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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방법

 

2009.09.23.수요일
미스와플

 

달식이가 그녀를 우리에게 처음 소개했던 자리에서, 그녀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우리는 으레 그렇듯 이런 질문을 날렸다.
"여자 친구 어디에 반해서 사귀게 되었어?"
달식이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착해

 

달식이가 다른 말을 했더라면, 우리는 그들의 연애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인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식이는 수많은 남자들이 그러했듯 그녀를 착하다고 했다. 나는 달식이가 그녀를 모르고 있다고 단정 지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착하다는 말은 좋다는 의미의 관용어로 쓰여지고 있다. 가슴이 큰 여자는 슴가가 착해, 돈이 많은 여자는 지갑이 착해로 통한다.
그런데 이런 구체적인 목적을 띤 관용어적 표현과 상관없이 원래 남자들은 여자를 향해 착하다는 말을 많이 써왔다.
달식이의 애인은 젊고 예쁘고 세련되고 귀엽고, 거기다 돈도 좀 있어 보였지만 착해 보이진 않았다. 그 후에도 그녀와 몇 번 술자릴 가져 봤지만 어딜 봐도 착한 구석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달식이의 말은 늘 변함이 없었다.
착해!!!

 

걔랑 대화가 안돼
6개월 뒤 술자리에서 달식이가 한 말이다.
연인 사이에는 절대 해서 안 되는 말들이 있다.
"넌 왜 맨날 돈이 없니?", "니네 집 왜 그래?", "별로(섹스 끝난 후에 좋았냐고 물어볼 때)."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덧붙이면 아마 "대화가 안돼" 일 것이다.
이 말을 제3자에게 털어놓는 것도 위험하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보다는 푸념할 의지가 더 클뿐더러 사랑하는 사람에게 얽힌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달식이는 그만 말 해 버린 것이다. 
"저 밖에 몰라. 꼭 벽하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니까."
착하다고 고백하던 6개월 전의 달식이를 떠올리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모든 것은 달식이의 오해와 편견이 불러온 자작극이었다.

 

"착하다면서. 네가 착해서 사귄다고 했잖아."
달식이는 약간 머뭇거렸다.
"내가 그랬나? 그만하면 착하긴 한데..."
"그만하면 착하다니, 대체 ‘그만하면’의 기준이 뭐야?"
달식이는 답을 못했다.
"너 솔직히 니 애인이 착해서 좋아한 게 아니라 이뻐서 좋아한 거 아냐?"
궁지에 몰린 달식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너무너무 착해서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달식이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6개월만에 대화가 안 통할 정도로 저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로 돌변해 있었다. 그녀가 6개월 만에 갑자기 못되어진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저 달식이의 콩꺼풀이 벗겨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많고많은 콩꺼풀 중에 달식이는 착한 여자 콩꺼풀을 뒤집어 썼을까? 아니 달식이 뿐 아니라 왜 많고 많은 남자들은 죄다 여자가 너무 착해 사랑을 시작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인격에 반해 연애가 시작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옆구리가 허전해서 아무나 찔러보다 시작하기도 하고 술김에 눈이 맞아 한번 자는 바람에 시작되기도 한다. 그 시작은 어쨌든 사귀다보면 정이 들고 우리는 그 정의 힘으로 상대에 대한 환상을 키워나가며 연애를 풀어 나간다.
그 환상이 얼마나 지켜지느냐 혹은 일찍 깨어지느냐에 따라 연애의 기간이 결정되기도 한다. 물론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환상보다 더 아름다운 실체를 만나게 되는 경우엔 별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

 

남녀가 사귀기 시작한 초기에 가장 위험한 건 서로가 서로를 착하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 단정이 위험한 건 그런 판단이 우리로 하여금 상대를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어느 정도 봉쇄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선 착하다는 것이 그다지 큰 미덕이 아닌데 왜 우리에겐, 특히 우리나라 남자들에겐 착하다는 것이 절대 미덕으로 통하는지 모르겠다. 일찍이 인순이 언니가 착한 여자가 무슨 소용있나 하고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면 가장 먼저 착하다는 단정을 덧씌우기 좋아한다. 넌 착하니까 넌 착하잖아라는 저주에 가까운 칭찬을 부여한 뒤, 거기에 맞춰 상대를 오해하고 기대하기 시작한다.

 

 

물론 환상이든 오해든 그건 각자의 취향일 뿐이니, 그것마저 제거한 채 사실적인 연애만 하라는 건 아니다. 다만 착하다는 좋은 말도 때론 편견이 되어 관계를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거다. 달식이가 애인을 제대로 알고 파악할 기회를 초기에 놓쳐 버린 것도 그가 그녀를 착한 여자로 너무 빨리 분류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십대 시절, 너를 갈아마시고 싶어, 널 뜯어 먹을거야 식의 과격한 애정표현을 남발하며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한창 달달하던 시절, 나는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오빠는 내 어디가 좋아?"
남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일갈에 대답했다.
"착해서 좋아"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양 어깨가 무거워졌다. 나는 전혀 착한 여자타입이 아닌데 착한 여자로 인식된 것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묘한 압박감도 적지 않게 주었기 때문이다.
몇 해가 지나 그는 나를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 버렸는데, 착한 여자를 버리는 남자의 심리는 과연 어떨까, 궁금하지 않은가? 하지만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심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남자가 도망가고 몇 달이 흐른 뒤, 어느 늦은 밤 술 취한 김에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남자 역시 친구들과 어느 술집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번 만나자고 말했다. 그건 남자가 도망가기 전에, 쉽게 도망가기 위해 내게 깔아놓은 어설픈 약속 때문이었다.
몇 달 뒤에 다시 만나서 생각해 보자는, 그런 말을 철썩같이 믿었던 건 아니지만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말없이 수화기를 탁자 위에 올려놔버렸다. 그 사이에 그의 친구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러면 저 여자가 더 힘들어지는 거야. 빨리 끊어."
그러자 변명하듯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가... 약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렇다. 그에게 나는 이제 착한 여자가 아니라 약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악한 여자가 아니라 다행인가?)

 

시작은 언제나 착하다로 시작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착하다는 나처럼 약하다로 바뀌기도 하고, 한 글자 더 해 고약하다로 바뀌기도 할 것이다. 달식이는 대화가 안 통해로 바꾸었고 지금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는 무식해, 게을러, 저 밖에 몰라 등등으로 끝없이 바뀌어 지고 있을 것이다.
착해 보이는 걸 낸들 어떡하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 그런 사람에겐 우선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좀 바꾸라고 충고하고 싶다. 착해 보이는 건, 내 여자는 착해야 한다는 선입견이 먼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으로 이 여자가 정말 천사같이 착해 보이더라도, 여자를 향해 넌 착해라고 주입하는 것을 자제해 주기 바란다. 여자들이 스스로 착한 굴레에 갇히지 않도록 말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방법

이 글을 두 번 정독하기 바란다.
그럼 착한 여자가 얼마나 부질없는 남자의 편견과 로망에서 시작된 것인지, 그리고 별 의미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쉿!(She it!)> 저자 미스 와플(marun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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