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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수기] 사랑의 매는 있다!

2006. 7.6 (목)
딴지 문화생활부




최근 한 초등교사의 체벌장면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파문이 일었다.


부끄러운 교육실태의 한 단면이 우연히, 그것도 일개 학부모에 의해서 만천하에 고발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이 되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아무튼, 소시적 학교 다닐 때 허구한 날 체벌을 일상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기성세대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한탄과 함께 씁쓸한 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두드려 맞았으면 맞았지 카메라로 체벌장면을 찍을 생각 따위는 꿈에도 못 꾸었다.     


오늘은, 핸드폰이 없어 찍을 수 없었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체벌과 관련한 삽화 하나를 꺼집어낼까 한다.


지금 이야기는 17년 전 중학교 시절 이야기다.


* * * * *


윤리선생이 군대를 가버리는 바람에 새로 부임하게 된 선생은 대학을 갓 졸업한 초짜 선생이었다.


그러나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우리들에게 대학을 갓 졸업했다거나 윤리선생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했던 건 ‘여선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남학교에서 여선생이 부임한 사건은, 그것도 하나같이 무명의 희극인들 같은 인상을 한 선생들 속에서 청초한 미모를 지녔던 여선생이 부임한 사건은, 바로 전날 수사반장에서 보았던 끔찍했던 살인 사건보다 더 치명적으로 우리들의 영혼에 시비를 건 사건이었다.


그리고 윤리과목시간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그 여선생의 관심을 끌 수 있는가를 다투는 각축장의 시간이 되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예.
사랑의 매로 때려 주이소. 사랑의 매로 말입니더!"   
 


"샘요, 우얄라꼬 오늘은 스타킹 안 신었어예?"


같은 사춘기라도 정신적으로 좀 덜 성숙한 쪽은 뜬금없는 반항끼로 관심을 끌려고 했던 반면 그래도 좀 더 능글맞은 쪽은 이런 식으로 젊은 여선생을 가지고 놀았다.


선생을 ‘가지고 놀았다’는 표현이 열댓살 먹은 소년에게는 과하다는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우리는 그 젊은 여선생을 만만하게 보았다.


그 여선생은 피바다, 시체, 파란해골 13호, 게슈타포, 죽음의 다섯 손가락 같은 납량 특집적인 별명을 가진 남선생들 사이에서 제대로 기를 못 폈던 치기와 이성에 대한 억눌린 호기심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였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그 여선생을 얕잡아 보는 정도가 심해졌다는 데 있다.


어떤 날은 그 여선생이 앉아있기로 된 의자에 껌을 붙여놔서 산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치마를 진창으로 만들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윤리시간 바로 직전 쉬는 시간에 칠판을 건강다이제스트 사진으로 도배하는 만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선생의 치마 속을 염탐해 보겠노라며 총동원되던 각종 거울이 우리반 학생 수에 거의 육박해 가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샘요, 저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 주이소."


우리반 급우 중 하나가 다짜고짜 그 여선생을 앞에 두고 사랑고백을 한 것이다. 그 때 그 여선생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이 사건 이후 연애에 대한 추상적인 동경이 아니라 구체적인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열리자 여기에 고무된 몇몇이 더가열찬 사랑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거울로 치마 속 염탐하기 따위의 치기어린 행동이 아니라 이제는 당당히 사랑 고백을 한 편지를 교탁에 놓기, 칠판에 결혼해서 애 다섯만 놓자라는 진지한 청혼까지 우리는 담대해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 익명으로 된 편지와 구혼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지 그 여선생은 어느 날 윤리 시간 내내 수업은 하지 않고 칠판에 나랑 한빠구리하면 스타킹 하나 사주지 따위의 낙서를 한 놈들을 적발하기 위해 단체벌을 주는 걸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웠다.


책상 위에 올라가 책 물고 두 손 들기. 우리는 벌을 받는다기 보다 여선생과 전면적인 정신적 교감을 즐기고 있었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선생이 화를 내며 목청을 돋을 때마다 우리는 키득거리기만을 할 뿐, 그 누구도 자신이 낙서를 했다고 나서지를 않았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그 여선생이 다음으로 한 행동은, 옆 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라면 대가리’로부터의 도움 요청이었다. (라면대가리는 군대를 늦게 갔다온 관계로 아직까지 군바리의 풍모가 짙게 풍겨나오는, 물상(지금의 물리)을 가르치는 총각선생이었다)


도움 요청의 내용은 물론 대신 이 놈들을 대신 손봐달라는 것이었다.


라면대가리는 물상시간이 돌아오자 수업은 제껴두고 우리들을 바로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함께 체육복을 갈아입고 우리는 운동장에 집합했다.


아아, 그 이후 우리는 7,8년 후 우리가 군대에서나 겪을 다채로운 기합과 구타를 모두 경험해야 했다.


라면대가리는 우리에게 뒤로 쥐침, 앞으로 쥐침, 원산폭격을 기본 베이스로 한 도미노, 한강철교, 김밥말이, 불도저까지 곁들인 초호화판 기합 종합선물 세트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선사했다. 기합을 주는 와중에 라면대가리는 연신 "군인정신이 어쩌고 저쩌고"하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우리의 예리한 통찰력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기합의 강도가 셀수록,


구타가 가열찰수록,


라면대가리의 윤리선생에 대한 사랑도 깊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랑을 조금이라도 증명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로 이 기합시간을 활용한다는 것을....


그때 본 기자는 절실히 깨달았다.


매를 맞는 넘은, 사랑의 매와 아닌 매를 너무나도 쉽게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찌됐든 그때 라면대가리의 기합은 사랑의 매였다. 그것 하나만큼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우리가 아니었을 뿐.


* * * * *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창회에 모이면 친구들은 그 여선생과 라면대가리의 후일담이 어찌되었는지 다들 궁금해 서로 묻곤 하지만, 그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선생이 사귀었다는 소문은 간간히 들렸지만, (라면대가리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다가 차였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미확인) 결혼에 골인을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어느 햇볕 좋은 날, 라면대가리를 슈퍼마켓 라면 코너같은 데서 우연히 만난다면, 본 기자는 꼭 한 번 묻고 싶다.


당신의 사랑의 매가 남긴 것은 무엇이었냐고.

당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 딴지 문화생활부
  (sultan@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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