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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추천0 비추천0






1999.4.19.월



아래의 글은 본지 독투란에 4월 13일 투고된 것이다. 모두들 읽어보시라. 그리고 모두들 한마디씩 하시라. 누구에게라도...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36살먹은 남자다. 지난 달에 컴퓨터를 샀다. 할 줄은 알았지만 소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터넷도 탐험하고 이렇게 요즘 인기있고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온다는 딴지일보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요즘 한국은 서용빈인가 하는 야구선수하고 김뭐인가 하는 가수들이 병역을 기피해서 시끄러운 모양이다.


갑자기 군대얘기가 하고 싶어진다.


난 오늘 한국국적을 버린 대신 뉴질랜드 국적을 얻었다. 이곳에 온 지 약 3년... 뉴질랜드 국적 얻었다고 정말 이나라 국민이 된 걸까? 천만에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도 난 이방인일 것이다. 난 그것을 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나 싫어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웬만큼 정착도 했고 내 명의로 된 작은 집과 배 한 척도 있다.


3년내내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지금은 일주일에 5일을 바다에서 보낸다. 난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곳에 와서 비로소 난 비슷하게 꿈을 이룬 것 같다. 고기잡이 배의 주인이 뭐 대단할 것까지는 없지만 틈나는 대로 바다를 그리며 나름대로 난 낭만을 느끼고 삶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때때로 외롭다는 생각이들 때도 있지만, 어차피 난 혼자가 아니었던가...


난 정말 한국이란 나라가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이곳에 왔다. 누구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싫었다. 한국이란 곳이. 하지만 그래봤자 김치 못 먹으면 못 살고 좋아하던 한국노래 들으면 눈물 흘리는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이다.


 


난 고아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여동생 이렇게 둘뿐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 두 분 다 차사고로 돌아가셨다. 서울로 오시던 고속버스가 다리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천만원이란 돈이 보상금으로 나오고 난 부모님을 잃었다. 친척분들 말로는 그 운수회사 사장이 3성장군에 대단한 권력가 출신이어서 유가족의 힘으로는 그 정도 돈도 겨우 받아낸 것이라고 했다.


15평짜리 아파트 한 채와 아버지께서 하시던 작은 동네 식료품점을 처분해서 그렇저럭 살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신문 돌리고 여동생은 대학도 포기해가면서 하나 뿐인 오빠를 위해 돈을 벌었다. 난 여동생을 위해서 그리고 내 미래를 위해서 죽도록 열심히 그림을 그린 끝에 경희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3수를 했다.


레슨을 받는다는 것은 형편상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공부 잘해서 학력고사 잘 치고 실기시험을 잘 봐도 최소한 대학 강사에게 레슨받지 않으면 대학 못 간다고 주위에선 충고를 했지만 난 무슨 소리냐며 무시했다.


난 용산고등학교를 나왔다. 가난하고 부모도 없는 놈이 할 수 있는거라곤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거였다. 당시 나의 내신은 2등급에 학력고사 285점(체력장 포함)임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레슨 한 번 받지 못하고 동네 미술학원만 겨우 입시 석 달 전 갔었던 게 아마 3수의 고배를 든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담임선생은 가난한 고아가 무슨 미술이냐며 그냥 연고대 아무과에나 가라고 하셨다. 나를 걱정해주신 것이었을까? 아니면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그런 것일까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뭏든 난 끝까지 미대를 고집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난 군대에 가야 했다. 고아에 소년가장이나 마찬가지인 나를 병무청은 무슨 이상한 법규를 들어가며 현역대상자라고 했다. 여동생이 조그만 직업소개소에서 사무를 봤는데 아마 그게 이유가 아닌가 싶다. 어제 인터넷을 보니 배우 이병헌이도 소년가장이라 현역에서 면제사유가 되었다고 하는데 외제차를 타며 한 달에 수천만원을 버는 소년가장도 한국에 있고 나처럼 현역가는 소년가장도 있고 한국은 정말 변하지 않는 다양성의 나라인 것 같다.


결국 난 대학생활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군대로 끌려갔다. 군대가는 날 용산역에서, 부모님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여동생을 안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오빠도 없이 혼자 살 계집애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차라리 나를 위해 돈벌어야 하는 동생힘도 덜고 잘되었다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군대에서 보낸 3년... 난 빽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터라 당연히 강원도 횡성으로 끌려갔다. 공병이었는데 상병 달기까지 거의 매일 안 맞고 살아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병장을 달기 한 달 전 진지를 파는 훈련을 하다가 졸병이 잘못 휘두룬 군용삽에 복숭아뼈를 크게 패여서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휴유증으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발목부위가 퍼렇게 변하고 시린다.)


3개월간 수통에 입원해 있으면서 난 점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한국사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통합병원의 현역병들은 빽이 좋다고 한다. 그 곳 방위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상하게도 체육대회를 하면 늘 방위가 이긴 것 같다. 달리기를 하건 족구를 하건...


제대 몇 개월을 남겨두고 난 의가사를 당하기 싫었다. 그래서 병원에서라도 좋으니 현역제대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횡성에서는 당시 훈련중 난 사고로 중대장이 진급에서 탈락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를 거부했고 그래서 치료가 다된 후에도 2주 동안을 대기하다가 결국은 용산 국방부에서 전역대기를 했다.


그 좋다는 국방부를 난 빽없이 가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의 몇 달간은 정말 나에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멍했다. 난 마땅한 보직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무반에 누워 있기도 뭐하던 차에 나에게 떨어진 임시보직은 국방부 청사 장군식당 청소 보조였다. 주로 방위와 현역병들이 보직을 담당하는 곳인데 웬만한 빽으로는 오지 못하는 자리라고 했다. 난 말년 병장이라 주로 다른애들이 청소할때 옆에서 담배만 피웠다. 하지만 타부대에서 온터라 고참대우는 받지 못했다.


말로만 듯던 장군식당.. 메뉴는 매일 달랐다. 중식 한식 양식, 난생 처음으로 뒷정리를 하며 캐비어란 것을 먹어봤다. 비프스테이크, 함박스테이크, 탕수육, 양장피, 오리탕, 한정식 등 비록 먹다 남은 것이긴 하지만 난생 최고급요리는 거의 다 섭렵했던 것 같다. 그 곳 사병들말로는 장군식당은 한 끼 당 당시 5천원의 부식비로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이거 일반식당이면 한 끼 당 줄잡아도 5만원은 받을거라고 했다.


내가 제대할 무렵 사병의 급식을 담당하는 국방부 모 장군이 사병부식비 수십억 원을 착복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아니면 국방부 사병들은 맨날 px에서 사먹어서 그런 것일까.


국방부 사병식당의 반찬은 한 마디로 돼지밥 수준이었다. 차라리 예전에 있던 횡성은 이곳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었다. 반찬이라고 나오는 게 간장에 버무린 마늘, 쉰 김치, 똥국이라 불렸던 된장국이 다였고 가끔가다 외국에서는 가축 사료로나 쓴다고 하는 팔뚝만한 맛 없는 수입 꽁치를 저급 식용유에 튀긴게 나왔다.


당시 한 끼당 700원이 사병부식비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아무리 잘쳐봐야 원가 2백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모장군(이름이 기억 안 난다)이 구속되었을 때야 비로소 난 그 이유를 알았다.


다행이 군생활 중 친한 친구를 하나 건지게 된 곳도 바로 그 장군식당이다. 그곳을 담당하던 박 하사가 바로 그인데 동갑내기에 서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친해졌다. 당시 그는 마찬가지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림을 포기하고 하사를 지원해 국방부로 차출된 케이스였는데 난 그를 위해서 제대하고 한 달 동안이나 매일 그림지도를 해주었다.


요즘도 그와는 종종 통화를 한다. 지금 그는 헌병대에 있는 걸로 안다. 아직도 국방부 장군식당 그렇게 맛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에엠에푸가 터져도 장군식당의 식탁은 변한 게 없고 오히려 더 찬란해졌다는 예상대로의 답을 그로부터 듣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역시 떠나오길 잘 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국방부를 지킨다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출근하는, 황금보직 방위병들의 아버지는 헌병대 사병들의 말에 의하면 모두 장군이나 국회의원, 병원장, 은행장들이라고 했다. 내기 억에... 6개월 방위들도 넘쳐났던 것 같고.. 거의 다 자가용을 타고 삼각지 다리 밑에 주차해두었다가 퇴근할 때 타고 가고.. 몸도 헬스클럽들에 다니는지 다들 좋았던 것 같고... 횡성의 동료들까지 말 할 필요도 없다. 국방부 헌병대, 의장대 사병들은 대부분 저 밑 지방에서 차출되어서 휴가도 제대로 못하고 고된 업무로 발바닥이 갈라지는 판에...


내가 한국사회에 대해 심한 염증을 가지게 된 때가 아마 바로 이 군시절부터 였지않나 싶다.





군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다. 동생이 3년 동안 나를 위해 부어놓은 적금을 타서 등록금도 내고 생활비로도 충당했다. 내 주제에 좋아하는 여자도 생겼다. 열심히 그림도 그리고 나름대로는 정말 열심히 생활했다. 동생의 권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 자신이 가난한 티를 내기 싫어서 과하다 싶은 메이커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이 년 동안 사귄 여자는 동양화를 그리는 당시 서울여대에 다녔던 여자였다. 지금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사귄지 이 년 만에 그녀의 집에 인사드리러 간 것을 계기로 나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철저한 염세주의자로 변했다.


가진 것 없고 부모도 없는, 거기다 가난한 그림쟁이 주제에 무슨 여잘 사귀나... 은행지점장이라던 그녀의 아버지는 내가 집안에 들어왔다 삼십 분이 채 안 돼 현관문을 나서기까지 인사 한 번 받지 않았고 눈 한 번 맞춰주지 않았다.


사랑? 웃기는 말이었다. 그렇게 서로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빈부의 차가 나는 남녀가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을까? 난 순진했다. 그녀는 괴로워했고 결국 난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끝나고 나는 이를 악물고 그림을 그렸다. 3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고 차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생활 4년 내내 성남의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모은 돈 천만원으로 난 대학원을 준비했다. 졸업하자마자 어렵사리 동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전 출품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잘 그려봤자. 미리 수상자 다 정해놓고 서울대 홍대 돌아가면서 상타먹기 하는 거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난 가진 것도 없고 심사위원 선생도 한 분 모르고 그 사람 제자도 아니며 주위 인맥이 좋은 것도 아닌 터라 한 번도 출품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그려서 출품한 작품이 일본에서 열리는 쿄토 국제청년미술대회에서 2위로 입상을 해서 상금 30만 엔과 난생 처음 3일 동안 일본 구경도 갈 수 있었다. 이후 다른 작품으로 독일 에센 지방에서 열리는 영아티스트 컴피티션에 출품해서는 3위 입상을 했다. 난 용기를 얻었고 동생과 생활의 안정을 위해 대학교수가 되어 작품활동을 계속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하지만 대학원을 졸업하고 첫 단계인 강사 자리를 얻을 때 난 한국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라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아무리 실력 좋고 뭐고간에 돈 가져오라는 말을 경희대부터 그 밑에 서열에 있는 학교관계자들로부터 (경희대보다  좋은 학교에 강사 신청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병자 짓이다.) 수십 번도 더 들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시절 날 지도했던 지도 교수의 후배가 교수로 있다고 해서 추천받아 찾아간 모예전이라는 곳에서는 칠백 정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난 정말 토할 것 같았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라는 것을 알았다. 난 동생과 성남에 있는 12평짜리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로 집 앞에 동네유치원에서 미술선생하는게 다였다. 당시 월수 30만원 조금 넘게 받았는 데 직업 소개소 직원으로 있던 동생은 70 정도를 받았다. 밤에는 간간히 경희대 앞에 있는 입시미술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나마 대학다닐 때 담당교수가 다리를 놓아준 덕분이었다. 당시 하루 저녁에 만 원 정도를 일당으로 받은 것 같았다. 일년 조금 넘게 그 생활을 하면서 난 점점 더 한국사회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여동생은 직업소개소에서 경리를 맡아보았는데 가끔씩 소개소 차를 직접 운전하기도 했다. 같은 직업소개소 근무하는 후배의 생일 잔치를 하느라 그곳 소장과 직원들이 모두 음주였던 어느 날 모두를 집에 데려다 주고 자신도 집으로 차를 몰고 오던 중 잠실 탄천에서 음주 차량과의 추돌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당시 선거철로 기억되는데 그때 국회의원 아들이 모는 차량과 충돌한 것이다. 당시 민자당 의원의 아들로 기억되는데,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조그만 탄천길에서 대학생 신분에 걸맞지 않는 그랜저를 시속 100 가까이로 몰았는데 여자친구랑 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역시 한국은 있는자들의 나라던가?


 


경찰서 형사들은 앞날 창창한 젊은이 앞길 망치지 말고 합의 봐주라며 음주사실도 기록하지 않았다. 은근히 우리 남매를 윽박 지르는 듯한 분위기에 우린 가진 것 하나 없는 약자로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치료비와 보상금 오백 만원을 병실침대 위에 던져두고 가는 의원 사모님의 모습을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사모님 운전기사 말로는 그것도 우리 남매 사정을 사모님이 듣곤 딱해서 백 만원을 더 금일봉 조로 준 거라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도 동생의 휴유증은 한 달 정도를 더갔다.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한 달간은 내가 반대로 동생의 시중을 들었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유치원은 쉬어야 했다. 사고 나고 3개월간은 정신이 없었다. 그와중에 내가 무슨 정신이 있었을까?


엎친데 덮쳐 무리를 한 끝에 군시절에 다친 발목이 재발되어 나 또한 움직이는데 큰 불편을 겼었다. 그러던 차에 예비군훈련을 내내 빼먹었다는 이유로 난 예비군 훈련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동네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서 동사무소에 가져가면 거기에 무엇을 더 첨부해서 내라, 뭘 더해서 내라, 훈련 면제 사유가 부족하다느니 어쩌니 옥신각신해서 차라리 발목이 부서지는 한이있어도 더러워서 훈련받아야겠던 차에 동생의 사고와 또 발목 상처의 재발로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발조치를 당한 것이다.


당시에는 예비군 훈련을 돈 좀있는 똥깨나 싸는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많이 빼먹었다하여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을 때인데 정말 우습게도 입건된 사람들 중 내 이름이 맨 먼저 신문에 났다. 그것도 실명으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나 중소기업사장, 변호사 뭐 이런 직종이 많았는데 전부 이모 박모로 나고말이다. 법원에서 판사는 엄청난 정상참작(다리상처)이었다고 마치 무슨 은전이라도 베풀 듯이 판결을 내렸다. 벌금 100만원을 내고 석달 후 나는 3박4일의 예비군훈련을 마쳤는데 마지막 날 발목상처 재발로 결국 2주일간 병원통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자비를 들여가면서 말이다.


동생과 함께 한국이란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영원히...


그래서 12평 시민 아파트를 처분한 돈 이천오백에 동생과 내가 평생을 모은돈 3천 만원을 깡그리 챙겨서 이곳 뉴질랜드로 이민 온 것이다. 이곳에 와서는 부두 잡역부일서부터 해서 안 해본 일이 없다. 동생은 한국교민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3년을 둘이서 정말 고생하면서 돈을 벌어 결국 작년 말 나는 고깃배를 하나 장만해서 그걸로 생계를 삼고 날 위해 대학을 포기했던 동생을 뉴질랜드 제1대학에 들어보냈다.


동생은 지금 그곳에서 장애자 교육을 공부하고 있다. 이번이 첫 번째 학기다. 바닷가 근처에 방 두 개짜리 조그만 집을 샀다.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 아무런 사회의 편견도, 적어도 우리 남매가 사는 이곳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린 이곳에선 영원히 이방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언제나 불이익당하고 따돌림받는 이방인 아니었던가? 적어도 우린 이곳에서 따돌림과 불이익을 당하진 않는 것 같다. 아직 겪지 않은 인종차별이니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최소한 이곳은 노력한 대로 대가가 지불되는 사회다.


난 틈틈히 그림을 다시 그릴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공부를 좀더 해서 이곳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싶다. 이곳 대학에서 장학금 입학허가도 작년 겨울 받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 미루고 있다. 올 여름엔 조그만 겔러리에서 개인전도 열고 싶다.


꼭 그렇게 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작고 보잘것 없는 고기잡이 배의 선장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거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동정 받으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단지 한국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게 항상 자랑스런 것은 아니며 한국사회를 지독히 혐오한다고 그것이 죽을 죄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쓰는 것이다.


난 분명 죽을 때까지 한국사람일 것이다. 아무리 국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난 아무리 달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이 사실이 너무 싫은 것이다.


어느 사회나 잘못되고 고쳐야 할 것은 있게 마련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해도 너무한 곳인 것 같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수단방법 안 가리고 모은 돈 있고 빽 있으면 한평생 죄짓고도 발뻗고 잘 수 있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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