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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독일 언론의 반응1

 

2009.8.19.수요일

 

2007년 8월 17일 독일 현지시각 오후 2시 30분. 도서관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부랴부랴 작성한 딴지에 보내는 첫 번째 기사를 보내 논 뒤라 마치 딸 시집보낸 친정어머니마냥 가슴 한켠이 조마조마 했다. 메일함을 열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편집장으로부터 메일이 한통 와있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혹 어제 쓴 기사가 짤리더라도 낙심하여 짐 싸서 귀국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차라리 ‘니 기사 넘 후져서 못 올린다.’란 메일을 받는 게 훨 나을 뻔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너무도 황망한 나머지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노트북 앞에 앉아서 발만 동동 구르며 매시간 업데이트 되는 기사와 관련 글들만을 애타게 읽어나갔을 뿐이었다. 이번엔 그러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미력하지만 독일내 언론들이 김 전대통령의 서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소개하겠다. 그리고 그것을 이분의 영전에 바친다.

 

삼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대부분의 신문들은 김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속보, 국제면 머릿기사 등으로 앞 다투어 다루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등 국내외 언론보도 및 병원 관계자, 김 전대통령 측의 발언을 인용하여, 김 전대통령이 금일 오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서거하였으며, 이미 7월 중순부터 독감 증세 및 폐렴 증상을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고 보도한다. 각 언론사마다 그 분량, 논조, 평가 등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그를 소개할 때 등장하는 단어는 민주주의,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및 노벨평화상 수상이다.

 

 




먼저 연합통신 PR-Sozial이 이 소식을 비교적 신속하게 전한다.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한국의 김대중 전대통령이 금일 83세의 나이로 서울의 한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서거하였다. 7월에 그는 심각한 폐렴 증상으로 병원에 후송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수십년간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70년대 초 그는 남한의 독재자(Diktator) 박정희의 암살시도를 간신히 벗어나기도 하였다. 1976년 그는 5년 형을 언도받기도 하는데, 그가 한국의 민주화를 도모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야당생활 끝에 90년대 말 그는 한국의 대통령으로 당성된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다. 김 전대통령은 언제나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렸했다. 소위 ‘햇볕정책’을 펼치는 와중에 김대중 전대통령은 2000년도에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갖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 같은 해에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원문보기

 

프레세 인터넷판(http://www.diepresse.com)은 마찬가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 서거 경위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 인생이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한다. 또한 퇴임 후 불거졌던 현대 대북 불법 송금사건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서거
[전략]
김대중 전대통령은 1925년에 태어났다. 1954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상대후보로 그의 정치경력은 시작된다. 독재자(Diktaturen) 박정희 장군과 전두환 치하에서 이 민주투사(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리킴; 역자 주)는 박해를 받는다.
그에게 신체장애를 안겨주었던 자동차사고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3년 일본 망명생활 당시 그는 납치되었었고 1980년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1982년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된다. 1981년 사형이 언도된 사상범으로 독방에 갖혀 있을 때 오스트리아 브루노-크라이스키-인권상 수상을 전해받는다.
민주화(87년 6월; 역자 주) 이후 그는 귀국한다. 1987년과 92년 대선에선 실패하고 결국 97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중략]
그가 퇴임한 후 현대그룹의 자금이 불법적으로 북한에 전해진 것과 측근들의 금품수수 혐의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가 북한의 핵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비밀로 유지한 것 역시 다각도로 비판받았다.

 

원문보기

 

벨트 온라인판(http://www.welt.de)에는 ‚김대중‘이란 제목의 사진 갤러리가 링크되어 있다. 그의 정치 인생을 11장의 사진으로 되돌아볼 수 있다.

 

http://www.welt.de/politik/article4344451/Kim-Dae-jung.html

 

독일의 대표적 주간지 포쿠스 인터넷판(http://www.focus.de)에서는 김대중 전대통령을 ‚민주투사‘ ‚인권투사‘ 등으로 표현하고 있이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 전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했고, 현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다시 뒤엎고 있다고 보도한다.

 

한국 전임 대통령 서거
[전략]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임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정책(햇볕정책; 역자 주)을 계승한다. 이는 그러나 2007년 보수적 대통령인 이명박이 집권한 이후 불분명해지고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이건 단지 북의 핵실험 때문만은 아니다. 남북은 아직도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후략]

 

원문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타게스차이퉁 인터넷판(http://www.taz.de)은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제목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주투사이자 남북 긴장완화의 대변자가 오늘 서울에서 서거하였다‘라고 그의 서거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링크)

그 외 여러 언론 보도들 역시 앞서 소개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그는 한국과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고, 이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이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이라는 것이 독일 내 언론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본인이 현재까지 검색해본 기사들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본 소식을 다룬 매체는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신문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이었다‘(http://www.faz.net)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본 기사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김대중 서거

 


2000년 김대중 전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그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위해 날을 세웠다. 민주주의는 아사아와 맞지 않다며 여전히 그를 비판했다. 하지만 아시아에 민주주의의 뿌리가 없다고들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국의 대통령은 말했다. 서양보다 훨씬 앞서 아시아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개념을 낳았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성공적인 민주투사이며 동아시아에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수십년간 그는 자신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는 극도로 완강하고 이상주의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오랜 야당 세월과 한국의 군사정권과의 투쟁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다. 중앙정보부를 통한 박해와 암살시도도, 오랜 옥살이와 가택연금의 시간도, 그리고 추방과 망명생활 그 어떤 것도 그의 정치적 의무를 단념케 하지 못했다. 비록 감옥살이의 고초로 그의 건각이 악화되었고 자동차 사고로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김대중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시아의 만델라‘로서 그는 외국에서 추앙받았다.

 

빌리 브란트는 그의 본보기였다.

 

노르웨이의 노벨상위원회는 그의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과, 특히 남북간의 화해를 위한 노력을 높이 샀다. 수상직전 그는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에 갔었고, 남북의 정상이 회담을 갖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였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평화협력 정책을 합의하였고 긴장완화 정책과 신뢰구축을 위한 활동을 통지하였다.

 

이렇게 역사적인 남북 정상간 첫 번째 회담은 김대중이 1997년 대선 후 시작했던 ‚햇볕정책‘의 결과였다. 그간의 전임자들과는 달리 김대중은 이웃한 공산주의국가와의 관계가 접촉을 통해 변화되길 원했다. 위협과 단절 대신에 그는 대화와 북한을 위한 경제적 원조를 택한다. 당시 그의 본보기는 빌리 브란트였다. 그의 긴장완화정책을 그는 마찬가지로 한국에 이식하길 원했다. 브란트의 동독정책과 유사하게 김대중의 햇볕정책도 자국에서 논란이 없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공산주의 국가에게 너무 많이 양보하고 너무 많이 퍼다 주며 너무 적은 답례를 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대중은 비판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는 완강한 정치가였으며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붙들고 있었다. 김대중은 1925년에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한 선박회사에서 일했고, 이후에 신문 출판업자로 일한다. 카톨릭 신자인 그는 1961년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야당당수가 된다. 1971년 대선에서 그는 박정희를 이긴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군사법을 적용하려 하기 전에 김대중은 우선 일본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나서 미국에 가서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 활동을 펼친다.

 

박정희는 이 카리스마 넘치는 경쟁자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가 일본에서 머물고 있을 때 남한의 정보기관이 그를 납치하여 한국으로 데려간다. 미국 정부의 개입이 결국 박정희에 의해 계획된 것이 거의 확실한 김대중 암살시도를 막았다. 독재자는 미국의 압력으로 자신의 도전자를 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가택연금 시킨다. 1976년에 그는 5년형에 처해진다. 그가 또 다시 한국의 민주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사형선고

 

1979년 군사독재자 박정희 총격사건 이후 김대중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신군부의 독재자 전두환은 1980년 그가 내란을 주도했다고 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나중에 이는 다시 징역형으로 감형되고 1982년 김대중은 병원치료 목적으로 미국을 갈 수 있게 된다. 1985년 다시 귀국하여 김대중은 또 다시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1987년에 치러진 첫 번째 민주적 대선에서 김대중은 입후보하지만 노태우에게 패배한다. 1991년 두 번째 도전에서마저 실패했을 때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 열혈 정치가는 정치에서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 1995년에 그는 신당을 창당하고 이와 함께 다시금 한국의 야당 총재가 된다. 두 야당이 그를 연합후보로 선출하게 되고 김대중은 결국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게 된다.

 

김대중은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그가 취임했을 때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한국에 한참 한파가 몰아쳤을 때였다. 그를 친노조 사회정치가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놀랬던 것처럼 김대중은 자신을 확고한 구조조정자로 드러낸다. 그는 거대 기업을 뜻하는 재벌(Chaebol)의 권한을 무너뜨리고 IMF의 이행조건을 따른다. 그 덕분에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빨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햇볕정책" 논란

 

김대중은 또한 과거 한국을 식민지배했던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21세기 동반관계“에 대한 공동 선언이 그의 재임기간 중에 체결된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과거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공동개최 역시 일본과의 화해를 나태나주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의 최대 사업인,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한 „햇볕정책“은 시작부터 논란이 되었다. 전임자 시절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대화와 경제원조를 통해 북한을 개방과 인도주의적 긴장완화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때 그를 도운 사람은 현대그룹의 창업자였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났으며 햇볕정책의 중재자요 원조자를 자청했다.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은 이 정책의 결정판이었다.

 

2003년 특검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정상회담을 반대했던 이들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미 정상회담 전에 300만 유로 이상의 돈이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으로 전달되었다고 비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제는 „돈 주고 산 정상회담“이란 말이 오갔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은 빛을 바랬다. 그는 그 자금이 북한의 경제회생에 한정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을 변론하였다. 하지만 결국 김대중은 그 액수를 숨긴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신뢰상실과 고립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은 햇볕정책이 더욱 위기를 맞도록 행동했다. 약속했던 완화정책, 이를 테면 이산가족 상봉은 보잘 것 없어졌고, 2002년 남북 경계해상에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조지 W. 부시 대통령하에 미국의 대북정책이 바뀌었을 때 김대중은 워싱턴의 원조를 잃었다. 북한은 부시의 정책에 남한과의 대화 단절로 화답했다.

 

김대중은 자신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햇볕정책은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권위는 그의 두 아들과 몇몇 측근들이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집권 말기에 김대중은 인기를 잃었고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욱 존경을 받았다.

 

아무튼 후임 대통령 노무현이 그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려 한 점에서 김대중은 명예를 충분히 회복했다. 그러나 노무현 역시 북한과의 교류에 있어서 운이 없었다. 두 번째 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은 평양을 방문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이명박 현 대통령은 완전히 햇볕정책에서 돌아섰고 이제부터 북한에 그 어떤 선금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집권하고부터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올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국제사회의 우려를 낳기에 이르렀다.

 

김대중은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아무런 성과 없는 냉랭한 정책을 대면하고서 햇볕정책이 북한을 상대하는 데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나 의문을 던지는 목소리는 김대중의 지지자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햇볕정책으로의 회귀 가능성을 김대중은 더 이상 접하지 못한다. 그는 화요일에 서울의 한 병원에서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원문링크

 

 


 

 

 

야콥 크놉라우흐(Jakob Knoblauch)라는 이름의 한 독자가 이 기사를 읽고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긴다.

 

위대한 정치가(Ein großer Politiker)

 

 

 

독일 라이프치히 에서

 

이제는 떡이 먹고픈

 

지노(add33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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