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40년 묵은 용서 2009.7.31.금요일
고모, 얼마나 오랫동안 불러보지 않은 이름이던가. 직원이 내준 면회용지에 이름을 썼다. 김 연심. 그토록 잊어버리려고 했던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거동을 못하는 노인은 침대가 있는 방에서 따로 지낸다고 했다. 열린 방문으로 여섯 개의 병상 침대가 보였고 모두 휑한 몰골에 작은 짐승처럼 쓰러져 있어 갑자기 난감해졌다. 늙어 모두 비슷비슷한 할머니들 속에서 젊은 시절의 고모를 찾아내기 어려워서였다. 직원은 가운데 침대로 가서 눈을 감은 노파를 향해 큰소리로 불렀다. “할머니 조카분이 왔어요. 알아보시겠어요?” 직원이 나가고 난 뒤 병상 옆 작은 의자에 앉았다. “고모, 희경이예요. 많이 아프셔요?” 고모는 갑자기 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손사래를 젓는다. “내 빤스를 줘, 왜 내걸 안주고 드런 년 빤스를 주는 거야?” 이빨이 한 개도 없는 입으로 버벅거리면서도 눈빛은 단호하다. 그랬지. 깔끔하고 정갈한 고모였었지. 가지고간 요플레를 다른 침대에 있는 노인에게도 나누어 주고 숟가락으로 고모에게 떠 먹였다. 고모는 내 아버지와 아주 많이 닮았다.
고모. 고모와 인연을 끊고 산지가 햇수로 사십년이나 됩니다. 가난한 소작민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읍내 경찰서장의 아들이 소학교 삼학년 친구였는데 그 가족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따라서 현해탄을 건넜다고 합니다. 식민지 소작농 아이들이 다 그랬듯이 늘 배가 고파서 울다 하루종일 굴을 판적도 있다더군요. 아버지의 어깨와 등에는 모래알이 짓이겨 박힌 상처가 많았는데 공사장에서 짐을 많이 지고 다녀 그리됐다고 했습니다. 징집을 피하려고 일본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 친구와 함께 오키나와 근처 아주 작은 섬에 숨어있다가 해방을 맞았답니다. 폐허가 된 동경에서 두해를 더 공부하다가 아버지는 드라마에서 처럼 부유한 집 딸인 어머니를 만나 연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6.25 직전, 아버지는 집안이 좋은 처가 쪽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 결혼을 합니다. 내게 외할아버지가 되시는 분은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좌익계열로 빠지셨습니다. 어머니의 오빠 세 분도 모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분들도 왼쪽 편 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있어 함께 가지 못하고 몸을 풀고 뒤따라가겠다고 미아리 고개에서 부모형제와 헤어집니다. 그러나 삼팔선이 그어져 어머니는 다시는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좌익일을 하지 않으셨는지 스승의 도움으로 교편을 잡으시고 시골에 있는 고모를 우리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때 고모는 열여섯 살 이었습니다. 고모는 참 예뻤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도 있었지요. 아버지는 고모를 야간 중학교에 넣습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졸업하자 동구여상에 입학 시켰습니다. 고모는 나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온 적이 없습니다. 말랑한 자두나 풋 복숭아 혹은 센베이라는 과자도 사와 내손에 꼭 쥐어줍니다. 여섯 살 때 홍역을 했는데 열이 높아 우는 나를 밤새 업고 달래준 이도 고모입니다. 고모가 영어책을 읽기에 내가 물었습니다. “고모, 영어로 내 이름은 무어야?” 나는 고모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떼를 쓰고 울어 고모 애를 먹인 기억이 납니다. 고모는 여상을 졸업하던 해에 시집을 갑니다. 이북에서 혼자 내려와 빵공장에서 일하는 청년이었는데 사람들은 따라지라고 불렀습니다. 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는 그 청년을 두둔하고 나섰습니다. 고모는 시집을 갔어도 매일 우리집에 왔습니다. 고모를 따라 신설동 동묘 옆에 있는 빵공장에 가서 크림빵도 많이 먹었습니다. 영세한 공장은 가난한 소년들이 검댕이를 칠한 얼굴로 밀가루 반죽도 하고 때 낀 손으로 단팥도 집어넣습니다. 고모는 공장안에 있는 손바닥만한 방에 혼수로 준비한 작은 농과 경대와 이불을 넣어 두고 살고 있었지요. “이 에미나이 이레 이뻐서 어케 시집 보냄등, 니북에 네 만한 막내가 있지비” 고모부가 거무튀튀한 얼굴로 내 볼을 부비면 나는 고모 치마폭으로 얼른 숨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고모부는 학교 매점에 빵을 댈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빵을 납품하게 되는 학교 매점이 늘어나자 공장은 바빠졌고 이삼년 뒤 아버지의 도움으로 고모부는 그 공장을 인수하게 됩니다. 고모는 아버지를 볼 때면 볼에 홍조를 띠우고 얌전히 치마를 감싸 안고 앉습니다. 큰 오라버니는 하늘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가끔은 나를 꼬옥 안고 “니가 복덩이다 니가” 그렇게 이뻐 했었습니다.
불행이란 운명의 덫이지요. 암에 걸린 아버지는 불과 사 개월의 투병을 끝으로 돌아가십니다. 어머니의 치마폭으로 병아리 같은 우리 사남매가 옹송거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도 우리는 몇 해를 종암동에 살아 고모는 자주 찾아와서 서럽게 울고 가곤 했지요. 고모부의 빵공장은 점점 잘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남쪽에 혈육이 하나도 없는 어머니는 고모와 고모부를 많이 의지 하다가 집을 팔아 고모부의 공장을 크게 짓는데 자금을 대 줍니다. 고모와 고모부는 우리형제를 대학교까지 다 보내겠다고 울며 다짐했습니다. 아버지가 운명하시며 고모에게 니 조카들 부탁한다고 하셨다는군요. 고모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부른 배를 안고 "오라버니 맹세해요, 오라버니 맹세하구말구요" 하며 마루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슬퍼하던 장면이 마치 어제 일 인 것처럼 기억이 납니다. 고모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내게 그리도 이쁜 우리 고모는 우리형제들에게 학비를 대주지도, 어머니에게 빌린 돈을 갚지도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된 나는 고모네 집으로 등록금을 타러 갑니다. 마루 문설주에 한없이 나를 세워 놓다가 엣다 하고 던져주곤 했지만 그것도 몇 해 후엔 아주 안주고 맙니다. 나는 바보처럼 늘 문설주에 서서 있다가 그냥 울고 나오기도 했지요 그럴 때 마다 고모가, 변해버린 고모가 안타까워 더 서러웠지요. 어머니는 나를 앞세워 고모네 집에 가서 싸웁니다. 고모네는 돈암동으로 새집을 사서 이사를 했고 그때는 매우 귀한 지프차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마루 바닥을 두 손으로 땅땅 치며 대성 통곡을 하셨지요. 동네 사람이 나와 기웃 거립니다. 나는 뻘쭘이 서서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쳐다 볼 뿐입니다. 고모가 어머니를 끌어냈습니다. 싸우는 여자들을 구경하려고 동네사람이 대문 앞에 모여 들었습니다. 고모가 삿대질을 하며 악을 썼습니다. “김일성이 딸년아! 공산당하는 딸년 돈은 안줘도 되는 거야! 어디 와서 행패냐! 이 더러운 김일성이 딸년아” 그때는 1966년입니다. 6.25가 끝난지 겨우 십 여년 이었을 때 입니다. 빨갱이라고 하면 길에서 잡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후 종로경찰서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모는 우리를 밀고 했습니다. 제 외삼촌들이 북에서 거물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외갓집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관리를 받습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에서 살다가 신촌으로 이사를 했는데 우리 집을 못 찾은 형사는 학교 교장실에서 나를 수업시간에 불러내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일본에서 편지 오냐?” 큰 외삼촌은 일제 시대 때 일본여성과 결혼해 처가가 일본입니다. 어머니 올케의 친정어머니이신 늙은 일본 부인은 가끔씩 일본어로 편지를 써 보내며 북쪽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요새 새로 온 손님이 있지?” 잊을 만하면 가끔씩 학교로 찾아와 묻는 능글능글한 그 형사는 내 소녀시절을 늘 덜덜 떨리게 만들었지요. 어머니는 고모에게 돈을 돌려받기는커녕 둘째 외삼촌이 전쟁 전에 살던 회현동 집과 외할아버지가 살던 성북동집을 형사에게 빼앗깁니다. 형사들에게 전리품을 일러준 댓가로 고모가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보를 준 것 만큼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무서워서 꽁꽁 숨었습니다. 잘난 외갓집 덕분에 나는 이 땅에서 발 디딜 곳이 없어집니다. 훗날 시골학교로 발령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임용취소가 되는데 그 일은 좌절로 무릎을 꺾게 만들어 나의 인생은 등불 없이 어두운 밤길을 걷듯 살았지요.
종로에 큰 제과점을 차렸다가 망한 후 김포 어디론가 가서 산다는 소식을,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고향 어른들이 말해주더군요. 고모의 사남매 중 큰애는 스튜어디스가 되었는데 이탈리아 사람하고 결혼하고 나간 뒤 소식이 없다더군요. 둘째는 죽고 막내는 불구가 되었지요. 당숙 어른 초상 때 셋째를 보았지요. 무슨 도라는 이상한 종교에 미쳐 헐렁한 바지저고리에 뻣뻣한 개털머리를 길게 길러 묶고 고무신을 신고 있더군요. 그 뒤 셋째도 행방불명 되었다더군요. 그때의 짜릿한 기분이 쾌감이었을까요, 고통이었을까요. 겁 없이 독주를 몇 잔 들이키며 그랬지요. ‘그러면 그렇지 천벌을 받고야 말았구나’ 늙고 병들어 버려진 노파를 동네 교회에서 양로원으로 주선해 주었다더군요. 암, 하늘이 무심할 리가 있나. 그걸 못보고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밤새 술이 취해 불렀지요. 엄마 무덤에서 제발 나와 봐요. 혼곤히 잠에 빠진 늙은 고모의 얼굴은 참 평화스럽군요. 그런데요, 그러면 내가 받은 고통은 도대체 누구의 죄이죠? 시간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나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이 만든 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윗대 사람들 죄업의 그물에 걸려 나는 고통 받았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도 내게는 죄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들 두고 죽는 것도 중죄에 해당됩니다.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불쌍한 백성이 많이 죽었습니다.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은 다음대의 불행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내 놓았다 한들 전쟁으로 죽은 가엾은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른편에 섰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은 다 죄인이지요. 가난한 백성은 제 입이나 채우는 죄를 짓게 되지만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인과 힘센 사람입니다. 우리를 버린 고모와 시체를 물어뜯는 하이에나 같았던 그 형사도 다 불쌍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때도 중년이었으니 벌써 백골이 분토 되었겠지요. 죄업을 내 당대에 끊고 싶었지요.조상의 죄를 끊지 않으면 그 죄가 다시 다음대로 이어지지 않겠어요? 고모가 죽기 전에 아니 제가 죽기 전에 매듭을 지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요. 내 죄가, 당신을 미워한 내 죄가, 다시 다음대로 물려가서는 안되니까요. 고모 용서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편히 가십시오. 미동도 없이 잠에 빠진 고모의 팔뚝은 뱀의 허물같이 갈라졌고 살비듬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조용히 가방을 집어 들고 나왔다. 해가 졌어도 바람은 여전히 후텁지근하게 더웠다. 양로원 앞에 평택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몇 대를 그냥 보내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 벌컥 마실까, 삼겹살집에 가서 독한 소주를 들이킬까. 술 생각이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 그 몇 일 후 고모는 영면하셨습니다. 딴지 관광청 슈리슈바 |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는 검색이 금지된 단어입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