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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척 매뉴얼] 이방인


2009.7.29.수요일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들어가며




카뮈의 작품을 읽은 척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 내면의 심연을 건드리는 작가의 날카로움과 치밀함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소위 ‘부조리’라 통칭되는 인간과 세계의 불화에 대한 얘기가 그의 대부분 저서의 주제다 보니 분명 쉽게 읽힐 수 있는 그런 책은 아니라 할 것이다.



게다가 카뮈하면 늘 따라다니는 것이 실존주의 문학자라는 태그이다 보니(실상 카뮈는 실존주의자라는 타이틀을 거부했지만) 그 꼬리표 자체에서 느껴지는 뭔가 위대해 보이는 철학적 포스와 정확히 비례하게, 분명 나와는 인연이 없는 저 먼 세상의 책일 것이라는 믿음 역시 확고해지는 점도 없지 않다 할 것이다.



사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묻는 단순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잘사는 방법이 누구에게는 돈이 우선이고, 누구에게는 신이 우선이며, 또 누구에게는 사랑이 우선이라는 식으로 다양한 욕구가 난무하다보니 난해한 학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철학이 어렵다기 보다는 인간이, 혹은 인간의 욕망이 어렵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욱 적당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난해한 인간의 삶을 두고 모든 게 다 운명이라느니, 신의 뜻이라느니 하는 소리들은 뜬구름 위에서 학 잡아먹는 소리에 다름 아니며, 오직 개별 인간의 주체성에 의한 적극적 선택과 행동만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외치는 것,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 문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고로 당 서적을 읽은 척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무조건 선제공격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들의 질문에 답을 하는 수세적 읽은 척은 언젠가는 밑천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당 서적의 주인공인 뫼르소적 인간형과도 동떨어진, 즉 세상과 타협하려는 가식적 행동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포화와도 같은 공격적 읽은 척에 지친 적들이 어느 순간에는 ‘너는 지금 알고서 지껄이는 것이냐’며 반격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답변은 간단하다.



“물론 나도 모르지.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알겠어. 알면 부조리가 아니게.”



 


  읽은 척 매뉴얼


1)등장인물


-뫼르소 : 겉과 속이 늘 같은 주인공.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지는 봉변을 당했다면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서 명이 짧아지는 봉변을 당한다.



-뫼르소 엄마 : 소설의 시작에서 이미 죽은 고인으로 나오기 때문에 대사 한 줄 없는 등장인물이지만 당 서적을 읽은 척 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마리 : 뫼르소와 같은 직장에 다녔던 여인. 뫼르소가 엄마 장례식을 치룬 다음 날, 해변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레몽 : 뫼르소 이웃집의 나쁜 남자. 뫼르소가 자신의 애인에게 대신 편지를 써준 것을 계기로 친구가 된다. 참고로 그 편지는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니라 변심한 애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 잠시 돌아오게 하려했던 악의적 편지다.



-마송 : 레몽의 친구. 마송의 별장 근처 해안가에서 주인공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아랍인들 : 원래 아랍인들은 레몽과 마찰이 있었을 뿐 주인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레몽이 아랍인 여자를 자주 때리곤 했기 때문에 그녀의 오빠가 나선 것이고, 그 오빠 역시 두들겨 맞자 패거리가 나타나 레몽에게 칼침을 놓는다. 이후 공교롭게 그 오빠는 뫼르소의 총을 맞고 죽는다.



-부속사제 : 뫼르소에 대한 사형판결이 있은 후 무신론자인 주인공을 종교에 귀의시키려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실패한다.



2)내용요약


양로원에 계시던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기 때문에 난 어쩔 수 없이 양로원을 찾아가야 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어머니를 평소 미워했기 때문에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야했다는 뜻은 아니다. 난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리고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 따라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게다가 어머니의 장례식은 금요일인 관계로 회사 사장도 이래저래 주말을 합쳐 4일을 연속 휴가를 준다는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난 그냥 참았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



양로원에 도착했을 때 원장은 시신을 보여주려 했지만 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제 와서 내가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담배와 커피의 힘을 빌어 밤을 지센 후, 장례식을 치르던 날의 태양은 그야말로 내 뺨을 후려갈기는 것처럼 뜨거웠다. 여름 한낮의 태양과 아스팔트에서 반사되는 열기가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의 관을 땅속에 묻는 그 순간에도 눈물이 아닌 땀방울만 흘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겨우 어머니의 시신을 묻은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제 푹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일종의 안락한 행복감마저 느꼈다. 솔직한 내 심정이 그랬다는 것이다. 무슨 후레자식 퍼포먼스를 하려는 게 아니라.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나는 해수욕을 나갔고, 거기서 예전에 함께 일했던 마리를 만났다. 나도 전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내가 싫지는 않은 눈치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낸 후, 시내로 나가 재밌는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았고, 함께 집에 돌아와 밤을 보냈다. 그녀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몸이 근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난 우연한 일로 사귀게 된 이웃집의 건달, 레몽(그가 동네에서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 건달, 혹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포주란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친구가 되기를 원했고, 난 그의 바람에 응했을 뿐이다.)의 친구인 마송의 별장에 마리와 함께 놀러갔다. 바닷가에 위치한 별장에서 실컷 수영도 하고, 맛있는 점심도 먹은 후, 여자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와 레몽, 마송 이렇게 세 남자는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얼마 전 레몽이 흠씬 두들겨 팼던 아랍인과 그의 친구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레몽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레몽이 그의 여동생을 지독하게 때린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아랍인들과 싸우는 동안 레몽은 아랍인이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었고, 이에 흥분한 레몽은 집에 있던 총을 들고 그 아랍인들을 찾아가 겨누었다. 하지만 난 이건 비겁한 일이라 레몽을 설득하여 그의 총을 건네받았고, 아랍인들은 슬그머니 도망쳤다. 그렇게 일은 싱겁게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레몽은 집으로 들어갔지만, 난 후덥지근한 방에 있기도 싫었고 여자들의 수다에 시달리기도 싫어서 아까 그 아랍인들이 있었던 샘터의 그늘로 다시 찾아갔다. 그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곳에는 칼을 휘둘렀던 아랍인이 다시 그곳에 혼자 와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서로 긴장된 상태로 대치를 벌이던 중, 나는 그에게 총알 한발을 날렸고, 잠시 후 이미 쓰러진 그에게 다시 네 방을 연속으로 갈겼다. 그날은 내 어머니의 장례식 때만큼이나 태양이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나는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아마도 예정대로 사형에 처해지거나, 운이 좋으면 상고를 통해 형이 감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결과가 나오든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형무소의 부속 사제가 찾아왔다. 그동안 몇 번이나 면회를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허락도 없이 다짜고짜 방에 들어온 것이다. 내가 그의 면회를 거절한 이유는 그가 분명 하느님 예기를 꺼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난 하느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며 끈질기게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나는 참다 참다 결국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어. 나는 그 까닭을 알아. 분명 당신도 그 까닭을 알고 있어.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는 걸 말이야.”



결국, 사제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나가버렸고 그날 난 처음으로 이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 무관심한 세계와 나는 꼭 닮아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소원이 있다면,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3)읽은 척 세부스킬



주인공은 왜 사람을 죽였는가


주인공은 왜 아랍인에게 총을 쏘았을까?



한낮의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당 서적의 테마는 마치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내용만큼이나 유명하다.



고로 대부분의 읽은 척 초보자의 경우, 누군가 <이방인>의 주인공이 왜 사람을 죽였는가를 물었을 때 내가 질세라 “그야 물론 태양 때문이지.”라는 식의 경거망동을 연출할 확률이 높다 할 것이다. 물론 그 질문을 던진 사람 역시 태양 때문이라는 답변에 목이 부러질 만큼이나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만족해한다면 더욱 볼만한 광경이 되겠지만 말이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일시불로 팔았는지 혹은 6개월 무이자 할부로 팔았는지, 사은품은 있었는지 등등의 계약 성사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일만 이천행의 방대한 글이 소비된 것은 아니듯, 카뮈의 <이방인>역시 주인공 뫼르소가 백주대낮에 사람에게 총질하는 묻지마 살인극을 실감나게 연출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작품이 아님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읽은 척 뽀록의 비극은 이와 같이 늘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유명작품의 한줌 줄거리에서 시작된 무성생식의 세포분화가 톰소여를 허클베리핀으로, 신밧드를 알라딘으로 만들곤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먼저, 주인공 뫼르소가 자기의 살인동기를 태양 때문이라고 말하는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주장이라고 대답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나의 변호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히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빠른 어조로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본문 p.136)



즉, 주인공이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증언은 뒤죽박죽이 된 우스꽝스러운 말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얼버무린 말이지, 마치 소원을 묻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일조권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든지, 아니면 해가 뜨면 매로 변하는 영화 <레이디 호크>의 그것처럼 뭔가 각별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되겠다.



거두절미하고, <이방인>에서 주인공이 사람을 죽인 논리적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은 마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언젠가는 화끈한 정사장면이 한 번쯤은 나오겠지 하고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헛된 일이다. 즉, 주인공 뫼르소는 피해자인 아랍인에게 무슨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날따라 사람을 죽이고 싶을만한 변태적 성욕이랄지, 사회에 대한 불만 같은 정신적 맥락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그야말로 태양 때문만도 아니다.



아무리 유추를 하고, 분석을 해도 그 논리적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 서적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바로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소위 ‘부조리’에 대하여 말하고자 그 주인공을 어처구니없는 살인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실존주의


미리 강조하건데, 누군가 당 서적을 언급하며 부조리에 대해 장시간 썰을 풀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르트르에서 니체, 심지어는 키에르케고르와 파스칼까지. 그야말로 실존철학의 족보 낭송회가 시작되는 재난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할 것이므로 가능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라 하겠다.



알아먹지 못할 각종의 철학적 논제들이 튀어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정작 끔찍한 것은 진짜로 니체가 그런 말을 했는지, 키에르케고르는 혹시 케로로 중사와 무슨 관계인 건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물어볼 수가 없는 지적 소외의 무한루프가 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리를 피할 수 없다면, 가령 그 자리에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누군가와 동석을 하게 되어 어떻게든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해야 한다면,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적들이 떠드는 동안 최대한 침묵한 채, 상대가 혹시 저것은 경멸의 눈빛이 아닐까 하고 막연한 심증만 가질 수 있을 정도의 무심한 눈길로 응시하는 것이 그 차선책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카뮈는 다른 책에서 자신이 탄생시켰던 부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부조리는 침묵하려고 애쓴다. 만약 부조리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그 부조리가 스스로에 만족하고 있거나 혹은, 스스로를 잠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항하는 인간 중>




부조리. 조리에 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자칫 <이방인>에서 연출되는 부조리라는 것도 역시, 태양 때문에 사람에게 총질을 했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의 살인사건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당 서적의 결정적 부조리는 주인공 뫼르소가 왜 부조리하게 사람을 죽였느냐가 아니라, 그가 초범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판례와는 다르게 왜 사형선고라는 중형을 받는 부조리가 발생했느냐에 무게중심이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즉, 뫼르소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그가 이미 죽어가는 사람에게 불필요하게 총알 네 방을 더 먹였던 잔인함 때문도 아니고,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앞으로도 맑은 날이면 얼마든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다는 재발 가능성 때문도 아니다. 앞서 내용요약에서 살펴보았듯,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급기야는 장례식 다음 날 여자와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고, 질펀한 섹스를 나누는 등의 민간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만의 남다른 행동양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는 배심원들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 가장 수치스러운 정사에 골몰했던 바로 그 사람이 부질없는 이유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풍기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고 살인을 한 것입니다.”


검사는 그제서야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나의 변호사는 참다 못해, 두 팔을 높이 쳐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 때문에 소매가 다시 흘러 내리면서 풀 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나 보였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그러나 검사는 다시 일어서서 법목을 바로잡고 나더니 존경할 만한 변호인의 순진성을 갖지 않고서는, 그 두 종류의 사실 사이에 근본적이며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바라고 언명했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힘차게 외쳤다. “법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하였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논고는 방청객들에게 대하여 커다란 효과를 거둔 듯하였다.(본문 p.127~128)



뫼르소는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다가, 어머니에게는 말동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양로원에 맡긴 것이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이유 역시 그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왜냐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법이고, 게다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해서 달라질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므로. 그래서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 바로 다음 날에 여자와 함께 요절복통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보면서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집에 돌아와서 함께 섹스를 나눌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 날 그런 짓을 하든, 3년간 움막생활을 한 후에 그런 짓을 하든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이 어머니가 죽었을 때 몹시 슬퍼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배심원이나 독자가 뫼르소에게 먼저 부조리함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을 부조리하다고 나름 조리 있게 판단한 배심원들 역시 결국 자신들만의 조리의 덫에 빠져 우발적 초범자를 계획적 살인자로 변모시켜 사형에 처하는 부조리한 판결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이는 어머니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어머니도 아니고, 슬픔의 방식이 공장에서 찍어낸 세숫대야처럼 일정한 것도 아니며, 섹스가 누구에게나 불결한 그 무엇이 아님을 간과한 배타적 신념의 전형적인 부조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카뮈 스스로는 실존주의자임을 부인하지만 당 서적이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그 이유라 하겠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실존주의자들의 기본 명제라 할 수 있는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에 대한 반례가 극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실존에 우선했을 경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본질 앞에서는 누구나 펑펑 눈물을 쏟아내야 하는 것이고 적어도 그 다음 날에는 절대로 섹스를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뫼르소는 필연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을만한 계획적 살인범으로 둔갑하는 부조리가 성립된다는 얘기 되겠다.



이는 쉬운 예로, 필자가 읽기 싫은 책을 대신 읽어가며 새빠지게 글을 써서 번 돈 백만 원과 삼성회장 이건희의 하루 용돈의 이자의 이자의 이자쯤 될 백만 원이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액수이기 때문에 필자에게나 이건희 회장에게나 백만 원은 똑같은 실존적 의미를 지니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얘기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필자는 백만 원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건희 회장의 경우는 백만 원이 없어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얘기에 웃다가 죽으면 모를까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이런 문구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사족이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위 문구야 말로 양차대전 후 유럽을 압도했던 실존철학에 대해 가장 적확한 설명을 주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다시 본문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런 부조리한 판결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다시금 종이 울리고 피고석 박스의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로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그리고 그 젊은 신문기자가 눈을 옆으로 돌리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야릇한 감각이었다. 나는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이상스러운 말로,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혀지는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존경이 담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수들은 나에게 아주 유순하게 대했다. 변호사는 나의 손목 위에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이 나에게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없습니다.”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끌려 나온 것은 그때였다. (본문 p.140~141)



아마도 ‘굳이 비난을 하려면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도 더위를 느끼고, 성욕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를 한 신에게다 뭐라 할 것이지 왜 나한테 그걸 따져 묻고 지랄이야. 그건 내 탓이 아니란 말이다.’ 정도가 뫼르소의 본심이었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참고로 카뮈가 주인공 뫼르소를 두고 ‘현재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 언급함으로써 신성모독이라는 종교계의 거센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위의 대목이 작가가 뫼르소를 그리스도에 비유한 근거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듯, 뫼르소 역시 인류의 가식과 허위를 대신 짊어지고 군말 없이 사형선고를 수락했으므로.











끝으로 <이방인>에 대한 읽은 척은 앞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이후에 게재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읽은 척과 병행되었을 때 좀 더 완벽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뫼르소의 살인과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모든 것이 허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을 품는 초인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둘 다 감옥에 들어간 후 얼마까지도 결코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 그밖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피력되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식의 무신론적 세계관 등과는 여러모로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실존철학의 시조로 꼽는 이들도 있고,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나 <반항하는 인간>, <페스트> 등 다른 저서에서 자주 인용, 언급되곤 하는 작가가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이므로 카뮈가 어느 정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다.


늘 강조하건데,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이다.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읽은 척 매뉴얼 저자
딴지 편집장 너부리(newtoil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