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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냄비근성에 관한 소고

 

2009.10.06.화요일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들어가며.

 

우리는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참 열심히도 사용한다. 네티즌을 욕할 때, 한국인의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욕할 때, 어차피 우린 안 될 거야라고 자학할 때. 어느샌가 이 냄비근성이라는 단어는 한국인의 국민성이자 한국사회의 큰 병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지만, 별다른 대안도 대책도 없이 냄비근성 사라져야같은 공허한 표어만이 사회 곳곳을 배회할 뿐이다. 오늘은 냄비근성에 대해서 짤막하게 한 마디 하려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난 냄비근성이 100%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현재 한국(특히 넷상)의 냄비근성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고 본다.

 

 냄비의 목적과 효율성.

 

난 나이 먹을만큼 먹고 아직 대학 주변에서 빌빌대는 고학생(것도 유학생)이라, 냄비라고 하면 라면 정도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마지막으로 생일에 미역국 먹은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나는구만. 독자제위, 부모님께 효도들 하시라). 고로 오늘은 라면 끓이는 냄비를 기준으로 썰을 풀어보자.

 

독자제위가 라면을 먹으려고 냄비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궁극적인 목적은 라면을 먹어 허기를 채우는 것이고, 좀더 거창하게 이야기 하자면 신체에 영양소를 공급해 개체보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일 테다. 그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라면을 먹어야 하고, 라면을 먹을려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조리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물을 끓여야 하는 거다. 간단하지? 

 

역산하면 물을 끓인다는 목적 - 라면을 조리한다는 목적 - 라면을 먹는다는 목적- 개체를 보존한다는 목적이 순차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실로 아름다운 삶의 단편이지 아니한가.

 

 

자, 그렇다면 당면한 물을 끓인다라는 칸트적 정언명령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 열이다. 냄비를 가열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럼 지금부터 이 냄비라는 물건을 잘 살펴보자. 냄비는 내가 위에서 열거한 일련의 과정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 도구인 냄비가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빨리 가열될 것. 그리고, 조리가 끝나면 빨리 식을 것.

 

이 두 가지다.

 

빨리 가열될 것부분은 독자제위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면 먹을려고 2박 3일을 기다릴 사람은 없으니. 하지만, 왜 빨리 식어야 하는지는 좀 의아해 할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근데 말이다.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독자제위 가정의 냄비가 한 번 가열되면 식을때 까지 상온에서 48시간을 식혀야 하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으면, 그 냄비 과연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애들 있는 집에선 아해들이 냄비 만져서 화상 입을까봐 이틀 내내 조마조마 해야 하고, 어쩌면 급속냉각으로 냄비를 식혀주는 기계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그걸 돈 주고 사야하는 기분은 어떨까?

 

냄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식지 않으면, 사람 입장에선 그만큼 불편한 것도 또 없다. 

 

게다가 더 짜증나는 부분은, 시간이 많이 걸리던 적게 걸리던 결국 냄비는 언젠가는 식는다는 거다. 영원히 식지않는 냄비가 있다면 그걸로 가정용 발전소라도 건립해 볼텐데, 그건 또 아니라는 거다. 언젠가 식을 거라면, 빨리 식어주는게 서로 고마운 일이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언젠가 잊을 것이다.

 

끔찍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때 마다 우리는 분노한다. 난 이 분노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분노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나는 분노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의롭지 않음을 보고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것이 안 되어서 전과자를 국가원수로 삼는 우를 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언젠나 항상 분노하고 있을 수는 없다. 매우 잔인하고 가슴아픈 말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모든 범죄에 대해 매일매일 다시 생각하고 분노하며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그 사실을 잊고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것이 비롯 권장할 만한 미덕은 못되더라도, 나쁜 일이거나 잔인한 일이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렇게 살 수 없도록 태어났는데 어쩔텐가. 사람은 하루 24시간, 분으로 환산해서 1440분이라는 효용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룻동안을 잠 한 숨 안자고 밥먹는 시간도 다 가동해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분노하고 게시판에서 범인을 까는데 쏟아붓는다 쳐도, 1분당 사건 하나씩 쳐서 하루에 사건 1500개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거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범죄가 2000개도 안될 것 같나?

 

정말 도저히 용서못할 범죄 10개로 분노의 대상을 한정한다 치자. 아침에 일어나서 10개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 곱씹고 분노하고 화를 내면서 생활을 시작하면, 본인은 둘째 치고라도 가족이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나? 아마 한 달도 못가 본인이나 가족이나 한 두 명은 전문의와 상담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될 거다.

 

냄비근성, 냄비근성 하지만, 가족과 친구가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사건에 대한 분노를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 잔인한 말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목적과 효율.

 

다시 라면 끓이는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까 나는 라면을 끓이는 것을 꽤나 거창하게 개체보존 욕구까지 들먹이며 설명했다. 근데,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이런 궁극적인 목표와 이를 위한 당면 목표설정이 아닐까 하는것이 내 주장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해서, 나는 딱 독자제위만큼 분노한다. 굳이 어린이를 대상으로한 이라고 범위를 축소할 것도 없이, 성범죄 전반에 대해 난 좀 과하다 싶을 만큼 경멸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욕망이라고? 요즘처럼 야동 구하기 쉬운 세상이 언제 있었나. 대리만족 느끼고 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남의 인생 망가뜨리나. 과격한 주장이라는 건 알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자면 난 강간죄의 법정 최고형에 사형을 넣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런 내 감정이 많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난 이너넷 뉴스에서 강간사건 타이틀만 봐도 10분 정도 분노에 치를 떠는 넘이다. 피해자가 앞으로 짊어져야할 고통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런 분노도 너무나 가벼워 보이지만.

 

그리고 나의 이런 분노는 결과적으로 이야기 해서 다 쓸데없는 짓이다. 

 

불 위에 냄비를 얹고 물을 붓지 않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니터 저편에서 부들부들 떨건 말건, 가해자는 가석방 되어 사회로 나가 또 다른 피해자를 찾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피해자 찾아가 보복하는 넘도 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내가 물건너 나라에서 열을 받건 세상을 비관해 자살을 하건, 가해자 입장에서 보면 가소로운 일일 것이다. 

 

 

반인륜적인 범죄가 보도될때 마다 출소하면 두고보자느니, 인적사항 까발려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느니 하는 글들을 본다. 그런 분노가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실례되는 말로 다 공허한 짓이다. 내가 알기로 남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기 위해 스스로 범죄자가 될 만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으며, 또 그 수단이 또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면 그다지 권장할 만한 일도 못된다. 톡 까놓고 이야기해서, 물 안 붓고 냄비만 가열하는 꼴이란 말이다.

 

분노는 정당하다만 그것이 공허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문제라면, 해결책이 한가지 있기는 하다. 분노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끔찍한 성범죄가 발생했다.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분노의 궁극적인 대상은 성범죄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성범죄 근절. 너무 거창하다고? 거창하지 않은 목표밖에 설정할 줄 모르는 사회는 결국 퇴보할 뿐이다.

 

성범죄 근절이 궁극적인 목표라 치자. 여기서부터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수도 라면을 먹을수도 있는 문제니까. 누군가는 범죄자 검거율을 문제삼을 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재범율을 문제삼아 형 집행/개도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건, 그러니까 사회 전반의 반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죽도밥도 안되는 결론도출이다. 누가 도덕교과서 쓰라 그랬나. 좋은 소리 늘어놓는다고 사회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배고프면 뭔가를 먹으면 된다는 식이라면 결국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 처럼.

 

가시적인 목표설정이 필요하다. 내가 이번에 문제삼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독자제위와 비슷하다. 저지른 죄에 비해 부과된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거다. 피해 아동이 8살인데 12년형이라니. 피해자가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끔찍한 장애를 안고 사회로 나아가려 할 때, 가해자도 사회로 복귀한다는 결론에 쉽게 수긍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형벌이 지나치게 가벼워, 국민의 법감정에 부합하지 않는 결론이 나왔다. 이것을 고치고 싶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판결을 내린 판사를 욕 할 수는 없는 문제다. 1심에서 12년형이 나오자 검찰은 항소하지 않고 가해자만 항소를 했는데, 검찰이 항소하지 않은 이상 이보다 높은 형을 부과할 수는 없으니까(형사소송법이 그렇게 되어있다). 그럼 대안이 몇가지 있긴 하다. 입법과정에서 좀 더 중형을 가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거나, 아니면 재판부가 검사의 항소여부와 관계없이 형을 결정할 수 있도록 형사소송법을 고치거나, 아니면 (이건 좀 과격한 방법이다만, 일본에선 시험적으로 운영하려고 하는 제도이긴 하다) 시민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검찰의 항소여부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도록 제도를 보완하거나. 

 

마지막 방안이 과격하다는 이유는 중세식 마녀재판의 재현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국가를 대신해 이 넘은 범죄자이니 이런이런 형벌을 부과해 주시오라고 재판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검사만이 가지고 있다. 검사가 항소 안하면 그걸로 끝인 거다.

 

이걸 시민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다수결이나 만장일치로 그래도 항소해 씨바야 그러면 검찰은 싫든 좋든 항소해야 한다는 식의 제도인데, 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 시민이 것도 10명 전후의 다수결로 기소/항소 여부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다는 건 솔직히 좀 위험하긴 하니까. 버뜨, 논의해 볼 가치는 있다고 난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딴지라 해도 독자제위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 까진 기대하지 않는다. 민주사회란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 다 각자 자신의 양심과 정의감이 있을 테니, 어떤 대안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건 그건 자유다. 밥을 먹던 빵을 먹던 떡볶이를 먹던.

 

문제는, 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난 다음에 식어달라는 거다. 라면은 먹고 난 다음에 설거지를 해야할 것 아닌가. 한국식 냄비근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빨리 식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열을 받았을 때도 그 열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목표가 달성됐다면, 각자 양심에 따라 죄책감이는 부채감이든 성취감이든 느끼면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나가면서

 

이번 사건이 결국 분노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망각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냄비는 언젠가 반드시 식고, 또 식어야 한다. 우리는 언젠가 잊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때 그 사건이라면서 티비에서 특집이라도 해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살면서 이번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일 없이 또 일상에 파묻힐 지도 모른다. 살인의 기억이 아닌 살인의 추억이 되어버린 다른 사건들 처럼.

 

하지만, 살면서 언젠가 이번 사건을 떠올리는 날이 왔을때, 그때도 똑같이 분노만 하고 넘어갈 거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그래도 그 사건때 여론이 잘 조성된 덕분에 제도가 개선되서 이젠 비슷한 억울한 사태가 발생할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정도의 대사는 읊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다음 세대를 위해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해 놓아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할테고.

 

 ...원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여론을 수렴하고 혹은 선도해서 제도를 개선하는 일은 정치가가 앞장서서 해야하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한번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좋지 않으니 말이다. 저런 밥버러지들 선거로 뽑아준 우리를 탓 할 밖에.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