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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룡 추천0 비추천0

2010.03.15.월요일


김지룡


 


 


아빠도 육아와 가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한다. 아빠인 내가 얼마나 육아와 가사에 참여해야 공정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내가 취업주부인 경우는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쉽다. 두 사람 모두 직업이 있으므로 육아와 가사를 딱 절반씩 나누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가장 공정한 일이다. 하지만 칼 퇴근하는 직장도 있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직장도 있으므로 상황에 맞추어 분담 비율을 정하는 것이 더 공정한 일일 수 있다.


 


내 아내는 13년 간 전업주부였다.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선 먼저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전업주부의 직업은 ‘육아’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 대신 가정을 택한 것이다. 전업주부의 직업이 육아라고 생각하면 가사와 육아의 분담 원칙을 쉽게 세울 수 있다. 가사는 엄마와 아빠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절반씩 나누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


 


전업주부의 직업이 육아라지만, 하루 종일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빠는 퇴근을 하는데 엄마는 퇴근을 하지 못한다면 공정한 것이 아니다. 엄마가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시간은 아빠가 출근해서 퇴근하는 시간까지다. 퇴근 후에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면 공동으로 육아를 할 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한 셈이므로 나중에 벌충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가사와 육아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나는 무척 관념적인 존재인지, 천성적으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내린 정의(定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생각한다. 육아와 가사의 차이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렸다.


 


“아이가 없었어도 해야 하는 일은 가사, 아이 때문에 새로 발생한 일은 육아다.”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어도 해야 할 일이므로 가사에 속한다. 아이를 돌보고 교육하고 좋은 버릇을 들이는 일은 육아에 해당한다. 아이의 기저귀를 빨거나 아이의 방을 청소하는 일도 가사다. 빨래나 청소가 가사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가족이 늘었으므로 일해야 하는 양이 늘어났을 뿐이다. 이유식을 만드는 일은 육아에 속한다. 이유식을 먹는 성인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아빠가 퇴근 후에 가사와 육아의 절반을 책임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정도는 분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매일 절반씩 분담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실행하기 힘든 일이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아빠가 매일 칼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는 가정이 있다면 대부분의 엄마는 부러워할 것이다. 가정적인 남자는 바람직한 아빠지만 지나친 것은 문제가 있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모든 기준을 가정에 맞추면 가장 중요한 생계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 일할 나이에 집에 매일 일찍 들어가는 사람이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가정적인 아빠, 좋은 아빠는 마인드의 문제일 것이다. 항상 그런 아빠가 되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타협해야 한다. 가사 분담의 타협점은 아빠가 밤늦게 돌아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맡는 것이다. 저녁 설거지를 내버려두었다가 아빠가 퇴근 후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는 모습이므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빨래는 가능하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일은 간단한 일이다. 빨래는 너는 것이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엄마가 적당한 시간에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고, 아빠가 귀가해서 빨래걸이에 널 수도 있다.


 


또 한 가지는 청소다. 한 밤중에 귀가해 엄마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을 청소하지는 못하겠지만, 거실 정도는 정리할 수 있다. 한 밤중에 청소기를 돌릴 수는 없으므로 물건을 정리하는 일 정도만 해도 좋다 (보너스 트랙 참조).


 


가사는 한 밤중에도 할 수 있지만, 육아는 뒤로 미룰 수가 없다. 아이를 초저녁에 재우고 아빠의 귀가 시간에 맞추어 밤늦게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도 힘들고 아빠도 힘들다. 아빠가 몰아서 육아를 분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주말 이틀을 아빠가 혼자서 아이를 돌보면 공정한 분담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도 쉴 시간이 필요하므로, 현실적으로는 주말 하루 정도를 아이를 돌보는 정도로도 무척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너스 트랙 : 아빠가 청소를 하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진다.


 


가사 분담에서 특히 아빠가 해야 할 것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청소를 꼽는다. 아빠가 청소를 하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아이 머리가 좋아지면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고, 아빠의 부담이 무척 가벼워진다.


 


아빠가 청소를 하면 아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없다. 하지만 나는 직감으로 확신한다. 엄마와 아이가 주로 놀이를 하는 공간을 청소하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진다. 우리 집은 거실을 그런 공간으로 삼고 있다.


 


거실을 서재로 만들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집도 오래전부터 거실에 책장을 두고, TV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거실을 서재처럼 꾸미지는 않았다. 책장 앞에 책상이나 의자를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집에서 제일 큰 공간인 거실이 엄마와 아이들이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실에 가구도 거의 두지 않는다. 활용 공간이 넓을수록 다양한 놀이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놀이는 어린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활동이다. 신체를 발달시키고 사고력, 의사소통, 창의력, 독립심을 키워준다. 어린 아이들의 하루는 놀이의 연속이다. 아이들에게도 직업이 있다면 나는 바로 ‘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가 놀고 나면 집안이 어질러진다. 아이가 제대로 놀고 있는 집은 아무리 청소를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대청소를 해도 10분만 지나면 사방에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닌다. 엄마는 아이와 놀 때 다양한 소품을 사용하기 경우가 많아서 집안이 엉망이 되는 일이 많다. 소꿉놀이를 하거나 책으로 성을 쌓으면서 놀면 치워야할 것 천지다. 밀가루반죽 놀이를 하거나 물감놀이를 하고 나면 바닥에 얼룩이 잔뜩 묻는다.


 





이런 공간을 청소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밤늦게 돌아온 아빠에게 하라고? 바로 그렇다. 청소를 엄마가 맡게 되면 나중에 치울 것이 걱정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이와 노는 것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되도록 어질러지지 않는 놀이로 아이들을 유도한다. 아이의 자유로운 놀이 욕구를 억누르는 일이다. 아이가 지나치게 어지를 것 같으면 놀이 중간에 주의를 주기도 한다. 한참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에게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아빠가 놀이공간의 청소를 맡게 되면 어떻게 될까. 엄마와 아이는 정말 무책임하게 원 없이 놀아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은 한도 끝도 없이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빠가 청소하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이다. 아이의 두뇌를 자극하는 놀이를 원 없이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일에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많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12시가 다 되어 들어간다. 한밤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온 적도 많다. 어떤 날은 거실 바닥에 온통 시커먼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먹물자국이었다. 큰딸아이가 붓글씨 쓰기를 할 때, 둘째아들이 발바닥에 먹물을 묻히고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놀이를 했을 것이다. 먹물 자국을 지우는데 한 시간은 걸린 것 같다 (그때는 내가 ‘생활의 달인’이 아니었다. 과산화수소수를 사용하면 바닥에 묻은 먹물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어떤 날은 거실에 온통 팥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놀이를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 날은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밖으로 나와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우고, 그래도 진정이 안 되면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마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란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로 심하게 어질러진 날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