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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목요일
신짱


 


2003년,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37년만의 귀국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는 열흘 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한국사회는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친구들조차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  <경계도시2> 시놉시스



국경선이 다가오자


내 가슴은 더 세차게


고동치고, 눈에서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  하이네



 




여기 37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은 한 사람이 있다. '세계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바람을 가슴에 묻고 유학길에 오른지 37년,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이제는 한줌 흙이 되어버린 고국의 아버님 영전에서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자. 유년기 콧잔등을 간지럽히던 비릿한 바다내음과 뒷동산 이름 모를 풀의 쌉싸래한 맛을 37년이 지나서도 잊을 수 없었던 자.


 


여기까지만 보면 <경계도시 2>의 내러티브는 냉전체제의 희생자로 수십년간 디아스포라로 떠돌 수 밖에 없었던 어느 지식인의 감동적인 고국방문기가 될 운명이었다. 다소 진부해보일지언정 분단이라는 천연의 플롯 속에서 진동할 수 밖에 없는 대다수의 한국인들로서는 쉽사리 외면할 수 없는 내러티브...


 


실제로 '간첩 송두율'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냉전 컴플렉스에 대해서는 <경계도시 1>에서 어느정도 드러낸 바 있기에, 감독은 <경계도시 2>를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울 예정이었다. 3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재독철학자 혹은 '경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모습으로.


 


그러나 이 진득한 철학자의 관찰대상으로만 머물러 있기에 한국사회는 너무나 다이나믹했다. 한국사회는 관찰대상에만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감히 그를 관찰대상으로 삼았던 자를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다.


 



 


'간첩 김철수', '북한 노동당 입당'. 이보다 더 수구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발정을 유도할만한 언명이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될까. 언명이 섹쉬할수록 명목상 그를 보호해야 할 진보시민세력의 부담도 함께 커져갔다.


 


결국 <경계도시 2>는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또 한번 진부한 내러티브로 빠질 위험에 처해졌다. 60년 냉전의 폐해와 레드 컴플렉스라는 광기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던져진 송두율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


 


<경계도시 2>가 여기에 그쳤다면, 그래서 '수구꼴통의 색깔론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후진 한국사회'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만'한 영화의 클리쉐에 머물렀다면, 이 영화의 가치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길을 간다. 아니 현실이라는 작가가 이 영화를 다른 길로 강제했다. 그리고 이미 2003년 무렵 촬영을 마친 감독은 6년간의 편집작업(익히 예상할 수 있듯 물리적인 편집기간이라기보다는 고뇌의 시간이었을)을 거치며 현실이라는 작가에 순응하는(그러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길을 택한다.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던 수구세력의 반동. 그런데 그 수구세력이 딛고 선 분단과 냉전이라는 지반이 생각보다 강고했음이 송두율의 귀국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벗'들은 물론 심지어 <경계도시 1>의 감독 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드러난다.


 


송두율은 실제로 '김철수'였으며 '조선노동당원'이었다.


 


위의 문장을 읽고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그 의미를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 독자가 있다면 그대야말로 진정한 쿨가이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벗'들은 그렇지 못했으며, 감독 역시 그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부여된 가명과 형식적인 통과의례. 여기서 실체적 진실이란 시니피에는 증발해 버리며, 오직 그에게 가명을 부여하고 당원으로 입당시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시니피앙만 남는다. 기막힌 탈구조주의식 역설이랄까.   



문제는 점점 현학적으로 변모해간다. 철학자 송두율의 스승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필생의 화두로 붙잡았던 '의사소통의 문제'가 전면으로 부상한 것이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듯,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당장 다음 해 있을 총선과 진보시민세력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걱정하는 그의 '벗'들이 그에게 전향 아닌 전향을 '강요'하는 장면이다. 어느새 송두율은 - 그의 사상과 신념과 행동이 아닌 - 그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의 진보시민세력에게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운동의 대의와 지혜로운 처신과 전략적 후퇴와 국민감정의 고려까지. 어지러운 언사 속에 송두율은 고립된다. 그날 그는 저 가망없는 수구꼴통들의 색깔 공세를 원망했을까. 적어도 내가 본 모습은 그게 아니다. 카메라에 비친 송두율은 자신을 도와준 '벗들'의 안위와, 평생을 지켜 온 자신의 신념과 양심의 자유 중에서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한 가련한 비극의 주인공일뿐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간계에 빠진 한 인간', '진보시민세력의 자기 성찰'이란 테마를 유추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 해 보자.


 


이 영화가 송두율에 대한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터뷰는 영화 속에서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추정컨대 수많은 인터뷰를 했을 테지만, 대략 6년간의 편집작업 끝에 완성본에서는 단 한장면도 살아남지 못했다. 딱 한번, 사건이 한창 진행중일 때 감독은 그와 독대할 기회를 잡지만 '간절히 침묵을 원하는' 그의 피로한 표정에서 더이상 카메라를 들이대길 포기한다.


 


영화 속에서조차 송두율은 철저히 객체로서 사건 속에, 맥락 속에 휘둘릴 뿐, 그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기회는 없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조차 송두율을 타자화 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6년간에 걸친 감독의 고뇌는 이러한 섣부른 예단을 허락치 않는다.


 


냉혹한 현실론을 들이미는 그의 벗들에게 그와 그의 아내는 '경계인'으로서의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항변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북한사회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주장했던 그의 학문적 양심의 문제이자, 37년간을 외국에 살며 남과 북 모두에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남북의 공존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그들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제와서 그들에게 '사과'와 '전향'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삶 전체를 부정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문제는 경계인적 입장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한국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그 입장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법원 앞에서 익숙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우익 청년들의 광기어린 모습이든, 운동의 대의와 유연한 전략적 사고를 논하는 그의 벗들이든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빨갱이적이던, 지나치게 순진하던,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송두율의 목소리가 존재할 공간은 없다.


 


영화 속에서 송두율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된 까닭을 나는 여기서 찾는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불능 상태.


 


북한과 '내통'한 그는 한국사회에서 괴물이며, 괴물과 말을 섞는 사람은 없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괴물' 송두율이 스스로 자신이 괴물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그가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데 초점을 맞춘 듯하다. 계몽적인 논평을 자제하는 대신, 카메라는 쉴새 없이 몰아치는 사건의 추이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이 마녀가 아님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납득할만한 선택이다.  


 




냉전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과 그의 희생자인 송두율, 그리고 그를 돕고자 했던 그의 벗들마저 국가보안법이 전제하는 냉전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우리는 <경계도시2>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후진 한국사회', '중간을 용납치 않는 극단의 폐해', ' 개인에 대한 집단의 린치', '여전히 굳건한 냉전체제'... .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분단에서 기인한 한국사회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차라리 문제가 쉬울 수도 있겠다. <경계도시 2>가 던지는 질문을 나는 좀더 근본적으로 받아들인다. 의사소통 가능성의 전제와 조건이랄까. 송두율의 스승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평생을 부여잡았던 화두 말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글을 마치도록 하자.


 


영화를 보고 나서 같이 봤던 지인들과의 대화는 예의 의사소통 문제에 집중되었다. 나는 영화와 상관 없는 개인적인 궁금증을 토로했다. 송두율의 욕망과 당시 부정적이었던 여론의 실체가 무엇일까에 대한.


 


인간 역시 동물인 한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회귀본능은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송두율은 스스로를 경계인으로 규정짓지만, 그것이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특권처럼 비춰지지 않았을까. 의무병역의 불합리를 주장하는 어느 누구도 대놓고 병역의무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 수는 없다. 논리의 정당성을 따지기 전에 병역 의무의 불이행은 그 자체로 특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냉전체제의 종식과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어떤 대한민국 국민도 북한당국에 의해 가명을 부여받고 조선노동당원이 되었으면서 무사하기를 바라지는 못할 것이다.


 


새삼 기존의 논지를 뒤엎고 송두율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냉전 컴플렉스 뿐만 아니라, 대중의 기저에 놓여있는 '불평등'에 대한 민감한 촉수가 당시 부정적 여론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게 아닌가 추측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경계도시 3>가 나온다면, 이 문제가 다루어졌으면 한다. 타자에 대한 배제는 그 자체로 악덕이지만, 그 근거를 따져물을 수는 있지 않을까.


 


- 추신


 


영화가 영화인지라 글이 좀 많이 무겁다만 실제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다.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1시간 40분 정도의 러닝타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역시 다이나믹 코리아의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이런 영화를 보다 많은 사람이 봐야 할텐데, 알다시피 독립영화다 보니 일반관객들이 접하기가 쉽지 않다. 배급사에 문의하니 아직 개봉일정은 정확히 잡힌 바 없고,(3월말에서 4월 경 개봉 예정) 마케팅 차원에서 이런저런 시사회를 많이 개최할 예정이란다.


 


시사회 일정이 잡히면 저번 연극 <낮병동의 매미들>처럼 무료시사회 이벤트를 추진해 볼 생각이다. 1월경이 될 듯 싶은데, 의향이 있는 독자들은 덧글로 의사표시를 해주시기 바란다. 대충 숫자가 파악되면, 가능한 한도 내에서 넉넉히 준비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