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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J플라이급의 최다방어 기록보유자 유명우

2003.6.16.월요일
딴지 스포츠





딴지일보 복싱팬 여러분 안녕하신지?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카마초다. 거의 반년만인 것 같은데 그간의 게으름은 변명하고싶은 생각조차 없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심이 어떨지? 또한 앞으로는 성실한 기사제공을 약속드리며 오늘은 우리의 복싱영웅 유명우 선수에 대해 썰을 풀어보겠다. 준비들 되셨나?


J 플라이급 역대 최다 방어기록(17차)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경량급 복싱영웅 유명우. 물론 복싱은 기록경기가 아닌 관계로 동급 최다방어 기록은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90년대 중반이 넘어서는 시점에서부터는 여러 세계기구에서 새로운 방어기록과 다()체급 석권자가 쏟아져 소위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복싱을 본다는 것은 다소 매력 없는 시각일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소개하는 유명우 선수를 이야기할 때 이러한 기록적인 측면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명우는 과연 어떤 선수인가?



  귀여운 악마 유명우




전성기 시절 그를 칭하는 명칭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소나기 펀처, 그리고 귀여운 악마 그는 분명 작고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도대체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무한정한 스테미너를 가지고 있어 상대가 완전히 탈진 할 때까지 그의 소나기 펀치는 쉬지 않았으며 상대가 완전히 게임을 포기한 뒤에는 항상 귀여운 웃음으로 상대를 위로하곤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사람을 친근하게 사로잡는 그의 말투나 행동 역시 한국 복싱 팬들에게 그가 절대적 지지를 얻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가 한국에서 가진 기록은 단지 J플라이급 최다방어기록만이 아니다. 그는 한국 선수 중 가장 많은 세계타이틀전을 치루었으며(21회), 최다연승 타이기록(36연승, 이는 전 WBA J미들급 챔피언 유제두의 기록과 같다)을 세웠다. 한마디로 눈부신 금자탑이라고나 할까?



  챔피언이 되기까지


그는 82년 신인왕전을 통해 데뷔했다(신인왕전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인 토너먼트였다). 초기에는 힘은 좋지만 펀치력은 그다지 없는 선수로 평가되었으나 한국 내에 라이벌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며 점차 기량을 늘려가게 된다.









대 손오공전


그가 데뷔했던 82년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경량급은 선수층이나 수준면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역사가 일천했던 J플라이급에서 한국은 그때 이미 김성준(WBC), 김환진(WBA)같은 챔피언을 보유한 기록이 있었으며 82년만해도 김성남(후에 도카시키 가쓰오에게 도전), 김치복(후에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도전), 전 챔피언 김환진, 후에 WBC챔피언에 오르는 장정구까지 무려 네 명이 세계랭킹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외에도 신희섭(후에 IBF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름), 최문진(후에 조이 올리보에게 도전), 그리고 나중에 유명우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손오공까지 세계무대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에 갓 데뷔한 유명우가 성공하는 길은 끊임없는 라이벌전을 통해 동급의 라이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동양권의 복싱을 미국이나 남미에 비해 한수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늘 있어왔지만 80년대의 경량급복싱에서 한국은 빼놓을 수 없는 복싱 강국이었다. 멕시코의 복싱영웅 미구엘 칸토와 구티 에스파다스를 차례로 제압한 박찬희가 그 대표적인 선수였으며 앞에서도 언급한 선수들의 면면을 볼 때 한국 복싱계 특히 J플라이급에서 살아 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명우는 데뷔한지 불과 3년이 채 못되어 OPBF챔피언에 오르는 고속질주를 한다(84년). 물론 당시에는 장정구가 이미 이 체급 왕자에 올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유명우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라이벌이던 최문진, 최점환(후에 IBF, WBC왕자에 오름), 손오공 보다 크게 높지도 않아보였다.


그러다보니 기회는 같은 체육관 소속의 최문진에게 먼저 찾아왔는데 상대는 WBA왕자인 미국의 조이 올리보였고. 결과는 일방적인 올리보의 판정승이었다. 그러는동안 유명우는 라이벌 손오공을 KO로 잡고 자신이 차기 대권 주자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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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우 vs 손오공 7라운드 동영상


자국에서 J플라이급의 인기가 높지 않아 치기공을 부업으로 삼던 올리보에게 한국은 입맛 당기는 미끼를 마구 던져주는 행운의 나라였으며 그 때문에 시세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금액임에도 불구 두 번째 한국 원정에 나선다. 유명우는 올리보의 긴 리치에 번번히 제동이 걸리며 고전. 제2의 최문진이 되는가 했으나 8회 이후 레프트 잽을 앞세운 기본기에 충실한 반격이 먹히면서 근소한 승리를 낚는데 내용상 무승부도 무방했을 만큼 올리보도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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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우 vs 조이 올리보 주요 장면 동영상


유명우는 후에 이런 스타일의 선수에게 또 한차례 고전을 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명우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준 이오카 히로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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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우 vs 이오까 2차전 주요 장면 동영상


85년 12월 드디어 챔피언에 오른 유명우는 첫 상대로 지명도전자 호세 데 헤수스를 맞이한다. 헤수스는 유명우 에게 두번이나 도전했으며 나중에 WBO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전성기를 맞이하던 86년부터 88년까지 동 체급에서 그를 대적할만한 실력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헤수스는 장정구와 싸웠던 헤르만 토레스와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이는 장정구와 유명우의 비교로 곧잘 이어지기도 한다. 즉 장정구의 상대가 유명우의 상대보다 질이 높았다든가 하는 논쟁이다. 물론 장정구는 나중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게 되는(그러나 장정구와 싸우던 상황에서는 그다지 네임벨류가 높지 않던) 파이터들과 명승부를 벌인 것이 사실이다.









대 호세 데 헤수스전


대표적인 선수가 헤르만 토레스, 소트 치탈라타, 오하시 히데유키, 도카시키 가쓰오 등인데 사실 유명우의 상대인 호세 데 헤수스(후에 WBO챔피언), 마리오 데마르코, 루돌포 브랑코(후에 IBF플라이급 챔피언), 레오 가메스(4관왕), 이오카 히로키(2관왕) 등도 유명우와 싸우던 시점으로 볼 때 결코 장정구의 상대보다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시합을 직접 보지 못하고 상대 선수의 네임벨류만으로 평가하기 쉬운 해외 복싱팬들의 시각이 아닌 당대 한국 팬들의 눈으로 볼 때 보면 장정구와 유명우는 거의 비슷한 수준의 복서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왜 유명우인가?


J플라이급은 최다방어기록의 선봉에 섰던 구시켄 요코, 루이스 에스타바의 초창기 왕조를 시작으로 일라리오 사파타의 단일왕조 시대, 유명우, 장정구의 양대산맥 시대를 지나 90년대 움베르토 곤잘레스와 마이클 카바할의 통합 챔피언 시대가 이어진다. 즉 지금 언급한 7인정도가 이 체급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들 중 누가 가장 안정적인 챔피언이었나?를 묻는다면 단연 사파타와 유명우를 들고싶다. 그러나 단 한차례 그것도 판정 번복 소동을 보일 만큼 근소한 단 한번의 패배를 기록한 유명우에 비해 사파타는 검은별이 너무도 많다. 구시켄도 안정적이지만 그는 말 그대로 초창기의 챔피언에 불과하다. 곤잘레스와, 장정구, 카바할은 엄청나게 익사이팅한 열혈 파이터이지만 곤잘레스는 여러 차례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장정구는 재기전에 실패한 것만 3차례에 이르며 카바할은 곤잘레스와의 3차례 라이벌전(1승2패) 이후 완전히 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에 비해 유명우는 다소 억울할 만큼 잘 싸운 일본원정경기에서의 유일한 패배를 원사이드한 리턴매치로 깨끗이 되찾아와 자신의 명예를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지켜낸 유일한 선수이다. 39전38승(14KO)1패를 기록했지만 실질적으로 무패나 다름없이 완벽한 전적을 쌓아왔으며 이것이 그가 J플라이급 역대 최고의 선수임을 보증하는 메리트라고 할 수 있다.


 
  유명우에 관한 몇 가지 논쟁              









챔프 등극을 특집으로 다룬 86년
1월 펀치라인 표지. 그런데 sex는 복서의 종점이란다...


유명우 시대는 한국복싱사 최고의 시기였던 만큼 그를 둘러싼 논쟁 또한 만만치 않게 전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유명우는 장정구 만큼 대전 상대의 질이 높지 못했으며 원정방어는 고작 한번뿐(그나마 패했다)이고 카바할과의 통합전을 기피했다는 비난 등이다. 이 논쟁 특히 유명우를 비난하는 주장에 의하면 유명우의 17차 방어 기록과 깨끗한 전적 등은 온실 속에서 만들어진 조작된 기록으로 비하된다. 게다가 그는 통산 18차례나 방어전을 치루고도 B급 지역 챔피언으로 인정받는 전 IBF 미니플라이급 챔피언 라타나폴 소 보라핀에 비유되기도 하며 말년에 카바할과의 미국 원정경기를 치루지 않은 그를 비겁자로 몰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해보자.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주니어 플라이급은 WBA, WBC 둘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IBF는 아직 지역 타이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한국은 한때 3대 기구를 모두 가지고 있을 만큼 세계 최고의 J플라이급 복싱 강국이었으며 유명우, 장정구 그 누구도 당시 위협적인 중남미의 지명 도전자를 기피한 사실이 없었다. 따라서 대전상대의 질을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는데 만일 정말로 그 당시의 WBC 랭커들이 WBA 랭커들보다 수준이 높았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유명우의 잘못도 아니라고 본다.


또 동시대 경량급 챔피언인 카오사이 갤럭시나 소트 치탈라타가 수차례 해외 원정을 했던데 비해 유명우는 그러지 못했던 점은 두 가지 이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원정 갈 만한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이웃 일본은 유명우에게 평균이상의 대전료를 주고 도전시킬만한 수준의 선수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국내에서의 대전료와 별 차이가 없는 일본원정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는데 이는 사실상 원정경기에 대해 새가슴인 김현치 매니저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본다. 다만 대전료가 보장된 인도네시아 원정은 한 두 차례 구체적으로 기획되기도 했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니코 토마스, 바하르 우딘 등). 그러나 당시 랭커들의 수준을 볼 때 유명우가 일본이나 인도네시아에 원정했다고 해도 패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둘째 당시는 국내 복싱의 전성기여서 유명우의 국내 방어전에 따라붙는 스폰서나 흥행사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액의 대전료가 걸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타이틀 상실의 위험이 있는 해외 원정은 기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복싱 열기가 가라앉은 90년대 이후의 최용수, 최요삼같은 챔피언들은 국내 흥행이 불가능한 관계로 경제 논리에 의해 어쩔 수없이 원정을 가야만 했는데 유명우가 활동하던 80년대에 이런 상황은 전혀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전하고 편한 게다가 흥행까지 보장되는 국내 방어전으로 복지부동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옳은 판단이었지만 안방 챔피언이라는 비난을 남긴 빌미가 되었으며 이로 인한 평가 절하는 전적으로 매니저의 책임이라 본다.


결과적으로 유명우가 원정을 기피한 실질적인 이유는 국내보다 훨씬 안정적인 대전료 확보가 힘들었던 경제적인 요인과 김현치 매니저의 원정공포증, 그리고 국내시장의 안정적인 흥행 여건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소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유명우를 라타나폴 소 보라핀과 같은 등급에 놓는 건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유명우는 보라핀보다 선수층이 두터운 J플라이급 선수이며 IBF가 메이저기구로 오르기 이전에 활동하던 선수인데다가 당시 라이벌 챔피언인 장정구와 동급 이상의 평을 받았고(보라핀은 동급의 로페즈의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그를 이긴 선수가 없을 만큼 완벽한 모습으로 은퇴한 챔피언이며(보라핀의 말년을 보라) 이 과정에서 기록을 조작할 목적의 어떤 시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는 분명 명분상으로도 실제로도 강한 챔피언이다.  



  유명우는 비겁자인가?









대 가메즈 2차전


유명우에 대한 최후의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딴지는 바로 마이클 카바할과의 미국 원정경기를 기피한 것이다. 사실 유명우의 활동기간 중 라이벌이라 할만한 선수는 WBC의 장정구 이외에 호세 데 헤수스, 레오가메즈, 마리오 데마르코 정도였고 이들과는 모두 두 차례 씩 싸웠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실력이 좋은 당대 수준급의 라이벌일 뿐 그에게 부와 명예를 쥐어줄 만한 소위 인기복서는 아니었다. 말년에 움베르토 곤잘레스라는 위협적인 라이벌이 나타나지만 그는 유명우를 피해 WBC의 이열우를 선택했고 그가 장정구까지 제압한 이후에는 유명우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최고의 라이벌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IBF의 마이클 카바할이 가세하며 드디어 최후의 잔칫상이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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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우 방어전 하이라이트 동영상


그런데 이 시점에서 20대 후반의 유명우는 페이스가 눈에 띄게 떨어지며 새롭게 나타난 두 명의 젊은 라이벌들에 비해 결코 우세하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만다. 17차 방어를 마칠 시점의 유명우는 데뷔 후 10년 이상 계속된 J플라이급 활동에 따른 만성적인 체중고가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다가 상당히 윤택해진 경제 환경, 그리고 연속적인 약체 도전자와의 쉬운 방어전에 따른 심리적 느슨함으로 체중고를 극복할 만한 소위 헝그리 정신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곤잘레스와 카바할이라는 두 명의 라이벌은 그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활력소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예전만 못한 몸 상태가 조금씩 그를 위태롭게 했다. 게다가 18차 방어 이전에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파이트머니를 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였던 카바할과의 대전이 이오카 히로키전 이후 그의 가치가 급락하며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대전료를 제의 받게 된다.


은퇴냐 재기냐를 놓고 방황하던 그가 재대결에서 이오카를 잡고 타이틀을 되찾아오지만 여전히 평가 절하된 그의 이미지를 회복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유명우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 자칫하면 이미지회복은커녕 헐값에 세계 최강의 자존심마저 팔아 넘기는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많았다. 결국 그는 다시 찾아온 타이틀의 1차 방어전인 호소노 유니치 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되고 유명우 대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광선이 카바할의 자리를 넘보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 시합의 결과는 이 시점에서 유명우가 카바할에 비해 아주 헐값에 미국 원정을 수락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유명우VS카바할의 대결은 뜨는 해와 지는 달, 신, 구 교체의 현장으로 명명될 것이며 카바할이 얼마나 강하며 미국이 얼마나 위대한지 또한 아시아는 얼마나 한심한 촌 동네이며 그곳 선수의 기록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증명하는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만의 잔치에 유명우가 조연으로 출연할 이유는 결코 없었던 것이며 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글을 마치며...


복싱 명예의 전당이라는 곳이 있다. 세계 유수의 슈퍼 챔피언들의 이름이 이곳에 헌액 되었으며 시각이 다소 미주와 유럽위주로 편협 하기는 하지만 그런데로 이와 비슷한 레벨의 기관이 아직 없어 나름대로의 권위도 부여되고 있는 곳이다. 한국 선수는 아직 이곳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최근에 한국의 장정구가 몇몇 매니아들에 의해 재평가되며 이곳에 입성할 확률이 커졌다고 한다 아울러 유명우도 조속히 재평가가 이루어져 장정구와 유명우의 이름이 동시에 이곳에 올려지기를 기대해본다.



 



딴지 복싱 전문우원
카마초(labylinth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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