부근 부지 점거, 각종 물품 강제수용, 민가 무단 철거, 교량부지 수용, 공유지 강점, 민가 강탈, 석재 약취, 민유지 및 황실 목축장 점거) 그들이 시정개선의 충고라는 명분으로 우리정치에 간섭하여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일본의 행태를 보면서 민중들이 느낀 인식은 이 전쟁의 본질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민중들은 개화파와 같이 이중적인 사고로 합리화 하거나, 체념하기 보다는 강렬한 의지로 의병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들은 직접 일본군과 살을 맞닿고 있으며, 직접 그들의 양식과 물자들이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일본군의 보급품을 강제로 나르고,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화파들이 느끼는 ‘피상적 인식’과 민중들이 느끼는 ‘실질적 인식’과의 차이였다. 언제 어디서나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이 피상적인 글쟁이에 그칠 경우 지식인들은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는 것이다. 개화파들이 끝끝내 민중과 결합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런 인식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4. 예고



아직까지 필자가 러일전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다음 주에 남은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다. 다음 주에는 고종 황제의 몰락과 그리고 각 국에서 러일전쟁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의병전쟁의 시작도 함께 다뤄볼 예정이다. 또한 당시 세계적 흐름도 살짝 살펴보도록 하겠다. 긴 글 읽느라 고생 많았슴돠. 졸라.



임종금(lim149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