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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016년, 미국인들은 힐러리 클린턴보다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했다"고 얘기한다.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사실 2016년 11월, 미국인들은 트럼프보다 힐러리를 선택했다. 

 

힐러리 : 65,853,516표

트럼프 : 62,984,825표 

 

힐러리가 거의 3백만 표 더 득표했다. 득표율로는 48.5%대 46.4%이다. 트럼프의 승리는 주별 선거인단 독식 제도라는 독특한 미국의 대선 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단지 이기기 위한 게임을 벌였고 작전이 맞아떨어지면서 승리한 것이지, 그가 상대보다 더 폭넓은 지지를 미국인들로부터 받았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016년 트럼프 힐러리 선거결과.PNG

 

그럼 그가 어떻게 게임을 해서 힐러리를 이겼는지 복기해보자.

 

 

준비된 인물 vs 허당 : 누가 승자일지는 뻔했다

 

2016년 여름, 트럼프-힐러리 양자 대결이 결정되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은 이미 승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정치학을 전공했던 대학 시절이나 예일대 로스쿨 재학 중, 그리고 졸업 후 변호사 활동을 할 때도 여러 정치 단체나 사회단체에서 리더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빌 클린턴과 결혼 후에 그가 정치적 성장을 하기 위해 힐러리가 뒤에서 얼마나 큰 막후 역할을 했었는지도 여러 기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클린턴이 젊은 나이에 아칸소 주지사(1979-1992)를 하고, 42대 미국 대통령(1993-2001)까지 한 화려한 정치 이력 뒤엔 그녀가 숨은 브레인으로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정계에서 은퇴하자마자 ‘늦깎이 정치 신인’으로 데뷔하여 2000년 뉴욕 연방 상원에 선출되었고, 2006년에 재선에도 성공했다(미국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이다). 

 

2008년에 대권에 도전했고, 오바마의 벽에 막혔지만, 이후 오바마 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2013년까지 수행하며 세련된 외교술과 정치력을 선보였다. 오바마가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 극찬했던 것은 여러 번이다. 

 

트럼프 힐러리1.PNG

 

그에 비해 도날드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표면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남들을 위해서 일해 본, 또는 남들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그의 사업전략은 대부분 사기, 협박, 갈취, 소송(또는 맞소송), 파산 조작, 탈세에 바탕을 두었다(놀라운 것은 이 대부분을 최대한 합법적인 것처럼 가장해서 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깨끗하고 투명하게 검증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자기과시적 허풍과 쇼맨십만으로 언론과 방송의 한 귀퉁이를 타고서 자신의 존재감을 사회에 알린 인물 정도였다. 실제 게임은 해볼 필요도 없이, ‘힐러리 클린턴 vs 도날드 트럼프’, 누가 승자가 될 것인지는 뻔했다. ‘준비된 인물 vs 허당’, 당연한 도식이었다.

 

 

내세울 것 없는 공화당의 작전 : 집요하게 상대방 약점 공격하기 

 

트럼프와 공화당 측에서는 정면 돌파해서는 안 될 것을 잘 알았다. 트럼프가 후보의 자질로서는 워낙 내세울 것이 없었으니, 대신 상대 후보인 힐러리의 약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최대로 확대한다는 작전을 짰다. 

 

여기 또 하나 짚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2016 대선 이전에도 사실 힐러리에게는 아주 많은 적들이 있어 왔다는 점이다. 공화당 측에서는 언제나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중 특히 두 가지 주목할 만한 공화당의 공격 포인트가 있었다. 

 

하나는, 리비야 벵가지 미 대사관 습격 사건, 즉, 2012/9/11에 발생한 리비야 시위대에 미 대사관이 점거되면서 스티븐스 대사가 순직했던 사건에 대한 장관으로서의 차후 책임추궁이었다.

 

스티븐스 대사.jpg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이 시위대의 공격으로 불에 타고,

스티븐스 대사가 사망했다.

작은 사진 속 인물은 사망한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다른 하나는, 장관직 수행 시 미정부 공식 서버가 아닌 개인 서버를 통해 일부 이메일의 전송, 수신을 해왔었다는 사실이 내부 감사로 2015년 3월에 밝혀졌고 공화당 의원들은 이를 심각한 보안 위반으로 보고 공세를 벌여왔다. 

 

벵가지 사건의 경우, 두 번에 걸친 청문회와 몇 달간 조사가 이뤄진 후 하원 외무위원회에서 힐러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보고서가 2014년 11월에 발표되었는데도 공화당 의원들은 끈질기게 힐러리 개인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선 공화당 지도부 의원 케빈 매카시가 여론조사에서 힐러리가 앞서 나갈 때마다 이 방법으로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고 동료 의원과 대화한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들에게도 이건 단순한 정쟁의 도구였던 것이다.

 

케빈 매카시와 트럼프.PNG

케빈 매카시와 트럼프.

 

이메일 스캔들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국가기밀이 제3자에게 넘어간 사례가 발견된 것도 아니니 벵가지 사건보다 훨씬 경미한 것이지만, 공화당 측에서는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힐러리는 시종일관 자기는 단 한 번도 비밀이 담긴 이메일 내용을 개인 서버를 통해서 전송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민감한 내용의 정보는 비밀로 분류되지 않았어도 비밀에 준하여 취급하여야 한다는 다소 포괄적인 규정이 있어 힐러리의 발목을 잡았다. 

 

공화당에서 벌인 작전은 꽤 치사했는데, 힐러리에 대한 공세가 이뤄지는 기간에 원래는 비밀이 아니었던 메일들이 친 공화당 국무부 관리들에 의해 슬그머니 비밀로 전환된 것이다(2,100개의 메일 전환). (2016년 2월 뉴욕 타임스 보도) 

 

공화당은 비밀을 개인 이메일로 전송하지 않았다는 힐러리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선전하였고, 중범죄에 해당하므로 FBI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밀어붙였다. 이후 일 년 넘게 FBI 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2016년 7월, FBI 국장 제임스 코미(공화당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제임스 코미.PNG

 

“법적으로는 힐러리의 잘못을 물을 수 없으나, 그녀의 행위는 매우 경솔했다고 (careless) 생각한다.”

 

이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FBI의 수장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그의 임무는 중대범죄행위가 있었는지 조사하는 것이었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코미는 이후, 대선 2주 남겨놓고 판을 뒤흔드는 발언을 했는데,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그 외 힐러리를 옥죄었던 것들

 

이렇게 힐러리는 트럼프뿐 아니고, 공화당 측에서 전방위적인 공격을 당하고 난도질 당했다. 그럼에도 대체로 매번 침착하게 대응을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차분히 입장을 잘 설명하고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아닌 건 아니라 했다는 것이다. 그 이상 뭘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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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벵가지 사건에 대해 답변하는 힐러리.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문제는 이런 사안들이 계속 언론을 타며 힐러리에 대한 중도층의 비호감도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많은 미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냉정하고 차갑지?” 

 

이것이 바로 트럼프와 공화당에서 의도했던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영어에 Damn you do; damn you don’t. 라는 표현이 있다. “이렇게 행동해도 욕먹고, 저렇게 해도 욕먹는다”는 의미인데, 당시 힐러리의 상황에 아주 적절하게 쓰이는 말이다.

 

그녀는 당시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고 대응을 잘했음에도 욕을 먹었고, 만약 일반인들처럼 흥분하며 맞대응했다면 더 욕을 먹었을 것이다.

 

이 외에 힐러리가 불리했던 점(약점)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녀의 남편이 빌 클린턴이라는 점이다. 빌 클린턴은 민주당에서는 ‘신망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 받들었지만, 공화당에서는 ‘몹시 짜증나는, 탄핵되었어야 마땅할 전직 대통령’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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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빌 클린턴과 당시 영부인 힐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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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

 

1998년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상기해 보자. 공화당원들은 현직 대통령이 바람핀 것에 격분했고, 탄핵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비록 바람핀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해 특별검사에게 위증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 말고는 다른 부분에서 그가 대통령직 수행을 잘하고 있었다는 일반 국민들의 인식을 알아차린 상원의원들이 정치적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대권 도전에는 그 ‘원죄’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클린턴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짜증을 내고 있던 공화당원들—대략 미국 인구의 삼분의 일—을 아우르는 것은 매우 큰 과제였다. 

 

둘째 약점은, ‘너무 똑똑한 여자’라는 점이다. 첫 번째가 공화당원들에 대한 약점이었다면, 이 부분은 중도층에 대한 약점이다.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들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성차별이 심한 국가나 사회뿐 아니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오해 말길 바란다. 젠더 이슈에 대해 남성들이 하는 주장들이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결혼할 상대로 자신보다 잘난 여성은 부담스러워하듯, 대체로 남성들이 갖고 있는 경향성 혹은 본능(?)을 말한 것이다)  

 

여자들은 똑똑한 여자 자체에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오히려 똑똑한 여자를, ‘쎈 언니’로 인식하며 리더로 잘 받아들이기도 한다. 문제는 힐러리가 정치판에 들어왔을 때부터 공화당에서는 그녀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적 야망에만 사로잡힌 여자’라고 공세를 펴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 번의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세를 이겨내고 성공했지만, 중도층에는 공화당이 짜놓은 프레임이 깊게 각인되어 대선 과정에서 호감도 상승에 매우 걸림돌이 되었다. 

 

힐러리 입장에서는 억울할 노릇이다. 남편이 딴 여자랑 놀아나고 속을 썩였다. 남편에게 욕도 하면서 대판 싸우고, 몇 번이고 집안을 (백악관을) 뒤집어 엎어버렸고, 맘 같아서는 기자들 앞에서 “나 저런 개쉐끼랑 못 살겠어요” 선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래도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 그리고 내 체면도 있고 하니, 차마 그러진 못하겠고 화가 오르는 것을 최대한 억누르며 “나는 그래도 내 남편 옆에 언제나 함께 할거여요”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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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람들은 그걸 갖고 뭐란다. 

 

“이중인격자”

 

“그깟 정치가 뭐라고 가식적으로 연출만 하냐. 정 떨어지고 신뢰 가지 않는다.”

 

등 비난이 넘쳐난다. 기가 찰 노릇이다. 힐러리는 불륜의 피해자이며 사실상 제일 피해자인데, 그런 피해자를 잡아 뜯어먹고 있다니... 이런 정서는 남자들보다 주로 여자들에게 더 퍼져 있었다. 전술했듯, 남자들은 ‘너무 똑똑한 여자’라 무의식적 위협을 느끼며 호감을 안 주고, 여자들은 그녀의 감정을 해부하고 ‘가식’이란 말을 붙여가며 자신이 느낀 비호감도를 세련되게 합리화했다. 그리곤 주변 다른 여자들에게 퍼뜨렸다.

 

 

호감과 비호감은 논리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맨날 맞는 말을 하긴 하는데 왠지 듣기 거북하고 불편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싸가지 없다’ 혹은 ‘재쉅다’라고 표현한다. 결국에는 그의 말이 맞았어도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사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름의 이유를 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맞는 말이지만, 지금 할 말은 아니지"라며, 즉, 말에 일리는 있으나, 그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기에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건 사실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는 이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확증 과정에 들어간다. 

 

똑같은 행동이나 현상을 보고도 우리는 정반대의 해석을 하기도 한다. 호감과 비호감을 느끼는 행위는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작위적이기도 하며, 그 시점에 주변에 돌아다니는 정보나 자기 편 사람들의 판단을 무분별하게 그대로 차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혹시라도 “많은 사람들이 힐러리를 비호감으로 부르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을 거야, 마치 내가 아는 누구누구가 비호감인 것처럼”이라는 생각의 경로와 비슷한 경로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호불호의 감정은 조작이 무척 쉽다. 간혹 엉뚱한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그걸 인정하고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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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싫은 건 싫은 거다. 다만 내가 이 지점에서 말하고 싶은 건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쉽게 조작이 되고, 그걸 깨닫는 이들은 생각만큼 많이 않다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2016년 미국 대선을 결정지은 주요 요소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작전 방향과 무기

 

트럼프는 경력 면에서도 내세울 것이 없고, 반대편을 혐오하는 메시지만 계속 내보낼 뿐 정책적인 비전을 딱히 제시할 것도 없었다. 그의 추악한 과거는 숨길 수도 없고, 별로 숨기려 하지도 않아서 그에 대한 비호감도는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 그의 지지자들도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재밌고 속 시원한 것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인종 차별, 여성 차별, 이슬람 차별 발언을 그가 전국적으로 해주니) 

 

이런 이유로 트럼프의 작전은,

 

①힐러리의 비호감도를 계속 증가시키는 것

②자신의 지지층을 더욱 확고히 결집시키는 것 

 

이 두 가지였다. 

 

대선에 임하면서 트럼프의 가장 큰 무기는 ‘져도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관종이라, 자기가 어떤 개소리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 개소리에 책임질 필요도 없다. TV 셀럽으로서 자기가 장차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흘리며 간을 보았는데, “아, 이것 재밌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적당한 개소리를 하며 관심을 끌다가 사람들이 날 찍어주면 좋고, 아니더라도 그렇게 해서 올라간 인지도로 앞으로 사업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도 관종짓을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공화당 경선에서 굳이 이길려고 한 건 아니고, 하고 싶은 개소리는 실컷 해보자는 마음으로 판에 들어갔는데, 이건 뭐 개소리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통한다는 것을 보았다. 

 

대선 본선에 와서도 그 패턴은 이어졌다. 혹자는 그가 직업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관계나 눈치 볼 것 없이 자기 정책을 펼 것이라 했는데, 그 말은 반은 맞다. 그가 직업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선거에서 져도 된다. 반면에 힐러리는 이겨도 지는 것 같은 찜찜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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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토론회에서도 그랬다. 공화당 말고도 중도나 언론에서도 힐러리의 말에는 아주 사소한 트집을 잡고 팩트체크나 그녀의 주장에서의 논리적 결함 여부 철저히 따졌는데, 트럼프의 발언에는 대체적으로 관대했다. 

 

토론회에 임박해서도 온갖 헛소리를 해대서, 토론회에서도 그러기만 해봐라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실제 토론회에서 단지 헛소리를 별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론은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고, 일반인들은 “어? 트럼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라 반응했다. 한쪽은 져도 이기는 게 되고, 반대쪽은 이겨도 지는 게 된다. 

 

 

그렇다 해도, 당시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시각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시각이다. 그 당시에는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는 예후가 어디에도 관측되지 않았다. 선거를 한 달 앞둔 상태에서도 거의 모든 여론조사 기관에서 힐러리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럼프는 시종일관 뻘짓을 계속하고 있었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그와 손절하는 뉴스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부시 가문(아버지 41대 대통령, 아들 43대 대통령)은 트럼프를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존 메케인, 미트 롬니 등 전 공화당 대권 후보들도 “트럼프를 지지할 순 없다. 그저 양심에 따라서 투표하라.”고 발언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전 대통령과 대통령 출마에 나섰던 공화당 인사들이 일제히 보이콧 하는 현 대권 후보라니. 트럼프는 물론 트럼프 다운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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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루저들이 뭐래니."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유력신문사들은 각자의 지지후보를 공개한다(그 외에도 공개하는 곳들 꽤 있음). 통상 민주당,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가 반반으로 나뉘는데, 2016년에는 97개의 신문사 중 힐러리 지지는 57개, 트럼프 지지는 단 2개로 나왔다(이 신문사 2개도 대부분 미국인들이 처음 들어보는 신문사였다 / 링크).

 

26개는 ‘지지후보 없음’이었고, 3개 신문사는 ‘트럼프는 절대 안 됨’이라는 선언을 했다. 이 3개 중 하나가 당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했던 USA Today이다. 미국 여행 해보신 분들 아마 한두 번은 보았을 수도 있다. 아침마다 호텔 객실에 넣어주는 신문인데, 이 신문은 절대 중립의 논조를 언제나 고수해왔던 신문이다. 

 

따라서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에 비해 기사가 매우 밋밋하다고 평가를 받던 신문인데, 이 신문마저 모든 정치 사안에 중립을 지킨다는 전통을 깨고 2016년 9월에 낸 특별 사설에서 "No Trump"를 선언해서 눈길을 끌었다. 저런 인종차별자, 범법자, 사기꾼, 난봉꾼, 거짓말쟁이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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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9일 USA TODAY 특별 사설.

사설에는 “모두 투표하자, 트럼프한테는 말고”라는

문구가 써있다.

 

2016년 10월이 되고 대선까진 한 달만을 남겨놓으며, 트럼프는 가는 곳마다 이번 선거는 썩었다(Rigged Election)는 메시지를 뿌리고 다녔다. 조직적인 부정이 이루어지고 있고 자기가 당선이 안 되면 그건 부정선거라고, 힘을 모아서 싸우자고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이걸 보며 많은 이들은 “아하, 트럼프가 안 되겠구나”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이런 작전을 쓰는 건 처음도 아니다(자기가 이기면 정당한 거고, 지면 부정이 있었던 거고). 

 

 

미국인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공화당의 집단 최면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가지 밝혀 둘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공화당의 힐러리에 대한 온갖 악선전과 비호감 캠페인 전략은 시간이 지난 후 미국인들이 알게 된 것이 아니고, 이미 2016년에 많은 이들을 통해서 회자되었던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 특히 사오십대 이상 유권자들은 힐러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화려한 경력, 능력, 그리고 공화당에서 억지스런 악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 까지도. 하지만 쿨한 척 하는 자신들이 이미 집단적으로 공화당의 최면 작전에 말려 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은 잘 몰랐던 것 같다. 

 

트럼프는 어떻게 해도 자기가 유권자로부터 호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힐러리의 비호감도를 올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트럼프 삿대질.PNG

 

"내가 나쁜 놈이라고? 쟤 봐, 나 못지않게 쟤도 나쁜 년이야.“

 

라는 게 그의 메시지였는데, 그게 도대체 온당한 말인가? 예를 들어, 이메일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며 Lock her up! (그녀를 감옥으로!) 구호를 외쳤는데, 위에서도 말했듯, 위법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을 뿐 더러, 백번 양보해 설사 보안규정 위반 사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고나 벌금형 정도로 끝날 정도의 사안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판돈을 올렸다. 그는 공개적으로 러시아 해커들에게 청원한다. 

 

"러시아의 유능한 해커들이여, 힐러리의 이메일 계정을 해킹해서 그녀의 이메일들을 세상에 공개해주시오!" 

 

이건 정말 뭐 하는 짓거리인가? 적성 국가(아무리 좋게 말해도 경쟁 국가)의 해커에게 자국의 대선 후보 메일을 해킹해 달라니... 

 

참고로, 대통령 취임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로도 그가 저지른 각종 범죄는 매우 중대하다. 대통령 재직 중 국가 기밀을 자기 임의로 빼돌려 자기 미래 사업 계획에 썼고, 적성국가인 러시아의 대사에게 기밀을 빼돌렸다. 그리고 최근 나온 따끈따끈한 소식에 의하면 비밀에 해당하는 몇만 건의 문서를 자신의 플로리다 호텔 마라라고로 빼돌리고 임의로 파기해 왔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상식도 없는 짓을 계속하며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이에, 사람들은 점점 힐러리에 정말로 잘못이 있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평생을 민주당원으로 선거운동도 활발히 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래, 트럼프 말이 좀 심하긴 하지만, 나도 사실 힐러리에 그렇게 정이 가진 않더라."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그래도 내가 트럼프를 찍을 순 없고... 어떡하냐, 마음 내키진 않지만 힐러리 찍어야지." 

 

이렇게 나왔지만, 이렇게 열성적인 지지자가 미적지근한 지지자로 변하는 사이에, 원래 미적지근한 힐러리 지지자들이나 웬만하면 힐러리를 찍었을 만한 중도 측에서는 이번엔 찍을 사람도 없으니 투표를 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생겨났다. 

 

"내가 힐러리 좀 아는데 말야, 사실 난 그녀를 아주 좋아하진 않아. 그런데 찍어야 한다면 찍지 뭐" 이런 식의 발언은 생각보다 주위에 있는 중도층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이건 지지 의사표시가 아니고 사실상 반대에 가까운 말이다. 더구나 이렇게 양쪽 후보의 기본 자질 차이가 큰 경우는 말이다.

 

최악의 선거.PNG

듀엣 아님 주의.

 

2016년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역대 최악의 선거다. 뽑을 사람이 없다’라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규정한 데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트럼프의 작전이었고, 그것이 그대로 먹혀들어 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작전에 걸려들어 간 것을 모른다. 

 

내가 2016년 전후로 가장 싫어하게 된 한자 성어는 ‘오십보백보’다. 물론 영어에 그런 말은 없지만, 그런 뉘앙스를 담은 말들은 넘쳐났다. 특히 기독교계에서 말하길, 

 

"여러분, 트럼프가 죄인인 건 맞습니다. 그런데 힐러리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 다 죄인입니다." 

 

아, 띠발... 지랄. 최근 몇 년 동안, 모태신앙인 내 입에서 목사들 그리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향해 욕을 하도 날려대서, 내 이러다가 지옥 가나 몰라.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재명 후보에 대해 한국에 계신 분들만큼 잘 모르고, 그가 노무현, 문재인의 업적을 얼마나 잘 이을 수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편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상태라면, 일단 그를 신뢰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그가 완전한 해답이라 믿어서가 아니다. 그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그에게 비판을 해야 한다면 해야지. 그런데 당선 후에 하면 되지, 그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지금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거 직전 터진 두 사건 : 트럼프는 멀쩡, 힐러리에겐 결정적 타격 

 

2016년 10월, 선거를 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두 개의 큰 사건이 터진다. 

 

하나는, Access Hollywood 사건으로 불리는데, 트럼프가 과거 Access Hollywood 진행자와 방송 전후에 농담 따먹기 했던 것이 녹취되어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요약하면,

 

”내가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따먹었는데 유부녀도 상관없다. 돈으로 때우면 다 된다. 아무튼 나 같은 사람이 여자들 ㅂㅈ를 꽉 쥐어주면 (grab them by the pussy) 깜빡 죽어서 나한테 넘어온다.“ 

 

이런 내용이다. 이날 이 내용이 저녁 뉴스 시간에 보도되는데 많은 공중파 방송에서는 보도 직전 미성년자에게 매우 적합하지 않은 내용이 있으니 부모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경고문까지 붙였다. 그나마도 p(한국말로는 ㅂ)로 시작하는 단어는 뉴스에서 사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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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 Hollywood에 트럼프가 출연했던 모습.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주위 사람들만 무안해 했다. 이 발언의 장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아주 떳떳했다. 물론 공화당에서는 과거 발언을 불법 녹취한 걸 누가 왜 하필 이 시점에 공개했을까, 그 의도가 불순하다는 말이 나왔다. 

 

가장 중요한 일반 유권자들은, 그동안 1년 반 동안 트럼프의 개차반 짓을 여과 없이 보면서 면역이 되었는지, 이제는 이 정도 발언이 하나 더 공개된 것에 크게 영향을 받은 눈치가 아니었다. 반 트럼프 진영에서는 다시 한 번의 충격을 받으며 “절대 트럼프는 안돼.” 이랬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은 “뭘 그 정도 갖고 호돌갑이냐. 지금 와서 이런 지저분한 걸 들춰내는 놈이 나쁜 놈” 이랬다. 

 

그로부터 며칠 뒤 공화당에서 반격이 나왔다. 다른 하나의 큰 사건을 벌였는데, 선거를 바로 2주 앞두고 코미 FBI 국장이 (석 달 전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 조사 후 법적으로 그녀를 처벌할 수 없지만, 그녀의 행동이 맘에 안 든다는 발언을 한 그 장본인) 새로운 자료가 나와서 힐러리의 이메일에 대한 조사 재개가 필요하다라고 국회에 편지를 보냈다. 많은 이들은 이때 혼란스러워 했다. 힐러리 지지자들은 괜히 불안했고 짜증 났다. 

 

“아니, 그동안 2년 동안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 놓고, 그리고 얼마 전에 법적으로 처벌은 못한다며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그러는 거냐.” 

 

중도층에서나 공화당 지지자들은, 

 

“아하 코미가 뭔가 새로운 단서를 찾았구나. 기대된다.” 

 

이런 반응이었다. 선거 직후, 코미는 다시 “재조사에서 새로운 내용이 나오지 않았고, 조사는 종결되었다.” 발표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이것은 일개 FBI 국장이 미 대선을 좌지우지했던 희대의 사건으로 남았다. 많은 분석가들은, 이 코미의 행동이 힐러리에게 향하던 중도층의 표를 막아버리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자, 이렇게 해서 2016년 11월 6일, 그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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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미디어펜>

 

물론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수만, 아니 수백만 개의 변수가 작용하여 최종 결과로 이어지는 것으로 몇 개 단편적인 관측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가짜뉴스의 온상이자 혐오의 전도사 역할로 전락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의 역할도 컸고, 푸틴의 절친 트럼프를 밀어주려 애썼던 러시아의 막후 여론 조작도 빼놓을 수 없다.

 

공식적인 결과로 보면, 트럼프는 304표의 선거인단, 힐러리는 227표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처럼 단순 '다수결'로만 선거를 따지면 이건 힐러리의 승리여야 할 텐데, 미국의 대선 제도는 전체 유권자에게 지지율이 높은 것보다 각 주 안에서 지지율이 높아 각 주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게 승리의 조건이기 때문에 트럼프가 승리했다(선거인단의 수는 각 주마다 다르다).

 

미국 전체에서 지지율은 더 낮았지만, 미국 특유의 대통령 선거 제도로 인해 트럼프가 승리한 이런 경우는 실제로는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2000년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가 맞붙었던 대선에서 처음으로 발생했고, 그다음으로 발생한 게 2016년이었다. 

 

(2000년 대선 : 민주당 알 고어 50,999,897표 득표로 선거인단 266 확보, 공화당 조지 부시 50,456,002표 득표로 선거인단 271 확보)

 

304(트럼프) 대 227(힐러리)가 커 보이지만 사실은 선거인단이 적당히 큰 주 두세 곳에서 뒤바뀌면 전체 결과가 바뀌게 될 정도로 근소한 차이다. 예를 들어, 펜실베니아(선거인단 20), 미시간(선거인단 16), 오하이오(선거인단 18), 위스컨신(선거인단 10), 이 네 곳에서는 원래 힐러리가 무난하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던 곳인데, 모두 근소한 차이로 트럼프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2016년 11월은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

 

<계속>

 

 

소리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