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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원 추천0 비추천0






박하사탕을 먹어봤더니

2000.1.4.화요일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오늘은 좀 개인적인 얘기로 시작하겠다.


본 기자가 <박하사탕>이라는 영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재작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였다. 당시 프레스 센터로 사용되고 있었던 부산호텔에는 아침마다 빵하구 마실꺼리를 꽁짜로 나눠주던 게스트 휴게실이라는게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청렴결백 초 저예산 영화 언론을 지향하던 본 기자에게 이는 거의 구원이나 다름 없었다.


어허, 꽁짜 아침이 어디냐. 그것도 재수 좋은 날에는 유명한 외국 영화감독 옆에서 먹을 수 있구 말이다. 내친 김에 점심까지도 때워보자는 생각으로 우유 세번이나 달라구 한 건 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때 그 포스터

어쨌든, 이 게스트 휴게실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하나가득 박하사탕이 들어차있는 녹색 리본을 두른 유리병 사진하나 떨렁 박혀 있었던 <박하사탕>의 포스터였다. 휴게실 곳곳에 비치돼 있던 진짜 박하사탕들(물론 이것도 꽁짜다)과 이 포스터의 이미지는, 꽁짜라면 게다가 꽁짜 먹을꺼라면 사족을 못쓰는 본 기자의 뇌리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쌔리박아 놓았다.


"먹을껄로 영화를 홍보하다니 거 참 참신하구 좋다. 어헝헝.."하며 주머니에 사탕 미어터지게 쑤셔넣다 지쳐 제정신으로 돌아온 본 기자의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비로소 떠오르게 되었다.


"어, 이창동 감독이 이런 박하사탕스러운 깨끔하고 투명한 연애 영화를 만들 사람이 아닌데, 웬일이냐. <초록 물고기>가 공중파 방송에서 <초록 불고기>라는 코믹 제목으로 재해석 된,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아예 음식 씨리즈로 전향해버리기로 작정했나, 아님 작품의 수준과 명성에 비해 그 흥행이 그닥 시원찮았던 거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들어 아예 장사가 되는 영화를 찍기로 작정한건가.."


본 기자,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작년. 포스터나 음식이 아닌 영화로 그때 그 <박하사탕>을 다시 만났다. 일년의 세월 동안 그때 그 이쁜 포스터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얍실하게 포장된 포스터를 가지고 관객을 끌겠다는 꼼수를 지양, 영화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달하겠다는 정공법에 우선 박수 (기왕에 좀 더 멋졌으면 좋았을테지만..)



뻘겋게 충혈된 퀭한 눈빛, 싸구려 양복에 바지 밖으로 비어져 나온 와이셔츠, 당장이라도 구정물이 흐를 것 같은 거뭇거뭇한 얼굴의 중년 남자, 기차 선로가 지나가는 강변에서 삼겹살에 지루박 파티를 벌이고 있는 아자씨 아줌마들 사이로 허위적 허위적 낑궈든다. 마이크를 잡은 그 남자, 피를 토하듯 침을 젤젤 흘리며 <나 어떡해>를 절규해 제낀다.



다큐멘터리 - 실업 노숙자의 1년의 한 장면으로도 별로 손색이 없는 이 오프닝으로, <박하사탕>은 깨끔하고 투명 쌉싸름한 연애영화를 기대하며 땀나도록 손 꼭잡은 연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설경구의 광기어린 연기와 이를 묵묵히 잡아내는 롱 테이크long take로 표현되는 주인공 김영호의 절망은, 도대체 앞뒤 영문 모르는 관객들의 마음마저도 후벼 파고들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한 술 더 떠, 주인공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으로까지 관객을 몰아붙인다. 영화가 시작된지 겨우 10여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코 앞으로 닥쳐오는 기차를 향해 붉은 눈물을 흘리며 "나 이제 돌아갈래!"를 울부짖는 김영호의 얼굴이 스크린을 하나가득 메우는 너무 이른 클라이맥스는, 애초의 박하사탕같은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아예 잊어버리게 만든다. 차 유리에 일그러져, 마지막 숨을 뿜으며 죽어가던 한석규의 얼굴이 사나이들의 뜨거운 의리가 있는 화끈한 깡패 액션 영화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잊어버리게 했듯이.



초장부터 보통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나 쓰일만한 강펀치를 맞은 관객은, 그 감정을 수습하기도 전에 곧장 애수어린 보사노바를 연주하는 바이올린 멜로디에 실려 기차를 타게 된다. <초록 물고기>의 첫 장면, 막둥(한석규 분)이 열차 출구에 매달리던 그 장면의 바로 그 기차다.


그러나 <박하사탕>의 기차는 <초록 물고기>의 기차와는 달리 주인공을 그의 앞에 놓여있는 미래속으로 데려다놓지 않는다. 그 기차는 우리를 주인공의 과거로 데리고 들어간다.


즉, 이 영화는 7개의 에피소드들을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로 배치한다. 그리고 주인공 김영호가 죽어가는 옛 사랑에게 받은 카메라, 때때로 시도때도 없이 다리에 통증을 느끼게 된 사연,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사람에게 던지는 "인생은 아름답죠? 그렇죠?"라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얽힌 사연같은 수수께끼들을 계속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에 대해 "나는 관객들이 극장 밖을 나서면서도 내 영화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도록 만들고 싶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아마도 그가 <박하 사탕>을 본다면 그렇게 시간과 구성을 비비 꼬지 않아도 그게 되는구나..하며 무릎을 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박하사탕>에서 이 작전의 역할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 이 영화가 정작 노리는 것은 주인공이 잃어버렸던 또는 살해해 왔던 순수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관객들을 동참시키는 것이다.이 순수란 물론 <초록 물고기>의 막둥이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마지막 숨통을 끊어내 버렸던 바로 그 순수다.


결국, 이 영화의 에피소드들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리버스 모션reverse motion 기차는 영화 전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태엽이 된다. 그리고 이 거꾸로 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마지막 김영호의 생에 종지부를 찍었던 그 기차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영화를 시간을 거슬러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장난이나 눈요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한 형식을 취한 솜씨야말로 <박하사탕>을 훌륭한 영화로 만드는 가장 큰 요소다.



그리고 <초록 물고기>에서 거의 보일듯 말듯했던, 이창동 감독의 역사나 사회에 대한 관심은, <박하사탕>에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주식투자에 전재산을 쫄딱날린, 한때는 바람도 피워가며 잘 나갔던, 경찰로 학생들을 고문하던, 80년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노조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시절의 공장 노동자였던 김영호의 역사는 그대로 한국 근/현대사다.


개인의 삶을 통해서 사회/역사를 디벼본다는 이런 시도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시도다. 당장에 최근의 <꽃잎>, <세상 밖으로>, <아름다운 시절> 같은 한국 영화들만 보더라도 그렇고, 외국의 영화들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면 본다면 그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박하사탕>은 이런 역사적 은유를 이들 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드러낸다.


헌데, 가만히 관찰해보면, 영화속 등장인물들에서 김영호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스크린에서 그를 직접적으로 망가뜨린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를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 모습을 만들어놓은 주식투자 시켜서 다 들어먹게 한 증권회사 직원, 동업하자구 해 놓구 내 돈 떼먹고 날른 친구새끼도 김영호의 대사 속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그를 순진한 노동자에서 고문경찰로 만든 것도, 그의 선배경찰들이라기 보다는 파시스트 정권이다. 그의 다리에 박힌 총알을 박아 그를 경찰이 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도 광주라는 이름의 역사다. 심지어는 김영호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도록 한것도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우연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가슴속 순수를 군화발로 짓밟은 것은, 구체적인 사람이 아닌 권력, 역사, (천민) 자본주의등의 말로 대표될 수 있는 추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그 대사와 연기와 화면이 가지는 리얼리티에도 불구하고 별로 현실적인 것으로 와 닿지 않는다.


결국 지나치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상징들로 인해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졌으며, 그럼으로써 폭력적으로 발전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가 우리의 순수를 파괴해왔다는 그의 고발은 일종의 식상한 훈계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때문에, 본 기자에게 <박하사탕>은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힘은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을 흔드는 무게는 가지지 못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인간이 역사에 파묻힌쪽에 가깝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점은 본 기자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한계일 뿐이다. 위 얘기 무시하셔도 상관없다. <박하사탕>은 그런 한계를 아쉬움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니까 말이다.


앞서 얘기했던 내용과 형식의 일치외에도 이 영화를 훌륭한 것으로 만든  요소들은 많지만, 그 중 뭐니뭐니해도 설경구의 광기어린 연기의 비중이 가장 크다 할 수 있겠다. 70년대에서 90년 말까지의 넓은 시간을 아우르는 에피소드 마다 주인공의 변화를 손에 잡힐듯 만들어내는 표현의 폭도 그렇거니와, 장면장면마다 마치 세상 마지막 연기같이 혼신의 힘을 쏟는 열정도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초록 물고기>에서 전화박스 씬이라던가 차창에 얼굴을 뭉개면서 죽어가는 장면에서의 한석규의 역할이 그랬듯이, 설경구의 연기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이창동 감독이 최고의 무기로 사용하는 롱 테이크를 가능하게 해준다. 물론 가장 그 역에 적합한 배우를 발견해 그 능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이창동 감독의 역량도 무시할 수 없지만 말이다.


김여진(김영호의 마누라 역)을 제외하면 거의 처음 보는 얼굴들로 메워진 조연들을 영화속에 잘 녹아들어가게 한 캐스팅의 묘미도 뛰어나다. 만약 여기에 얼굴이 많이 알려진 배우가 조연으로 캐스팅 됐더라면, 김영호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극의 흐름이 많이 분산됐을 것이다.


특히 본 기자는 개인적으로 이재포 비스무리하게 생긴 윤순임의 남편과 해변의 커피 아줌마가 참 연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근데, 첫 에피소드에 나온 김영호의 옛 동네 친구들의 연기는 영 연극적인 것이, 좀 아니다 싶더라. 아니냐? 그럼 말구.


어쨌든, <박하사탕>에서의 설경구의 연기는, 딴지일보 영화부 주관, 딴지 수뇌부 후원의 영화상 대좃상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은 감독의 이름으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또한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진지한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또는 한두 작품 흥행에 성공시킨 스타 감독로서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매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감독의 이름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워도 전혀 무리가 없는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물론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원래 좋은 영화를 보면 더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고, 그지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를 보고싶은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법이다.


그런 전챠로 본 기자, 다음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박하사탕>을 한 걸음 더 뛰어넘는 작품이 되길 충심으로 기대해 본다. 와, 이 영화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도록 하는 그런 영화가 되기를.


 덧붙여서


 작년(99년) 부산 영화제 개막작으로 이 영화가 상영됐었던거, 아시는 분은 다 아실꺼라 믿는다. 그때 이 영화는 외국인 관객을 위해 영어 자막 처리가 된 필름을 상영했더랬다.


근데 영화 중반쯤에 나오는 김영호가 자기가 운영하는 회사 여직원하고 카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이 여직원, "사장님, 아... 사장님.." 등등의 효과음을 내 주는데, 문제는 그 밑에 박혀있었던 자막이었다.


"President.. President.."


아무래도 이 번역은 좀 너무했다 싶다..


 그리고 개막 상영이 끝난 다음, 이창동 감독을 우연찮게 만나 기자를 사칭, 싸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제 도중 이 영화의 열혈 제작자 명계남 아자씨도 만날 수 있었고.


아래는 두 분이 딴지일보 독자 제위께 드리는 메시쥐이다. 뭔 뜻인지 잘 이해 안되시더라도 니덜이 알아서들 이해하시기 바란다. 예술의 세계란 원래가 좀 난해모호한 법이다..   









이창동 감독








제작자 명계남



-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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