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연애]미스와플의 남녀마찰계수 측정보고서
- ⑥관계기피증에 걸린 남자를 알아보는 방법


2009.7.28.화요일



오래전에 한 나이 많은 남자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에게는 오래된 연인이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아름답고 고요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평화로운 커플이었다.


어느 볕 좋은 일요일, 남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자의 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여자가 끓여온 커피를 마시고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거실 창으로 햇살이 넘실거리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다. 어느 집 창문에서는 체르니 연습곡이 들려왔다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다. 의심 한 줌 없이 이어지는 연인과 적당히 나른한 날들, 남자는 문득 아, 이렇게 살다 죽겠구나. 싶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고 아이가 뚱땅거리는 체르니 연습곡을 들으면서 평온하고 고요하게 나이 들어 가겠구나....


생각이 이어지다보나 남자는 어느새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평온함과 고요함이 원래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평생 떠돌이 개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원래의 꿈이었다는 사실이 불현 듯 떠올랐다.


갑자기 여자의 무릎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시작했다. 한없이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성격도, 무엇보다 이 여자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한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남은 커피가 다 식기도 전에 남자는 여자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여자는 울었고,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이 이십대 중반이었다. 그때는 나도 떠돌이 개처럼 살고 싶었던지라 그 이별의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헤어져서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 후회하는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한 지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못 견뎌했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지점이다. 떠돌이 개의 영혼을 지닌 자는 아무리 좋은 주인을 만나도 행복해질 수 없다. 떠돈다는 것 자체에 생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나는 그 남자의 옛날 애인을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는 내가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그들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오랜 세월 사귀면서 남자가 그 어떤 확신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남자는 바람둥이였다. 여러 여자를 만났고, 물론 그 여자들에게도 그 어떤 확신을 주지 않았지만, 여자가 바뀔 때마다 옛 애인은 그녀들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여자에게도 남자가 생긴 것이다. 한없이 참하고 고요했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둘이 같이 붓던 적금을 몰래 찾아 야반도주를 했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갔을 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을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진실을 들었을 때는 그때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처럼 들렸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은 또 아닌 것 같다. 남자는 아마 여자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여자가 그를 쉽게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울고 애원하고 그래서 다시 주저앉는 시간들이 반복되고, 그 와중에 여자가 조용히 칼을 갈았을 런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남자를 위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겠다는 결의 아래, 조용히 배신을 진행했을 것만 같다.


연애를 하면서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정은, 내가 떠나지 않으면 그가 곧 나를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어쨌든 이별이 당도하고야 말 거라는 불안감, 당하지 않으려면 치고 빠져야 하는데, 그 날을 하루라도 더 늦추고 싶은 미련들, 그 와중에서 하루하루를 살얼음판을 걷듯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 세상에는 언제나 이렇게 연애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예전에 만났던 피구씨도 그런 남자였다. 이십대 후반에 짧게 만났던 그는 내가 처음보는 굉장한 나른함을 가진 남자였다. 외모도 목소리도 살아가는 방식도 나른했다. 일을 많이 했고 야근도 잦았지만 힘들다고 티를 내지 않았고 밤을 새우다 새벽녘에 전화통화라도 하면 "내가 그쪽으로 잠깐 갈까?"하고 말했다.


그리고 진짜 왔다. 집 근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갈때면 잠깐 내 얼굴을 만지고 씨익 웃고는 떠났다. 세상 어떤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 내가 크게 잘못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은 남자, 나를 아주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남자.


물론 말 그대로 그는 나를 크게 아프게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따지고보니 사랑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언제가 어느 주말 저녁, 그는 잠깐 우리집에 저녁을 먹으러 들리기로 했다. 나는 서둘러 장을 보고 요리를 시작했다. 고기를 재우고 채소를 다듬고 가스렌지 앞에서 부리나케 생선을 뒤집었다. 그런데 내가 차린 떡벌상을 보고 피구씨가 한 말은 "그냥 라면이나 끓이지."였다.


그날 밤, 그는 좀 불편하게 저녁을 먹었다. 내가 차린 밥상을 기쁘게 받아먹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처음으로 서운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내게서 아무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물론 그 역시 대단한 것을 주려 하지 않았다.우리는 주말을 공유하고, 서로의 외로움을 공유하고, 지나간 사랑의 상처들을 공유했지만, 미래를 공유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고, 그는 도망치고 싶어 했다. 결국 우리는 겨울과 봄을 간신히 보내고 헤어졌다.


그와 헤어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보았다. 영화속의 감우성은 피구씨를 그대로 닮았다. 영화에서 엄정화는 관습을 따르되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당찬 여자로 그려지지만, 내 눈에 그녀는 제도에 독을 품고 감우성을 버리지 못하는 여자가 아니라 감우성이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남자였기에,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그에게 매달릴 수 없어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로 보였다. 그들이 영화 속에서 가장 강하게 갈등하는 지점은 콩나물 비빔밥을 만드는 여자에게 남자가 라면을 끓여먹겠다고 주장하는 지점이다. 결국 여자는 콩나물 비빔밥을 만들고, 결국 남자는 라면을 끓여먹고야 만다.


잘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을 때 ‘콩나물 비빔밥’이라 말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당신에게 밥을 해주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콩나물 비빔밥은 그리 간단한 요리가 아니다. 세상에서 콩나물 다듬는 일처럼 지루한 노동이 어디 있는가. 거기다 파 다지고 마늘 빻아 양념장까지 만들어야 한다. 수고로운 콩나물 비빔밥을 굳이 하겠다는 건, 로맨스를 이어가고 싶은 열망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자는 그 꼴을 두고 볼 수가 없다. 콩나물 비빔밥이 완성되고 나면, 그래서 여자로 하여금 로맨스에 관해 안심하게 만들고 나면 그만큼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끝끝내 라면을 끓여 내고야 만다. 라면을 끓일 강단이 없는 남자는 피구씨처럼 "라면이나 끓이지"라는 혼잣말을 뱉어내고야 만다. 여자가 기분 나쁠 걸 알면서도 자신이 도망갈 배수진을 미리 쳐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감당하기 힘든 남자가 바로 나른한 남자라는 것을, 피구씨를 통해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그에게는 늘 몇 센티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황동규의 싯구처럼, 언제나 한 모퉁이 앞서는 당신이었다. 그 거리감은 그 남자가 여자들을 향해, 혹은 나를 향해 쳐 놓은 생존의 거리감이었다. 관계기피증을 가진 남자에게 그 거리감은 생존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이 에이즈 환자의 몸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면역체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벽을 두른다.


이들은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끔은 여자와 눈을 맞추는 것도 두려워한다.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대신 내가 다른 곳을 보는 척 할 때만 나를 본다. 자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만큼은 기꺼이 들킨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마음의 전부, 들킬 수 있는 감정의 전부다.


이런 감질맛나는 감정에 길들여진 여자는 이런 남자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는 나를 몰래 훔쳐보고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이 여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그들에게는 과거에 끝까지 가 보았던, 모든 것을 다 주어보았던 사랑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최후의 핑계다. 감을 잡지 못하고 무조건 돌격해 오는 여자가 있을 때 그는 마지막 수류탄을 터트리는 심정으로 그 장치를 이용한다. 상처 때문에 더는 안 된다는 말이면, 그 어떤 여자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기피증은 대개 인생의 한 때에 찾아오는 감정일 확률이 크다. 마흔이 넘고 쉰이 넘은 관계기피증 남자는 많지 않다. 만약 있다면 관계의 문을 닫고 철저히 혼자가 되겠다는 그를 정말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대개는 특정 남자들의 인생에 잠시 머물다가는 한 시기이다.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약한 마음과 상처받지 않겠다는 오기가 만들어 낸 시기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그 시기를 지나는 남자를 만난 것 뿐이고 혹은 그 남자가 도깨비 망토처럼 뒤집어 쓴 관계기피증의 망토를 벗겨낼 만큼 내게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세월이 지나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다가오던 시즌이 끝났음을 깨닫게 되면, 그들도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관계를 맺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인연을 만들고 부대끼며, 콩나물 비빔밥을 나눠먹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겠다.







#관계 기피증에 걸린 남자를 알아보는 방법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면 멈칫 하는 남자, 내가 보내는 애정과 선물을 부담스러워하는 남자,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남자, 현실에 만족하면서 정작 미래는 부정적인 남자, 멀어지려고 하면 또 다가와서 손을 내미는 남자, 그래서 자꾸만 헛갈리게 만드는 남자.



<쉿!(She it!)> 저자 미스 와플(marune@empal.com)



운영수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