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직관에 따른 추측이란 말씀이군요.

 

아니요, 그런게 아니에요.

반복된 훈련과 경험에서 비롯된 거랍니다.

제가 듣기로 이집트 학자한테 작고 희한한 딱정벌레를 보여주면 생김새와 감촉만으로도 기원전 몇 세기 유물인지 아니면 버밍엄에서 만든 모조품인지 알아차린다면서요?

일정한 규칙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냥 아는 거지요.

그런 유물을 다루는 데 평생을 바쳤으니까요.

 

제가 샌더스 부부를 본 순간, 남편이 아내를 살해할 줄 분명하게 안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거든요.

 

애거서 크리스티 <화요일클럽의 살인> 중에서

 



세계 3대 명탐정이라고 하는 카톨릭 사제 브라운 신부, 회색 뇌세포의 에르큘 포아로, 약쟁이 소시오패스 셜록 홈즈보다 미스 마플이 좋다. '미스'라고 하면 쭉쭉빵빵 언니를 떠올리실 분들이 있겠다만, 아서시라. 최고령 탐정 중 한 분이시다.


마플 여사는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인 세인트 메리 미드를 거의 떠나본 적이 없다. 도시 젊은이들은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무료한 촌구석 늙은이라며 얕잡아 보다가 노상 발린다. 평생 갈고 닦은 통찰력으로 온갖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무적의 할멈이거든.


마플 님은 발그레 미소를 지으며 속삭인다.


인간의 본성은 어떤 장소에든 비슷한 패턴을 보이기에, 오히려 한마을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인간성을 세밀하게 관찰하기 유리하다고.

 

지난 편에서 <강화도의 문인–프리퀄>로 이규보를 썼다. 본격적으로 <강화도의 문인>을 준비하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강화도에는 작가뿐 아니라 온갖 문화예술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 스물 스물 강화부심이 피어오른다.

대한민국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제주도가 '엣지 있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라면 강화도는 '무지개를 좇는 몽상가의 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그래서 콘셉트를 바꿨다. <강화도의 문인>에서 <강화의 몽상가>로.

 

<강화의 몽상가> 첫 번째 주인공은 <검정 고무신>으로 유명한 만화가 이우영이다.


000.jpg


딸들이 애니메이션 <검정 고무신>의 광팬이다. 학창시절 즐겨 읽었던 <검정 고무신>을 딸들도 좋아하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하다. 지인을 통해 이우영 작가가 강화읍 근처에 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안면 몰수하고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검정 고무신>의 배경이 1960~70년대이고, 2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한 작가라 부모님 연배인 줄 알았는데 웬 열. 같은 90년대 학번 선배님이다.


편견은 이뿐이 아니다.


명랑만화가는 개그맨 뺨치게 웃길 것이라고 기대했나 보다. 이우영 작가의 첫인상은 착한 교회 오빠. 오해 마시라. 공부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고 기타도 잘치고 드럼도 두들기는 엄친아 말고, 기도만 열심히 하는 '착한' 교회 오빠다.


그래서 고민 되었다. 주여, 이 선한 양 이우영 작가를 저 사악한 악의 무리 딴지일보에 내놓아도 되겠습니까?

 

판단은 그대의 몫. 이우영 작가와의 인터뷰 지금 시작한다.

 



딴지, 이우영

 

셀러킴(이하 쎌) : <딴지일보>가 어떤 매체인지는 알고 인터뷰에 응낙한 것인가?


이우영(이하 이) : <오마이뉴스> 비슷한 인터넷 신문?


쎌 : 절대로 <오마이뉴스>처럼 점잖고 공손하지 않은데. 가뜩이나 인터뷰도 잘 안하는 양반이 하필 <딴지일보>라니.


이 : 그렇게 말하니 겁난다. 예전에 <딴지일보>를 본 적이 있긴 한데, 솔직히 거의 들어간 적이 없다. 인터넷 세상을 잘 모른다. <오마이뉴스>도 강화도에 <오마이스쿨>이 있어서 기자님들과 어울리다가 알게 되었다.


쎌 : 나꼼수는 아는가? <딴지일보>총수가 바로 그 김어준이다.


이 : 괜히 했다. 급 후회 된다.


쎌 : 이제 와서 무르면 반칙이다.


이 : 특별히 내세울 철학이나 신념이 있어서 인터뷰에 응한 것은 아니다. 워낙 재미없는 사람이다. <딴지일보>의 정치적 색깔이 강하다고 해도, 여러 성격의 기사들이 있을 것이다. 내 인터뷰는 부담 없이 소소한 읽을거리였으면 좋겠다.

 

001.jpg

 



만화, 이우영

 

쎌 : 데뷔한 지 오래된 만화가여서 어르신인 줄 알았다.


이 : 1992년에 주간 만화잡지 <소년 챔프>에서 우수상을 받고 만화계에 뛰어 들었으니까 횟수로 24년이다.


쎌 : <소년 챔프> 학창시절에 즐겨 읽었다. <슬램덩크> 광팬이다.


이 : 맞다. 그때 다들 <슬램덩크> 때문에 소년 챔프를 샀다. 그래도 <검정고무신>이 애독자 인기투표에서 <슬램덩크>를 이긴 적도 있었다. 다 옛날 일이다.


쎌 : 장래희망이 만화가였나?


이 : 국민학교 때 <보물섬>을 매달 빼먹지 않았다. 만화가 꿈은 남동생이 먼저다. 6학년 겨울방학 때 남동생이랑 아랫목에서 이불 덮고 <보물섬>을 보다가 문득 '만화가가 되자'고 결심했다.


쎌 : 매달 두꺼운 <보물섬>사서 친구들과 돌려봤다.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황미나의 <다섯 개의 검은 봉인>, 이보배의 <달려라 하니> 인기가 많았다.


이 : <아이 공룡 둘리> 팬이다. 그 중에서도 마이콜이 좋았는데, 무대 위에서 기타 연주하다가 갑자기 난입한 강도를 무심하게 기타로 갈겨서 기절시킨 위인이다. 흑백 만화 시절에 선명하게 색이 들어가는 마이콜은 선도 잘 빠져서 둘리보다 튀었다.


쎌 : 정말이지 둘리 일당 단체로 진상 아닌가? 어른이 되니까 새삼 고길동에게 감정이입 된다.


이 : 아, 고길동! 박명수 같다. 호통만 쳤지 실속이 없다. 뒤처리 다 하고. 손해 보는 타입이다. 나 같으면 진작 다 쫓아냈다. 그러고 보면 고길동은 착한 남자다.


쎌 : 둘리 팬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김수정 작가가 우상 아니었을까?


이 : 명랑만화를 좋아하고, 그리다 보니, 김수정 선생님과 <맹꽁이 서당> 윤승운 선생님을 존경한다. <꺼벙이>의 길창덕 선생님도 훌륭한 분인데, 한 번도 못 뵈었다. 아쉽다.


쎌 : 김수정 작가는 만난 적 있나?


이 : 꼭 뵙고 싶었는데, 신인이었을 때 기회가 마련됐다. 40대 후반이었던 김수정 선생님은 한창 왕성하게 작품 활동 중이셨다. 예상과는 달리 풍채도 있었다. 일부러 탄탄한 어깨에 슬쩍 부딪혀 보기도 했다.


쎌 : 그런 짓을 왜 하지?


이 : 남자들은 그런 게 있다. 말로는 설명 못 하겠다. 여하튼 그날 선생님이 소고기 사주셨다.


쎌 : 대학생 신인 작가라고 여기저기에서 많이 주목했을 텐데.


이 : 그때는 그렇지도 않았다. 나랑 같이 신인상 받은 동기 중에 중3, 고1도 있었다. 내가 한 달에 70만 원 벌 때 그 친구들은 100만 원씩 벌었다.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이 60만 원이었다.


쎌 : <검정 고무신>은 어떻게 시작했나?


이 : 원래 농구 만화를 준비했다. 스포츠머리 주인공을 만들었는데 만화가 엎어졌다. 그때 출판사에서 60년~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제안받았다. 그러니까 <검정고무신>은 출판사의 기획이었던 거다. 농구만화 뾰족 머리 캐릭터를 이 만화 주인공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해서 기영이가 탄생했다. 급하게 착수하다 보니 얼굴이 계속 바뀌었다. 20회에 비로소 제대로 된 기영이가 완성되었으니까. 나중에 보니까 심슨 머리랑 비슷하더라. 언젠가 개콘 '불편한 진실'에서 황현희 씨가 심슨과 기영이가 혹시 같은 헤어샵 단골이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롯데리아 세트 메뉴 중에 기영이 장난감이 출시된 적 있었는데, 위에서 보면 뇌가 튀어나온 것 같다. 그런 기괴한 모습 볼 때마다 안타깝다.


002.jpg

 

쎌 : 20년 넘게 작업을 놓지 않는 끈기가 놀랍다.


이 : 너무 앵벌이 시키는 거 아닌가 싶어서 기영이에게 미안하다. 1992년 7월부터 2006년까지 <소년 챔프>에서 연재하고, 그 이후에도 다른 매체에서 이어서 했다. 그 이후에는 <검정 고무신> 등장인물을 응용해서 계속 다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기영이가 필요하다는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미완성이었던 인물이 그릴수록 성장한다. 기영이랑 동고동락한 세월이 24년이다. 걔 눈빛만 봐도 마음을 다 알 것 같다.


쎌 : <검정 고무신>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도 그렇고, 등장인물도 다 선하다. 악인이 없다. 작품은 작가를 닮기 마련인데, 본인이 착하다고 여기는가?


이 : 착한 게 뭔가? 잘 모르겠다. 이웃들과 마당에서 가마솥 걸어 놓고 닭백숙 끓여 먹는 정서가 있긴 하다. 서울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 포천에서 지냈던 추억이 많아서 그런지 공동체 문화에 익숙하다. 도시 깍쟁이도 아무나 못 한다. 힘과 권력이 있어야 하지 않나. 더치페이 이런 거 익숙하지 않다. 누가 손 내밀면 그냥 준다.


쎌 : 혹시, 보증도 서는 건 아니겠지?


이 :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럴 일이 있어도 마눌 님이 전 재산을 쥐고 있어서. 힘이 없다. 이 집도, 차도, 다 그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서 내 것이 하나도 없구나.


쎌 : 어째 쫌 쓸쓸하다. 가끔 기철이 보면 비슷한 서글픔이 느껴지던데.


이 : 걔가 허당이다. 장남인데 형 대접 못 받고.


쎌 : 주인공이어서 그런가? 기영이는 여친도 많다.


이 : 그러게. 기철이는 매번 여자에게 차인다. 기영이는 그냥 평범한 국민학생인데, 기철이 하는 짓이 하도 덜떨어져서 상대적으로 기영이가 훈남으로 보일 때가 있다.


쎌 : 장남에게 몰빵하던 시대인데, 기철이는 왜 그 모양인가?


이 : 아무래도 내가 투영된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 때문에 가족이 몇 년간 떨어져 살았다. 나는 할머니랑 지내고 남동생은 부모님이랑 서울에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모였는데, 부모님이 내가 아니라 남동생 이름으로 '우진 아빠, 우진 엄마' 이러더라. 알게 모르게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왜, 우영아빠가 아니라 우진아빠였을까?


쎌 : 작가 자신이 겪었던 감정이나 사건들이 녹아 들어가면 울림이 크다.


이 : 기철이 대사 중에서 '주목받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는 게 있다. 실제로 내가 그렇다. 사람들 시선이 나에게 집중될 때 불편하다.


얼마 전에도 <생활의 달인>에 아는 분 때문에 출연했다. 원래는 '지나가는 손님 1'이었는데, 감독이 어쩌다 <검정 고무신> 작가라는 걸 알게 된 거다. 예정에 없던 인터뷰를 요청받아서, 정말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짤릴 줄 알았거든. 헐. 첫 장면에 똵!


설마 누가 알아볼까 싶었는데, 그사이 동창밴드에 어떤 친구가 캡쳐해서 올렸더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반가우면서도, 여전히 이목 집중은 적응이 안 된다.


어떤 여학생이 독자 편지를 보냈었는데, 자기도 기철이의 '주목받고 싶지 않아' 대사에 공감 됐다고 하더라.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그 편지를 읽으면서 나 말고 이런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서 위로를 받았다.


쎌 : <검정 고무신> 중에서 애착이 가는 에피소드가 있나?


이 : 기철이가 부모님께 혼난 후 화가 나서 땡구를 발로 찼는데, 그 후에 땡구가 장염에 걸려 집을 나가 버린 이야기가 있다. 왜, 개들은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간다는 말이 있지 않나. 기철이가 자신 때문인가 싶어서 죄책감에 질질 짜는데, 살아 돌아온 땡구를 보며 진심 기뻐한다. 이거 레알이거든.


어머님과 다투고 괜히 집에서 키우던 백구에게 화풀이 했는데, 그 녀석이 가출을 했다. 아차 싶어 울며불며 동네방네 찾아다녔다. 그때 일화를 극화했다. 


쎌 : 딸들이 땡구를 좋아한다.


이 : 땡구의 창조주는 내 동생이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혼자 만화를 그리고 있다. 문하생을 둔 적도 없다. 어쩌다가 가족들이 배경 같은 거 좀 도와준 적은 있어도, 일일이 손작업까지 혼자 다 했다. 군대 가기 전날까지 몇 달치 연재물을 싹 해놓고 훈련소에 갔다. 군대 가서 틈틈이 연재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대단히 큰 착각이었지.


연재가 펑크 나게 생기자, 편집장이 남동생에게 SOS를 쳤다. 고3이었는데, 데뷔는 안 했지만 그림을 잘 그렸으니까. 얼떨결에 동생이 내가 군대 가있는 동안 <검정 고무신>을 그렸다. 그때 동생이 땡구를 만들었다. 형 때문에 만화가가 되었다고 지금까지도 원망 한다.

 



인간, 이우영

 

쎌 : 본인이 나름 4차원인 거 알고 있나?


이 : 엥? 무슨 소리?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쎌 : 스스로 속고 있는 거다. 나 4차원이요, 하는 애들 치고 진짜 4차원인 인간 없다. 본인이 4차원인지 모르는 인간이 진짜 4차원이다.


이 :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했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은 있겠지.


쎌 : 그 '시선', 창작의 원동력 아닌가?


이 :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타고난 천재들도 있지만, 나는 꾸역꾸역 매일 그리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요즘 카카오톡 오늘의 웹툰에서 생활 이야기를 연재 중인데, 우리 집 닭들도 등장시킬까 한다.


쎌 : 마당에서 봤다. 삽살개도 있던데.


004.jpg


이 : 땡구랑 땡순이다.


암탉이 21일 동안 알을 품는다. 태풍이 와도 꼼짝 안 하고 열심히 품더라. 암탉 모성애가 엄청나다. 우리 집 암탉이 6개 달걀 부화에 성공했다. 3개는 원래 부화가 안 됐었는데, 그 달걀을 살살 스크레치 내고 드라이기로 말려서 알을 깠다. 그렇게 키운 닭인데 어느 날 깜빡 닭장 문을 안 닫아서 저 땡구 녀석이 몽땅 물어 죽였다. 삽살개 취미가 사냥이다. 우리 집 땡구는 평소에 꿩, 고라니 사냥을 즐긴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가급적이면 집중해서 지켜보려고 한다.


03.jpg

 

쎌 : 사람 구경도 좋아하나?


이 : 새로운 사람 만나서 얘기하는 거 재미있다. 익숙한 삶의 패턴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보면 흥미롭다.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사는 걸까 궁금하다.


쎌 : 예를 들면 <나는 자연인이다> 출연자들?


이 : 맞다. 그런 사람들이랑 대화 나누는 거 좋아한다.


쎌 : 강화도에서 만난 흥미로운 인물 좀 소개 해달라.


이 : 1998년에 유치원 교사인 아내 직장 때문에 연고도 없는 강화로 이사 왔는데, 마치 수행자처럼 살았다. 벌써 18년인데,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애들 학교 학부모 몇 명이 전부다.


애가 셋인데 나이 차이가 좀 난다. 첫째가 고딩, 둘째가 초딩, 셋째가 네 살이다. 어쩌다 보니 <검정 고무신> 가족처럼 아들 둘에 늦둥이 딸 하나가 되었다. 마눌 님이 아들들이랑 아침에 집을 나서면 그때부터 셋째 육아와 집안일은 내 몫이다. 아침먹이고, 씻기고, 동네 산책하고, 점심 먹고, 낮잠 잘 때 작업하고, 애가 깬 후에 혼자 잘 놀면 밀린 청소랑 설거지하고, 저녁 준비하고, 마눌 님 퇴근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작업하고. 강화도에 온 후로 현재까지 오롯이 창작에만 전념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만화가 동료들이 있는 부천에 작업실을 얻을까 고민했지만, 내가 이 공간을 벗어나면 다른 식구들 몫이 되더라. 잘 알겠지만 단독주택에 살려면 손볼 곳이 얼마나 많은가.


쎌 : 단독주택은 남편들이 부지런해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다.


이 : 맞다. 요즘 같은 여름이면 잠깐 눈만 돌려도 마당이 정글이다. 수시로 잡초를 뽑아야 한다. 작년까지 펠렛 보일러 썼는데, 20킬로 펠렛 연료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연통 청소는 또 누가 하고? 내가 과감하게 집안일로부터 탈출을 감행할 수 있는 대범한 사람이 못 된다. 우는 애 업고 틈틈이 그리면서 작업 해왔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난 시간들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기억이 한 개도 없다. 또 하라면 못한다.


쎌 : 강화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노하우 좀 전수해달라.


이 : 조금 전에 실컷 얘기했는데 뭘 들었나? 아는 게 없다.


강화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해서 타 지역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별로 가본 곳이 없다. 며칠 전에도 가족들이랑 외포리 갔다가 길을 헤맸다.


쎌 : 그래도 이우영이 추천하는 강화 명소 한곳 정도는 밝혀달라.


이 : 지난 주말에 둘째랑 자전거 타고 연미정에 갔다. 갈 때마다 좋다. 날이 더워서인지 정자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 많더라.


쎌 : 최근 편에서 나도 연미정을 소개했다.


118428334.jpg


이 : 연미정 앞 막걸리집은 안 가봤지? 막걸리가 천 원인데 안주도 싸고 맛있다.


쎌 : 오호, 그건 몰랐네. 다음에 한 번 들러야겠다.

 



대한민국, 이우영

 

쎌 : 창작자는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구제역 살처분 이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 소재의 소설과 영화가 동시에 발표되거나, 세월호 이후에 국가 시스템 붕괴 메시지가 담긴 재난 영화들이 연달아 상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서 뭐가 제일 마음에 걸리나?


이 :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이 자꾸 신경 쓰인다. 우리나라도 27기 이상 원전이 있는데 더 짓는다고 할 때 마다 움찔 움찔 한다. 원자력 에너지가 값싸고 안전하다는 것에 이견은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 원전 사고가 난 것은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지 않나? 한반도도 얼마든지 지진, 해일이 일어날 수 있다. 중국도 해안 따라 원전이 많은데, 대한민국이 원전에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원전 폐기물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시책을 대책 없이 무조건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지혜를 모으자는 것이다. 독자들과 고민을 나누고 싶지만, 이런 작품은 무겁다고 해서 받아주는 매체가 없다.


쎌 : <돈의 노예>를 봤다. 내용이 후덜덜하다.


이 : <오마이뉴스>에서 김부일 작가와 같이 했다. 김부일 작가는 동문 선배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체 왜 이렇게 힘든 건지 궁금했는데, 작업 하면서 나도 많이 배웠다. 이걸 다 알면 절망스럽지 않을까?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매트리스의 '빨간약 파란약'이 떠올랐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게 더 나을까? 빨간약을 먹고 감당 못 할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포털에도 연재해서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만, 연재처가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만화는 환영받지 못한다. 이 원고도 사장될 뻔했는데, 다행스럽게 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쎌 : 콘진원에서 내용을 자세히 안 봤구만.


이 : 샘플로 10페이지만 보냈거든.


쎌 : 책 홍보 꼭 넣겠다. 다들 사보자. 김부일/이우영의 <돈의 노예>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절찬 판매 중이다.


006.jpg

 

쎌 :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을 알려 달라.


이 : 대한민국이 위기라고 한다.


재난 상황이 오히려 각자의 삶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무너진 공동체가 복원되는 스토리를 구상 중이다.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하면 '그래서 넌 대안이 뭐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다. 소소하고 찌질한 이우영이 해결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림으로 소통할 수는 있다. 그냥 허심탄회하게 같이 얘기해보자는 거다. 당장 결론을 내자는 것이 아니라. 가슴 맞대고 진솔하게 각자 의견을 나눠 보자.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낫다고 하지 않나.


성인이 된 기영이는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 쓱 지나치기 쉬운 일상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관찰하려고 애쓰겠다. 앞으로 지켜 봐달라.


005.jpg

 



인터뷰 내내 조곤조곤하게 할 말 다하는 이우영 작가와 명석하고 날카로운 미스 마플의 모습이 겹쳐졌다.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의 마플 할멈처럼, 언젠가는 이우영 작가가 강화의 현인이 되어 있을 것 같다.


팬으로서, 이우영작가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인생 이야기를 오래오래 보고 싶다.


댓글로 이우영 작가에게 응원 바란다. 





지난 기사


강화 섬사람 되다

월세집을 구하다

강화도 겨울나기

절기와 정월대보름

잘 먹고 잘 사는 법

잘 먹고 잘 사는 법 - 막걸리 편

강화의 사찰들

이기심의 미덕

강화도의 문인들

강화도에서 여름을 나는 곳





셀러킴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