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노레스트 추천1 비추천0





[딴지메뉴얼] 청바지 사는 법

2004.6.16.목요일

딴지 국민생활지원본부
 


아... 며칠 전엔 홍대근처 구제 바지샵에 들러 리바이스 501 한개 샀다.


청바지는 웬지 사람의 기품(?)을 훼손하는 거 같아 잘 안입지만 리바이스 501은 그 단순한 스타일에 나름의 철학도 있고해서 하나 장만했는데... 무엇보다 기쁜 것은 가게 주인과의 협상에서 심리적 우위를 점했다는 거다.


물건을 살 때, 협상의 관건은 시선을 자제하고, 강력한 제스쳐로 어필하고,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3원칙이다.






협상의 관건


1. 시선의 자제


2. 강력한 제스쳐


3. 권유의 쌩깜


적용해본다.






: 일단...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동시에 주인의 포지션은 인식하되 그 존재는 부정한다.


꾸벅꾸벅 졸던 주인 화들짝 깬다. 내 곁으로 다가오며 판에 박힌 상거래 숙어 나온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 댓꾸하지 않는다. 일방적 침묵은 상대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 사이즈에 맞는 501을 하나 고른다. 이때 가능한한 주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숙달된 솜씨로 내 사이즈를 골라버림으로서 기선을 제압하고 향후 있을 협상에서 만만찮은 넘이 들어왔다는 심리적 부담을 듬뿍 안겨준다. 이때까지도 주인과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구제바지 가격은 주인마음이므로 당연히 바지에 붙어있는 위압적인 가격표 따위는 무시한다. 가격표엔 2만원이라고 싸인펜으로 쓰여있다.


주인 : "아, 그 제품은 리바이스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물건이죠. 그걸로 하시겠어요?"


: 주인의 권유를 뿌리치듯 차갑게 한마디 한다. 포인트는 주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타이트하게 쏘아부치듯 해야 한다는 거다.


"허리에 고무줄 들어간건 없어요?"


가능한한 터무니 없는 질문일수록 그 파괴력은 가중된다.


이 대목에서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거나, 표정이 굳어지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인다. 주로 젊은 여자들이 전자의 반응을 보이지만 내가 만난 주인은 젊은 남자였고... 그는 아연실색했다.


반응으로 보아 이녀석은 농담을 농담으로 제대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진지한 녀석이다. 녀석의 DNA속엔 애당초 농담을 분별하는 센서가 누락된 것이다. 그를 탓하진 말자... 농담이 난무하는 이세상에서 이런 녀석도 가끔 필요하다.






주인 : "허리에 고무줄 들어간 청바지ㅡ,.ㅡ는 요즘 안나옵니다만..."


허리에 고무줄 들어간 청바지가 요즘 안나와...? 내 기억엔 예전에도 없었어! 있다면 너나 입어랏!


미처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2차 타격이다.


: "입어봐도돼죠?"


역시 포인트는 한쪽 다리를 바지에 이미 집어넣으며 자연스레 말해야 한다는 거다. 주인이 보기에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갖게해야한다.


주인에게 리드 당하지 않고 주인을 리드하는 것... 이게 중요하다. 정, 리드가 불가능하면 무시해도 된다. 그럴 경우 침묵은 좋은 솔루션이다.


자~ 바지를 입을 때 주의 사항은 확실히 입으라는 거다. 단추, 지퍼 꼭꼭 잠그고 벨트까지 착용해버린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주인은 할 말을 잊는다.


지금부터가 협상의 고비이자 가장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할 시점이다.


바로, 앞서의 바지입기는 이 협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시위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주인 : 당혹스럽지만 애써 웃으며 "어때요? 바지가 맘에 드세요?"


: 역시 타이트하게 쏘아부친다. "얼마죠?"


바지에 이미 보란 듯 가격표가 붙어있는데, 직접 묻는다는 건...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되고 주인에게 역시 부담이된다.


주인 : 소심한 미소를 지으며 "거기 가격표에 있죠?, 2만원입니다"


오 중대한 헛점 발견!


이런류의 발언은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싣는 여러가지 방법 중 가장 구차한 것으로서 2만원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가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싸인펜으로 쓰여진 그 가격표 또한 주인이 만든 것일테니 주인의 말을 정확히 해석하면 "난 2만원이 받고 싶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2만원은 주인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드디어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었다.


텍을 주렁주렁 매단 바지를 떡하니 입고 가격협상에 임해야 주인에게 시각적 압박을 줄수있다. 여차하면 그대로 바지입고 밖으로 튀어버릴 기세로 몰아부치자.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로 이번 기회에 이 물건을 꼭 사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소비자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최후의 카드가 바로 구매거부이기 때문이다.


즉, 거래가 이뤄지지 않게되더라도 내가 손해 볼 건 없다는 이야기다. 손님 한 명 놓치게 된 주인만 안타까울 뿐이다.


2만원 이랬으니까 대충 1만 5~6천원 정도를 거래 상한가로 정한 뒤, 단호하게 내 뱉는다. 이때만큼은 접두, 접미, 존칭 모조리 생략한다.






: "만2천원!"


처음 부르는 가격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다. 그것은 협상의 첫 스텝이자 최종 가격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낮은 가격보다 살짝 낮은 가격이 좋다.




눈빛은 강렬하게, 목소리는 단호히


주인 : "에이, 원가가 만4~5천원인데... 너무 하시네"


너 말 잘했다. 아무래도 원가는 만원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원가가 만4~5천원이란 말은 최소한 만5~6천원 정도는 받고 싶다는 뜻이므로 잘 기억해 둔다.


: 아랑곳 않고... "만3천원!"


(이때 부르는 가격은 주인의 희망사항인 만4~5천원에 근접하게 불러야한다. 그래야만 뒤에 보여줄 제스쳐가 먹히기 때문이다)


주인 : 안된다며 고개를 흔든다.


이때... 제스쳐 들어간다.


바지 벨트를 풀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도 안 사겠다는 표현이다.


바지를 입은 이유 중 하난 바로, 이런 거부표시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른 가격이 나름대로 주인이 생각하기에 현실성 있는 가격이라면 주인은 안달하게 되고, 터무니 없는 가격이면 나도 너같은 넘에게 팔 생각 없다라고 생각하니 잘 계산해서 행동하자.






주인 : 안달하며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쓰시죠... 저도 많이 남겨먹자고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웬만하면 드릴테니.."


오오... 이 정도 애드립을 주인으로부터 받아냈다면 협상은 성공이다. 그러나 이때도 표정 풀리면 안된다. 더욱 뻔뻔스러워 지자.


: "그냥 만3천원에 주세요"


주인 : 못 말리겠다는 듯 "정 그러시면 만 4천원에 갖고 가세요, 그냥 드릴께요"


협상은 대성공이다. 그러나 너무 감사해하지는 말자. 손해보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 만4천원에도 주인은 절대 손해 안본다는 뜻이니까. 더군다나 구제 바지란 누군가가 입었던 중고물건 아니던가. 다만, 처음 2만원을 다 주고 사지 않은 것에 감사하자.


그리고 주인도 주인나름이니까 처음부터 놀부같은 주인 하고 협상해봐야 입만 아프다. 앞서 들어간 사람을 주인이 어떻게 대하는지 잘 관찰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늘의 교훈, 세상에 공짜란 결코 없다.
 






<디테일 보충>


본 매뉴얼을 읽으면서 독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분들 있을줄로 안다. 주인 앞에서 청바지를 입을때, 원래 입고 있던 바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래 입고 있던 바지 위에 입는가, 아니면 매장 안에서 그 바지를 멋드러지게 훌러덩~ 벗고 입어야 하는가?


음, 이와 같은 의문점을 가진 독자라면 본 매뉴얼을 충실히 탐독한 독자라 할만 하다. 다음은 그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기술적 해결 방안이다.






1. 치마를 입는다.


본인이 예전에 여동생이 치마에서 추리닝으로 갈아입는 거, 안보는 척 하면서 여러번 봤는데... 10초도 안걸린다.


남자들이 입을 수 있는 치마로는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지금도 즐겨입는 퀼트스커트를 추천하니 잘 선택하길. 단점이 있다면 초기 치마구입비용이 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2. 아무것도 안 입고 들어간다.


야간이나 이른새벽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엔 반드시 샵에서 뭔가를 입고 나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 추천하지는 않는다.


정신병자로 오인 될 수 있으니 가게 돌입과정의 동선과 주변 유동인구에 대한 충분한 현장검증이 필요하다.


3. 사이클용 쫄바지를 입는다.


벗을 필요없이 그 위에 바로 입으면 되겠다. 이 역시 추가구매 비용 발생.


4.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입는다.


하체가 다 커버되기 때문에 별다른 하의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나 성당에서 사용하는 성가대 까운을 추천한다만 넉넉한 사이즈의 면T나 셔츠도 어느정도 하체를 커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5. 하체에 페인트를 칠한다.


바디페인팅 연상하시면 되겠다. 얼핏 봤을 때 검정색 쫄바지나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이면 성공적인 페인팅이다.


답변이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주의사항은 박력있고 멋드러지게 바지를 입겠다고 급하게 서두르다 지퍼에 자쥐가 끼여 병원으로 후송된 사례도 있으니 세심한 주의를 바란다. 이상.



딴지 국민생활지원본부 본부장
노레스트(norrest@naver.com)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