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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 추천0 비추천0




욕망에 대한 통제양식들

2006 7. 10 (월)
욕망-미시정치연구소

 


 


"감정과 욕망은 검은 말과 하얀 말과 같아서 이성이라는 마부가 이끄는 마차에 매인 말들일세, 욕망이야 말로 이성의 노예상태에 있을 때 안전이 보장되는 걸세"


-플라톤 <파이드로스>



푸코가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근대사회의 통제양식에 대해서 말했던 것과 같이, ‘감시와 포획’이라는 욕망의 통제양식은 우리의 일상의 삶에 정착되고 있다.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시감옥(판옵티콘) 설계도



욕망의 통제양식은 기존의 권위주의 질서와는 달리, 자율성을 보장하지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세련된 통제양식은 사이버공간을 기반으로 한 가상적인 영역에서도 작동하며, 오프라인에서도 작동한다. 가상 판옵티콘을 통해 강화된 통제양식은 여러 가지 추적 장치가 달린 유도미사일과도 같다. 가상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통제양식은 욕망의 코드에 대하여 끊임없이 추적하며, 탐색한다. 그리고 이 검색엔진을 통해서 통제양식의 전략을 끊임없이 수정해 낸다.


예를 들어 ‘일진회’와 같은 고등학생들이 비밀스런 행동들이 사이버공간에 코드화되면, 통제양식은 그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일진회에 대한 감시를 계속할 것인지, 지금 처벌을 할 것인지 결정한다.


다성적인 욕망이 어디로 뛰쳐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통제양식의 정보기술은 더욱 촉각을 곤두세운다. 오늘날의 욕망은 네트워크화되어 있으며, 네트워크 자체가 욕망의 발현양태이기 때문에 정보기술을 이용한 통제의 기법은 더 용이하다.


네트워크 속에서 욕망은 가상의 포획장치에 자신의 코드의 추적 장치를 설치해 주는 것과 같지만, 이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네트워크화 자체가 욕망이 무리 짓는 방식이기 때문이며, 코드화를 통한 결집을 거부하는 것은 욕망의 다양한 경로를 스스로 막아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생성되며, 유통되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무리 짓기를 멈추지 않는다.


가상공간의 통제양식에 의해서 이 사회의 모든 곳은 공장일 수도, 감옥일 수도, 정신병원일 수도 있다. 욕망은 탈주할 외부의 공간을 찾을 수 없다. 욕망은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스며들어 그 성격을 끊임없이 바꾸어내는 바이러스와 같다. 모든 곳이 작업장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욕망은, 모든 곳을 욕망의 공장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기존의 좌파는 공장을 넘어선, 사회와의 연대를 사고했다. 그것은 공장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연대의 망을 사회적인 구성체 내에서 만들어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공장이 되어버린 지금, 욕망의 공장은 모든 사회의 삶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새로운 원료로서 작동하고 있다. 이 원료로서의 욕망이 공장을 가동시킨다는 지점은 오히려 기존의 사회적 질서들을 뒤바꿀 역전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통제양식은 욕망을 통제하고 원료로만 사용하지만, 욕망의 공장이 전면화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권위주의적인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욕망이 공장을 운영하고, 스스로의 새로운 활력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이게 되는 것에 대한 제어장치라는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적 장치가 되고 있다. 좌파들은 이 신경증적 오이디푸스의 주역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들이 바라는 노동자가 자율성을 갖는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문스러워 할 것이다.


욕망의 공장이 된다는 것은? 자본가가 된다는 것인가? 노동자가 된다는 것인가? 경쟁이라는 욕망을 작동시키는 것인가? 그들에게 공장이란 사회의 외부에서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거나, 혹은 평의회나 소비에트에 의해서, 혹은 당이라는 공장외부의 구성물에 의해서 재-통제를 받아야만 할 것으로 사고되어 왔다. 그러한 좌파의 통제양식들의 구조물은 사회적 전위가 공장을 통제하고 계획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며, 혹은 전위 스스로가 생산을 계획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적 욕망의 통제양식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욕망은 생산을 계획하면서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을 멈추고 욕망의 공장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 때문이다.


욕망은 계획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의 문제다. 즉, 계획에도 없는 새로운 욕망이 끊임없이 생성되지 않는 평의회나 그 소비에트는 욕망의 공장이 아니라, 욕망의 통제양식임을 반증한다. 문제는 욕망의 창의적인 생성의 문제로 집약된다. 이러한 생산에서의 욕망의 특징들이 자주관리의 문제로 한정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비에트나 평의회나 꼬뮌의 모델은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양식,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국가사회주의의 계획과 토론, 학습의 모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모델이 되었다.


문제는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욕망으로 하여금 공장의 원료로서만이 아닌 공장의 주체로서 운영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에게 공장의 차원은 단순한 통제의 문제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가식적인 당 관료들이 말하는 혁신이라는 공허하고 활력 없는 단어들처럼 욕망에 기반 하지 않은 공장모델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의 방식의 일종에 불과하다.


현대자본주의는 욕망의 반란을 겪으며, 생산에 노동자의 창의적인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들을 개발하여 왔다. 그것은 욕망을 생산의 원료이자 동력으로 삼겠다는 자신의 전략 변경이며, 끊임없이 생성되는 욕망에 대하여 권위주의적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과 통제를 거쳐 생산의 동력의 일종으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현대 자본주의가 동시에 욕망에 공장을 내맡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이 욕망의 코드와 생성되는 질서, 그 수준들과 기호들에 대한 탐색과 포획 그리고 통제의 양식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욕망이 하려는 것 그대로 내맡겨 두지만은 않고, 철저히 원료로서 이용하겠다는 이러한 새로운 전략들은 어찌 보면 욕망에 조응하는 것 같지만, 욕망의 세련된 통제양식의 일종임을 감출 수 없다.



욕망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욕망의 공장이 된 사회에서 새로운 욕망을 생산하게끔 하는 것이 새로운 자유의 목표가 되고 있다. 여러 가지 통제양식들 중에서도 가장 욕망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양식이 바로 화폐를 매개로 한 통제이다. 희생과 내핍의 영구적인 상태는 욕망의 시간을 회수함으로서 쉽게 통제를 획득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욕망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근본적인 설정을 생각해 본다면, 임시방편으로 취하는 단기간적인 처방에 불과하다. 사회에서 화폐를 회수하거나 통제하여 욕망도 통제하려 한다면, 그 사회는 불임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활력도 사실 욕망으로부터 생성된다. 그러나 욕망의 공장에서 화폐를 회수하면, 욕망이 생산하기를 멈추고, 사회는 급속히 마비된다.


화폐를 통한 욕망에 대한 통제방식은 가장 손쉬우면서도 가장 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 방식이다. 통제에 의해서 자율성이 억압받은 욕망이라 할지라도 그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그 성격과 내용을 변경하게 된다. 과소소비의 반란, 탈 생산, 노동거부, 자연으로의 복귀, 공동체를 통한 새로운 욕망의 생산 등 욕망은 성격을 변모시키며, 통제의 양식에 대한 대응을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제까지 국가이성주의를 비롯한 모든 욕망에 대한 통제양식은 패배하여 왔고 패배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현재의 욕망으로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욕망에 대하여 일정한 자율을 주지 못한다면, 새로운 욕망을 생성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욕망에 대하여 일정하게 통제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욕망이 기존의 통제양식을 늘 초과하는 상태가 오늘날의 욕망의 통제양식의 현주소다. 그러므로 욕망의 공장이 작동하는 한 통제양식은 개혁주의를 작동시킬 수밖에 없으며 끊임없이 혁신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욕망-미시정치연구소
신승철(autonomis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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