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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랑법4] 그놈도 나쁘지만 그년이 더 나빠

 

2009.10.07.수요일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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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랑법 1 - 연재를 시작하며

 

신들의 사랑법 2 - 섹스호러 변신 이야기

 

신들의 사랑법 3 - 바람둥이 길들이기

 

 

 

 

『일리아드』에는 헤라가 제우스를 잡았다 놓치는 바람에 역공을 당해 하늘에 사지가 묶인 채 매달리게 되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의 권능을 이길 힘이 없었기에 남편에게는 어떤 복수도 하지 못했다. 헤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의 연인을 질투하고 그들에게 보복하는 것뿐이었다.

 

 

"내 남편 제우스가 홀린 것은 여우 같은 년들 때문이야."

 

 

빛나는 권력과 매력으로 무장한 최고 신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 죄고, 끝까지 저항했으나 납치되어 굴복한 것이 죄고, 심지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겁탈당하거나 남편인 줄 알고 잠자리를 함께한 것이 죄라면 죄인 여인들. 남편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남편이 데려온 첩의 머리끄덩이를 붙잡는 안방마님처럼 헤라의 분노는 자신의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남자가 잘못하게끔 만든 여자에게 향했다.

 

 

제우스의 혼외정사 이야기에서 가슴이 아픈 점은 헤라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옆지기 여신이기에 어떤 여자도 이 소유욕 강한 아내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헤라의 방식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사랑법인 일부일처제의 수호신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녀가 불행의 원인인 남성이 아닌 여성의 희생을 통해서 이 관계를 수호하기 때문이다.

 

 


<모로, 제우스와 세멜레>

 

 

 질투와 불안

 

 

헤라는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간 연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보다 치밀한 계략을 세웠다. 훗날 술의 신이 된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를 제우스가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헤라는 그녀가 자멸의 길에 이르는 계책을 쓴다.

 

 

"세멜레야, 제우스는 나랑 있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화끈한 모습으로 나타난단다. 그런데 너랑은 인간의 모습으로 만날 뿐이라니. 그럼 그놈이 제우스인지 짝퉁인지 알 게 뭐니, 푸훗!"

 

 

도발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자신과도 헤라와 있을 때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간곡하게 청한다. 제우스는 세멜레를 만류했으나 이미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엄숙한 맹세를 해버린 상황, 그는 본래 모습인 번개로 변했고 세멜레는 순식간에 불타죽고 말았다.

 

 

질투로 질투를 이긴 이 심리전이야말로 헤라가 연애계의 지략가였음을 입증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병법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발휘되었다. 또한 그녀가 사랑을 지키는 방법은 불행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벌여놓은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루벤스, 제우스와 칼리스토>

 

 

제우스는 아내의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터에서 아름다운 님프 칼리스토를 발견하고는 미인을 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를 범하기로 마음먹었다. 칼리스토는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따르는 님프로 순결을 맹세한 몸이었다. 그러나 제우스에게 그런 상황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도 문제되지 않았다. 제우스는 여신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칼리스토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유혹해 수태시키고 말았다.

 

 

처녀신 아르테미스(사실은 제우스)가 아름다운 처녀 칼리스토를 덮치는 장면은 여성 동성애를 관음하고 싶어 했던 이들에게 적절한 소재였다. 루벤스의 작품에서 여신-제우스는 공격적인 자세로 칼리스토를 제압하는 반면 칼리스토는 수동적이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뒤로 물러나고 싶은 듯 주춤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칼리스토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칼리스토의 임신사실을 안 아르테미스는 그녀를 내쳐버렸다. 정처없이 방황하던 칼리스토는 아르카스를 낳았고 이를 지켜보던 헤라는 출산 직후의 칼리스토를 곰으로 만들어버렸다. 졸지에 곰이 되어버린 여인은 아들을 잊지 못하고 숲을 떠돌았고, 양치기의 손에서 자라난 아들은 사냥꾼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아들과 어머니-곰이 숲에서 마주쳤을 때 훌륭한 사냥꾼은 곰이 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고 화살을 조준했다.

 

 

제우스는 관계가 끝난 뒤 연인이 겪게 되는 시련을 책임져본 역사가 없었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잔혹한 사건을 방관하지는 못했다. 그는 불운한 옛 연인 칼리스토와 그의 아들을 하늘로 올려보내 별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 남자

 

 

슬프게도 헤라는 좋은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어머니라는 역할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로서의 역할이었다. 헤라와 같은 성향의 여성에게 자식은 남편을 위한 선물이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구성물에 불과하다. 남편 제우스도 헤라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헤라의 자식이 제우스와의 사이가 아닌 그녀 혼자 낳은 자식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또한 헤라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식에게는 자신의 사랑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헤라는 헤파이스토스를 낳았을 때 아들이 불구의 추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올림포스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망망대해에 던져진 갓난아이를 바다의 님프 테티스가 거두었고,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많은 헤파이스토스는 양어머니를 위해 장신구를 만들어주었다. 헤라는 테티스에게 아름다운 장신구가 어디서 난 것인지 물었고, 그것이 낳자마자 내다버린 못난 아들의 솜씨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헤파이스토스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헤라가 다른 아들 아레스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 아레스는 전쟁의 수호신이지만 성격만 터프했지 실력은 출중하지 못해서 심심찮게 패하곤 했다. 헤라는 아레스가 다른 여신이 낳은 자식(특히 아테나 여신)과 비교당할 때면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아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거나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여자의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라도 헤라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는 기이할 만큼 냉담하다. 제우스를 남편으로 둔 헤라에게 그 어떤 자식도 남편보다 위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녀는 자식들에게 큰 가치나 기대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자식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헤라는 신화 속에서 어떤 다른 신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특히 여신들과의 관계는 더하다. 헤라와 같은 여성에게 여자의 적은 여자다. 내 남편이 홀릴 가능성이 있는 매력적인 젊은 여자는 모두 잠재적으로 나쁜 년이다. 헤라에게는 남편 제우스 외에는 어떤 존재도 중요하지 않았기에 남편 말고는 누구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헤라가 남편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했다.

 

 


<렘브란트,  헤라 여신>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는 헤라 여신을 세속의 군주와 같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보관을 쓰고 여왕의 홀을 쥐고 호화로운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해 보인다.

 

 

헤라는 제우스와 얽힌 사건에서만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니 실상 그녀는 한번도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셈이다. 일부일처 결혼제도의 화신이었던 헤라, 그녀가 치열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결혼제도는 제우스를 위한 것이었다.

 

 

 사랑의 전속계약

 

 

다양한 사랑법 중에서도 하필이면 우리는 헤라의 사랑법이 가장 지배적인 사회를 살고 있다. 한마디로 사랑의 전속계약이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적 권한을 가진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인정하는 것이 특징인 일부일처 방식.

 

 

인류학자들은 결혼형태의 변화를 두고 모계혈통 중심의 일처다부제에서 일부다처제로 변화했으며 근대에 들어서야 일부일처제도가 확립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즉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의 결합이 최신식의 발전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제우스가 그들의 헤라 몰래 바람을 피우고 수많은 헤라는 남편을 지키려고 몸부림친다. 그뿐인가. 전통적인 성역할이 해체되면서 가정을 지키는 남성-헤라와 일부일처의 속박에서 빠져나온 여성-제우스의 경우도 늘어난다.

 

 

일부일처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믿음에 새삼스레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욕망을 무시한 실현 불가능한 제도이든, 평등을 가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성적 차별을 전제로 한 불공평한 제도이든, 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으로 결속된 두 사람 모두가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본인이 사랑의 전속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믿지는 말자. 애인이 있든 없든 연휴는 다가오고 자식을 낳든 안 낳든 교육세는 내야 한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죽을 만큼 노력해도 상대는 이를 외면하고 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아내라는 지위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전속계약이 영원불변할 것이라 믿는 여자는 다가오는 위기를 억지로 외면하다 예상 그대로의 파국을 맞는다. 그리고도 계약을 위반한 남자와 헤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오른빰을 맞았을 때 왼뺨까지 내주는 박애의 마음은 아름답지만 그러다 뒤통수까지 맞으면 다시 못 일어나는 수가 있다.

 

 

 

 

 신들의 사랑법/ 이동현/오푸스/14,000원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