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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울

2009-12-1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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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추천0 비추천0

2009.12.17.수요일


산하


 


바야흐로 망년회 시즌이다. 성미가 급해서인지 배려심이 많아서인지 “12월은 다들 바쁘니까” 11월부터 망년회 연다고 설쳐 대는 모임이 눈에 띄더니 이번 주 퇴근 길 회사 앞 술집은 온통 만원사례다. ‘술자리보다는 개성적인 망년회’가 유행이라는 기사는 그야말로 신문에 날 일이었나 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주 내내 바쁜 일과를 쪼개며 술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아내의 지청구를 무지하게 들었다.


 



 


그 크고 작은 모임에서 오가는 정담 가운데 반드시 내 몫이 되는 질문은 “너 요즘은 어떤 프로그램 하니?”이다. 햇수로 5년 동안의 망년회에서 나는 짐짓 세상에 모든 고뇌를 망토로 삼은 듯 인상을 구기며 “긴급출동 SOS 24"라는 동일한 대답을 해야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어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119 소방대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프로그램이냐는 질문도 해마다 받아 왔으니까. 나는 몰라도 된다며 웃으며 넘겼다. 워낙 TV랑 친하지 않다며 미안하다고 겸연쩍게 머리를 긁는 사람들에게 섭섭할 까닭이 무엇이랴. 그런데 올해 어느 망년회에서 서운하다 못해 부아가 치밀어 눈앞의 사람들에게 망년회답지 않은 열변을 토해 대는 통에 분위기를 망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난 그런 프로 모르겠는데?” 하는 무심함 때문도 아니요, “뭐 그런 프로그램을 하느냐?”는 멸시 탓도 아니었다. “야 참 힘든 프로그램 하는구나.” 하는 따스한 위로 다음에 꼭 따라붙는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그 프로 안 봐. 우울해져서.”


 


오해 없기 바란다. 시청률이 떨어질까 봐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보든 안 보든 시청률에는 신종 플루 바이러스의 무게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기실 나는 해마다 저 멘트를 들어 왔었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으며 심지어는 “나도 솔직히 안 봐” 하면서 맞장구까지 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왜 그리 열을 냈을까.



그것은 그들의 말에서 우울함에 대한 회피 아닌 외면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우울해지기 싫은 것이 아니라, 우울한 현실을 네 삶에 개입시키기 싫어서가 아니냐는 심술궂은 눈 꼬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치켜 올라갔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질환을 앓으며 바퀴벌레가 넘치는 방에 자식들을 가둔 채 세상과 문 닫고 살아가는 여자를 굳이 지켜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이들만 데리고 맨발로 도망나온 이이며, 그 막막함 속에서 병까지 얻은 것이라면 당신에게도 그 불행의 일말의 책임이 있다. 가정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둔감한 공화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갈빗대가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학대받은 지적장애인의 비참한 모습을 구태여 지켜보지 않으려는 심경은 안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방치한 것은 그 ‘노예’의 주인만이 아니다. 당신 역시 지적장애인에게 비정하고 무심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비껴가기 어렵다.


 



 


언젠가 김 양식장에서 노예 노동을 하던 지적 장애인들을 구출했을 때, 그들 중 몇 명은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자유는 또 하나의 지옥이었던 것이다. 


 


참담한 현장을 일삼아 쫓아다니는 나이지만 며칠 전 철도 파업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무력감은 그 어떤 경험과 기억에 견주어도 크게 뒤질 것이 없었다. 파업의 이유를 따지기 보다는 파업의 불편함에 우울해 할 뿐이었던 ‘선량한 시민들’은 그렇다고 치고, “안정된 직장에 다니면서 왜 파업이냐?”고 대통령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을 보고 그 느낌은 절정에 달했다. 불안정한 일자리, 즉 비정규직들은 노조를 만들기조차 어렵고, 화물연대 같은 경우는 죽어도 당신들은 사장님이니 파업 못한다고 우기고, 경제가 어려워서 파업하면 안되고, 가뭄이 심한 때에도 파업은 언감생심인데, ‘안정된 직장’의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안정성’ 때문에 눈 뜨고 보아 줄 수 없다니, 대한민국에서 파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파업해도 무방한 때는 언제일까.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불볕 더위에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도 우리는 과연 우울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그런 뉴스 안 봐. 괜히 우울해지니까”라고 퉁을 칠 수 있는 것일까.


 


우울해질까봐 험한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내 친구들은 목불인견의 참상이 어떻든 “TV에나 나올 일”로 치부하는 것이 마음 편했을 것이다. 내 월급이 얼만데 연봉 얼마짜리가 파업을 하느냐고 눈 부라린 아르바이트 대학생에게 파업은 TV에나 나올 일이며 결코 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취재를 끝낼 때마다 다음과 같은 한탄을 들었던 나로서는 그 속이 편안하지 않다. “이런 일은 TV에 나오는 줄 알았지, 우리 이웃에서 (또는 내 집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는 절대로 우울하지 않을 것이고, 우울한 일이 닥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것들은 TV에나 나올 일이라고 자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우울함에 나는 어떤 책임도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우울한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울한 현실에 대한 망각이다. 남이 왜 우울한지 이해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게으름이다. 그리고 저 일은 절대로 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