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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7.수요일


아홉친구


 


2 12, 설 연휴 전날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표를 예매하기로 했다. 집에 인터넷도 있는데 왜 굳이 예매를 하러 나갔느냐 물으면, 음 경위가 좀 복잡하지만,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아닌 데다가, 통장에 들어오는 액수가 뻔한 상황에선 카드가 발급되지 않더라. 그렇다고 백수건달도 아닌데, 재산세 안 내는 것도 아닌데.


 


회사 댕길 때 만들었던 카드 죄다 뽀갤 적에는 신용카드 한장 발급받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이상하게도 필자는, 금융 관련된 쪽과는 항상 궁합이 좋질 않아서, 없는 자 취급 당한 경험이 제법 된다(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시는 은행 문을 밟기 싫어진다). 게다가 엄연히 그쪽에 수수료 갖다 바치는 고객 입장에서 뭐 어떻게 좀 안되겠습니까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다시 신용카드 신청하기가 싫은 게,


하아그러니까고객님, 신청하신 건 말인데요그게 저기네네, 요즘 기준이 까다로워서 말입니다뭐 고정수입도 없으시고


같은 말을 또 듣고 싶진 않다는 거다.


 


대신에 나름 꼿꼿하게 신용카드조차도 거부하며 산다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로 했다.


어지간한 좌파들도 이보다는 금융 자본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을텐데. 음화화. (사실은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편한데 말이지. TT 누구 빠삭한 사람 없낭)


 


각설하고.


지하철에서 경부선 터미널로 가는 통로에서, 익숙한 풍경이 있었다. 서너 명이서 타블로이드 신문 같은 걸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처음엔 민노당 같은 무슨 진보 시민단체에서 나온 줄 알았다.


 




 


한 부 받아 보았다 



 



으음? 무슨 단체지?


 



 


어엉? 뉴라이트가 세종시 국민투표를 지지한다고?


 


혹시 이거 패러디 뉴스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을 완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어쨌든 위 찌라시는 뉴라이트에서 나온 건 확실하다. 뒷장을 보면 익히 알던 이미지 그대로였으니까.


 




독자들의 안구 및 정신건강을 위해 확대 기능은 생략한다.


듣도보도 못한 분의 글이 실려 있었다는 정도.


 


필자는 세종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일은, 줄곧 가카와 반대 진영의 주장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세종시를 국민투표에 부쳤다가 패하는 날엔, 그날부로 가카의 영도력은 땅에 떨어질 터이고, 지방선거에 끼칠 영향도 불 보듯 뻔한 일. 한나라당으로선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너무 생각이 짧았다. 아무래도 세종시 국민투표 건에 대해서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번 표로 정리해봤다


 




































































국민투표 찬성


국민투표 반대


애매함


청와대


가카 "수정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


(설날 특별 연설)


대변인 "정부 입장


달라진 것 없음"(2.8)


국무총리


"국민투표 검토한 적


없음" (2.8)


친이계


심재철 "4월에


국민투표"(2.7)


정병국"국민투표도


하나의 방안"(2.8)


친박계


현기환 "무책임한


발상"(2.8)


민주당


우윤근 "국가안위


상황이 아니며


기존의 헌재 결정을


무시하는 처사"(2.8)


자유선진당


대변인 "국가안위와


무관, 헌재결정


무시"(2.8)


민노당


아직 논평


없음


진보신당


아직 논평


없음


여론조사


메트릭스 조사: 찬성 60.3% (매경, 2.12)


리얼미터 조사: 찬성 50.7% (경향신문, 2.12)



 


여기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지점을 다시 정리.


 


1) 청와대와 친이계 의원들은 왜 입장이 다른가?


2) 청와대의 국민투표 반대 근거는 친박계, 민주당 등과 같은가?


3) 뉴라이트연합의 찬성 근거는 친이계와 같은 것인가?


 


최소한 2번 문항의 답은 확실하다.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국민투표 찬성/반대의 논리에는, 필자가 알고 있는 현 정권의 정치적 심판성격 이외에도, 다른 근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상에서 1번의 이유가 발생한다. 친이계 의원들이 현정권의 중간평가를 위해 국민투표를 하자고 할 리가 없으니.


 


이 점에서는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의 반대 논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똑같이 현재 상황은 헌법에 명시된 국가안위 상황이 아니며, 대의민주주의 절차를 파괴하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친이계의 국민투표 제안을 비판했다.


 


이걸 반대로 뒤집으면 친이계의 논리가 될 것이다. 즉 세종시 논란은 국가 안위를 뒤흔들고 있으며, 대의민주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끼리의 조정을 통해서는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이란 얘기다.


 


친이계의 현 상황에 대입해보면, 세종시 논란 때문에 한나라당이 분당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박근혜는 물론이고 직접 상관인 가카께서도 도대체 물러설 기미가 안 보이니, 자체적으로 해결할 방안이 없는 거다. 따라서 가카든 박근혜든 승복하고 물러날만한 근거가 필요하니 국민투표를 하자는 소리로 들린다.


 


물론 청와대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의원들로서도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긴 마찬가지다. 안 그래도 5월이면 죽은 공명과도 같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 정국이 예정돼 있는데, 그에 앞서 한나라당이 자체 분열될 지경에 이르면, 거기다 혹여 야권대연합이라도 정말 되는 날엔 지방선거는 끝장이다. 그러면 국민투표 안했더라도 바로 레임덕 이어진다. 가카가 이 다급함을 알고 계시기나 한 걸까, 친이계 의원들의 걱정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이 걱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주간조선 기사다.


[6·2 지방선거] 단일후보, TK 제외한 전국서 앞서 (원문링크)


 


친이계가 애써 국민투표가 명시된 헌법 제72조의 문장을 들먹이는 것은, 국민투표를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지 말아달라는 대외적 변명이기도 하겠지만, 가카의 진노를 막아줄 방패가 필요해서가 아닌가, 그렇게도 보인다. 안스럽기까지 하다. 가카는 줄창 소통을 강조하셨는데 친이계와도 소통이 잘 안되셨던 모양이니.


 


그러니까 필자처럼 국민투표를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성격으로 해석하는 것을 정치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친이계는 굳이 이를 법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말장난이다.


정치적으로 필요하지 않은데 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면 그게 법대연구실이지 국회겠냐. 친이계가 주장하는 국민투표의 목표가 세종시 논란의 해결인지, 아니면 가카와 박근혜의 화해인지 모를 바보도 있나.


 


뉴라이트의 국민투표 찬성 근거를 보자. 뉴라이트의 정치적 포지션이 친이계-친박계-자유선진당에 넓게 분포해 있음을 감안하면, 국회의원이라고 뽑아놓은 것들이 끝없이 분쟁만 일삼고 있으니 열받아 죽겠는 것이다. 진보진영이야 제 안에서 노빠 광빠 주사 PD로 나누는 지 모르지만, 뉴라이트 입장에선 그냥 언제든지 뭉칠 빨갱이들로 보일테고, 그보단 제 안에서 친이 친박 중도 소장 몽()계 이회창으로 나뉘는 분열상을 봉합하는 게 최우선 과제일 터다. 지금 이따위여서야 어디 맘놓고 비빌 구석도 없다. 국민투표로 그걸 끝내겠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게 당연하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등이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취지는 이 선상에서 우선 이해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통합을 위한 국민투표를 찬성해줄 이유가 뭔데? 그런 거다.


 


친이계의 주장을 인정하는 선에서, 즉 법적 측면을 고려하여 국민투표의 찬성/반대 논리를 정리한 기사가 조선일보에 나와 있다. 사실 법적 측면을 따로 볼 이유는 하등 없으니, 조선일보가 이렇게 다뤄주는 것 자체가 이미 왼손은 거들 뿐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어쨌든 글 자체는 무미건조한 비교 기사였다.


(원문링크)


 


기사를 바탕으로 필자의 관점을 조금 보태어 표를 만들어 보았다.


 

























 


국민투표 찬성


국민투표 반대


법적 측면의 쟁점               헌법 제72: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심각한 국론분열 상황도 국가 안위로 폭넓게 해석할 수 있다. 국가 중요정책 결정에 있어 국민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신평 경북대 법대 교수)


세종시는 외교, 국방, 통일과 비등한 수준의 주요정책이 아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억지논리에 불과하며 대의민주주의라는 기본 통치구조 골격을 파괴한다.(허영 헌재연구소 이사장)


위 논리를 지지하는 정치집단


친이계, 뉴라이트


민주당, 자유선진당, 친박계


정치적 측면의 쟁점                  국민투표는 세종시 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가?


세종시 경우 이익은 특정지역에 집중되는데 비용은 전국민에게 분산되는 프로젝트이므로, 국회가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할 수 있다. 외국에서도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국민투표가 빈번하다.(신도철 숙대 경제학 교수)


현대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수적 우세인 의견이 집단 의사를 결정하는 단순한 체제가 아니다. 국민투표는 지역 분리현상을 심화시킬뿐더러, 패한 집단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민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 (이현우 서강대 정외과 교수)


위 논리를 지지하는 정치집단


재야


청와대



 


위 논리를 지지하는 정치집단부분은 필자가 만들어 넣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국민투표에 현정권 중간평가의 성격이 있다고 하면, 민주당 등의 야당에서 옳다구나하고 받아들일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이 물음의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는, 기존의 여야 구분과는 다른, 새로운 경계선이 필요하다. 그건 기성정치와 재야, 혹은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구분 같은 것이다.


 


세종시 문제와 같은 상황을 국민투표로 푼다는 거, 이 자체가 이미 국회의원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근거이지 않은가. 그런 거 조정하라고 세비 타먹는 게 국회의원이지 않나. 만약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지면? 또 국민투표를 요구하면?


 


그런데 예전과 달리, 국민투표가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데서 기성 정치권의 고민이 발생한다. 지금도 기존의 투표용지와 도장찍기를 하고 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빠른 시간에 개표 절차가 진행된다. 엄청난 시간과 비용의 절감이다. 만약 전자투표를 한다면 이 시간과 비용은 더욱 절감된다. 한국의 경우 기술적 여건은 오히려 차고 넘치는 형국이다. 이미 복잡한 옵션으로 가득찬 대학입시 원서도 전부 인터넷으로 넣고 있는데, 예스 아니면 노를 묻는 지자체 주민투표 정도야 껌이다.


 


또한 국민투표의 전례가 생기게 되면,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주민직접투표로 결정하는 사안이 더욱 많아질 수 있다. 당장 하남시 통합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감이 만연한 상태에서, 자기 손으로 결정짓겠다는 데 발품파는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사람들 많다. 직접민주제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는 1987년에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기성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국민투표가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란 얘기다. 국민투표제가 활성화된다는 얘기는 곧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이유에는 이 논리도 포함돼 있다. 아니, 정치권 전체의 의견이 그렇다고 봐야 한다.


 







연일 치고 받는 세종시 국민투표


김형오 의장 국회서 처리할 문제


매일경제 (원문)


 


김형오 국회의장은 9일 기자단 오찬간담회에서 "국민투표에 반대한다. 찬반 논란이 뜨겁다고 국민투표를 하면 대선을 한 번 더 하는 분위기, 아니면 (한나라당 내) 경선을 한 번 더 하는 분위기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의장은 "대의민주주의 요체는 국가의 주요 현안을 국회에서 처리하라는 것이므로 세종시 문제는 어디까지나 국회에서 처리할 문제이며, 국회에 오면 충분한 토론을 보장하겠다"고 강조했다….


 



 


필자가 국민투표를 지지했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도 있지만, 대의민주주의 체제에 느낀 염증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정당의 하수인 노릇만 하는 현실 정당정치에 대한 지겨움. 아마 필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어쩌면, 뉴라이트의 국민투표 주장에도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지 않을까.


 


조중동도 아직 이 경계선에서는 제스처가 명확하지 않다. 직접민주주의 요구가 높아지게 되면 정보 제공을 담당하는 언론 기관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강화된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직접 조중동 기사 보시면, 대체 국민투표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애매한 뉘앙스를 읽을 수 있다. 눈앞의 상황을 보면 친이계와 친박계 한쪽을 밀어주기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좀 긴 안목에서 보면 대의민주주의의 약화가 언론 자본에 불리하지만은 않은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재야세력(필자와 같은) 입장에서도, 국민투표는 마다할 것이 못 된다. 현 정권의 중간평가가 싫은가? 기성 정당정치의 한계는 이미 지칠대로 경험했지 않은가? 대의제를 바탕으로 한 경상도/전라도 정당의 구도는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하여 아주 요상한 판이 짜여질 지도 모르겠다. 조중동이 국민투표를 부르짖고, 뉴라이트가 그에 부응하고, 필자 같은 무리들이 거기에 찬성하는. 단기적으로는 세종시 문제에 한해 논의되겠지만, 직접민주주의 체제의 강화는 향후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될 숙제일 것이다. 그 와중에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같은 주장을 하는 혼란이 벌어질 지 모른다.


 


결론은, 역시 가카는 시대의 개혁을 불러오는 위대한 영도자라는 것이다. 늘 의도치 않게 그러신다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