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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광장

 

1984년 중국과 영국은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약속을 한 『중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홍콩의 헌법인 『기본법』 만들기에 들어갔다. 이제 곧 1997년이 될 것이고, 그냥 홍콩의 주권을 주고받으면 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역사나 개인사가 그렇게 ‘밋밋하게’ 진행될 리는 ‘절대’ 없다. 역사 공부를 해보면 우리 인생처럼 영원한 평화도 없고, 영원한 전쟁도 없다는 걸 매번 생각하게 된다. 정치가나 각종 조직의 지도자가 연설할 때, 꼭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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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광장

 

1989년,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일이 터졌다. 천안문 광장에서였다.

 

천안문(天安門)은 명청대 황제가 거주하던 공간인 자금성의 정문이다. 반대쪽에는 지안문(地安門)이 있다. 각각 하늘과 땅, 즉 천지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의 문이다. 

 

사실 지금의 천안문 광장도 황성(황제가 거주하는 성)의 일부였는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황성의 많은 부분을 헐어버렸다. 아니 베이징 전체를 헐어버렸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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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자금성

 

황성을 포함한 베이징 전체의 전통가옥과 골목(후통)을 보존하고, 베이징 옆에 신도시를 건설하자는 혜안은 묵살당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개발 논리는 필승하나 보다. 현재 베이징에 남아 있는 전통가옥인 사합원의 수는 원래의 10분의 1 정도라고 한다.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화의 성지 같은 곳이다. 멀리는 1919년 ‘54 운동’, 가깝게는 1976년 ‘45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1989년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학자들은 이렇게 부르지만 중국정부는 ‘정치풍파’라고 표현한다)이 일어났던 곳이다.

 

‘54’로부터 1백 년이 지난 요즘 천안문 광장을 바라보노라면, ‘민주’와 ‘과학’이라는 ‘54’의 아이템이 최근 중국의 정치적인 현실과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났던 두 개의 민주화 운동

 

45 천안문 민주화 운동 

 

1976년 1월 8일 병석에서도 국가업무를 놓지 못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했다. 3월 말부터 군중이 ‘영원한 총리’로 존경받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인민영웅기념비에 화환을 바치고 헌사를 낭송하고 문화대혁명을 비판하고 4인방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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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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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천안문 광장의 인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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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학명 당시 마오쩌둥 옆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인방.

시계방향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훙원,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흑백사진),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이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이들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나는 이때의 시위가 사회주의 30년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 본다. 4월 5일 당국은 새벽에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광장 청소를 했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는 폭동으로 전개되었다. 

 

당시의 당권파인 ‘4인방’은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유혈 진압했다(사상자가 3천 명에 달했다는 비공식 통계가 있다). 당시 부주석이자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은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실각했다.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1989년 4월 15일 ~ 6월 4일)

 

천안문 광장이 다시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9년 봄이었다. 1989년 4월 15일 중국공산당의 전임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전광석화처럼 청산하고 당내 민주화를 추진했지만, 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1987년 숙청되었다. 그 후 2년 만에 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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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

 

바야흐로 개혁개방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균등노동과 균등분배라는 이상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온 나라가 ‘돈맛’에 미쳐 빈익빈 부익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후야오방의 민주화 노력을 기억하는 지식인과 학생들은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을 점거하는 시위에 들어갔다. 5월 13일부터는 단식 연좌시위를 이어갔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국 공식 방문 일정에 들어갔으나, 17일 100만 명이 참가한 천안문의 시위 때문에 일정을 변경하기도 했다.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베이징에 계엄을 선포했다. 중국공산당은 총력으로 대응했다. 

 

보수파의 리더로 꼽히는 리펑(李鵬) 총리가 학생 대표들을 만나 꾸짖는 장면이 방송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리쩌우허우(李澤厚)도 역사를 되돌릴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해산을 직접 설득했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도 천안문광장으로 달려가서 메가폰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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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19일 톈안먼 광장에 나와 시위대를 향해 연설하는 자오쯔양. 바로 옆엔 젊은 시절의 원자바오 전 총리가 있다.

 

“자네들의 생각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제 모든 일을 당과 정부에 맡기고 학교로 돌아가다오!” 

 

우리가 자주 하는 논쟁이 있다. 

 

국민의 의사표시는 어디까지가 정당할까, 시위는 어디까지 해야 하고, 어디에서 끝내야 할까, 어느 정도가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까, 정부는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고 인내해야 할까, 시위 지도부는 언제나 명분과 실리, 이상과 현실의 논쟁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중국공산당과 최고 권력자인 덩샤오핑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마침내 덩샤오핑은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자오쯔양 총서기를 숙청했다. 이어서 6월 4일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온건파의 만류를 무릅쓰고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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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발표로는 3백여 명(비공식 통계로는 2만 명)이 희생되었다. 덩샤오핑 만년의 오점으로 기록되는 대사건이었다. 이후 덩샤오핑은 자신이 선택한 총서기 두 명 모두가 실패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76년 ‘45 천안문 민주화 운동’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지만, 1989년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매년 6월 4일이 다가오면 천안문 광장에는 관광객보다 더 많은 사복 경찰이 구석구석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지금도 천안문에서의 시위가 항상 예비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4 천안문 사태에 충격받은 홍콩인들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가 시작되면서, 홍콩에서도 베이징의 학생들을 지원하는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5월 20일 베이징에 계엄이 선포되자 5월 21일에는 홍콩 시민 1백만 명이 빅토리아 공원에서 천안문 시위를 지지하는 모임을 열고, ‘애국민주운동 지원 홍콩시민 연합회(지련회)’를 결성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지금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의 전신인 홍콩민주동맹이 결성되어 홍콩 민주화의 동력이 마련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본 (탱크가 줄줄이 몰려오고, 총소리가 난무하고, 사상자가 들려가는) 장면들이 꿈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이제 7-8년 후면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어 저 ‘극악무도한’ 중국공산당의 치하에 살 게 되는 것이었다. 베이징에서 일어난 ‘극악무도한’ 일이 홍콩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홍콩인들은 베이징의 시위대를 위하여 모금을 하고 헌혈을 했다. 중국 자본의 은행들에서는 현금 인출사태가 벌어졌고, 입법국과 행정국의 의원들은 런던으로 달려가서 홍콩시민들에 대한 영국 영주권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전문직과 공무원 등 중산층 5만 5천 명에게 영주권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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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몽콕 지역에 있는 '6·4 기념관'에 전시된 1989년 톈안먼 시위 당시 홍콩 시민들의 모습.

 

문화대혁명에 이어서 홍콩인들의 마음은 다시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었다. 

 

홍콩에서 중국공산당이라는 어휘는 금기시되었다. 홍콩인들의 두뇌에 ‘너희 중국’은 독재, 잔혹, 야만으로, ‘우리 홍콩’은 민주, 인도,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자리 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전 편들에서도 말했듯이 ‘집단기억’에는 반드시 타자가 등장한다. 타자화는 ‘미워하기’와 ‘구분짓기’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나와 ‘더불어 같이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천안문 광장에서의 유혈진압에 대한 집단기억은 시기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현대 홍콩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와닿았다. 홍콩인들의 유전자에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확인하고 다시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홍콩인들은 공황에 빠졌다. 주가지수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라는 말이 서로의 인사가 되었다.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1989년에만 4만 명이, 다음 해인 1990년에는 6만 5천 명(홍콩 인구의 1%)이 홍콩을 떠났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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