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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20. 금요일

파토









오래전 캐나다에 어학연수하러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서부의 밴쿠버에서부터 동부의 토론토까지 이사를 가게 됐다. 말이 밴쿠버에서 토론토지 나라가 원체 크다보니 거리로 따지면 거의 울나라에서 베트남까지 가는 거와 비슷하다.


어학 연수생이라 이사짐이란 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달 살았다고 이민가방 외에 잡다한 짐이 꽤 늘어 있었다. 허나 돈도 없고 교통편도 여의치 않아서 결국 토론토까지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는 걸로 결정했다. 3일 동안 버스를 8번 갈아타면서 가는 길고도 무지막지한 여행 일정이었는데 나름 새로운 경험이라는 생각에, 또 이번에 안 해보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나 싶어서 독한 맘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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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길찾기로 되짚어 본 우원의 여정. 

47시간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3박 정도 걸렸다.


그렇게 여행용 기타와 캠코더 포함해 8개나 되는 크고 작은 가방을 지고 이고 메고 굴리고 차면서 터미널로 꾸역꾸역 가서 버스를 탔다. 첫날은 기대대로 나름 흥미로왔다. 록키 산맥을 지나며 그림같은 풍광도 보고, 이어지는 사막같은 초원들, 평생 처음 보는 사방으로 뻗은 지평선 등. 


하지만 지평선이 등장한 이후로는 풍경이 전혀 변하질 않는 거다. 초원, 지평선, 구름.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서 창밖을 봐도 마치 정지해 있었던 것 같이 초원, 지평선, 구름. 게다가 침대 차도 아닌 것에 계속 앉아 자면서 갈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행기 이코노미 석 타고 3박 4일 동안 간다고 생각해 보면 대충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될 거다. 


와중에 새벽 4시에 깨워서 차 옮겨 태우고, 기다리는 동안 아침식사라고 베이컨과 계란을 먹고 있노라면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임에도) 빈속에 느끼함이 하늘을 찌른다. 젊었을 때니 했지 지금 같으면 중간에 죽었을 수 있다. 와중에 어느 마을 휴게소에서는 네이티브 어메리컨(인디언)으로 오해를 받는 등 흥미로운 사건들도 있었지만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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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풍경이다. 계속. 끝없이. 화성도 이것보다는...


여하튼 이 개고생을 하고 토론토 비지니스 타운 한 가운데의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 오전 10신가에 떨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서 있자니 막막했다. 인터넷에서 싸구려 호텔을 예약하고 오긴 했는데 거기서 1km 쯤 떨어진 곳이었다. 이 가방 8개를 들고 1km를 어떻게 걸어 간단 말인가. 


게다가 3일간 잘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컨디션도 꼬라지도 엉망이고, 마 눈앞이 캄캄한 상황이었다. 여하튼 거기 계속 있을 순 없으니 이제 저 짐들을 지고 이고 메고 굴리고 차면서 길거리로 나왔다. 어떻게 몇십 미터인가 갔더니 도저히 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계였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은.


한 20대 중후반 쯤 됐을까. 깨끗한 흰 드레스를 아주 포멀하게 차려입은 금발 백인 여자가 내 앞에 서서 방그레 웃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거나 아님 도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한 건가, 여겼을 성 싶은 분위기다. 그래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도와줄까?" 하는 거다.


말은 고맙지만 뭘 어떻게 도와주려는 걸까? 단순히 길을 못찾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멋적게 마주보고 미소를 지었더니, 이 여자분, 그런 차림을 하고는, 내 가방들 중에 3개를 훌쩍 둘러멘다. 그리고는 날보고 당신이 나보다 힘이 셀 테니 5개 들란다. 어디로 가냐고 해서 어느 호텔이라고 했더니 안다면서 앞장서는 거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10분을 함께 걸어서 호텔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땀을 닦으며 내가 그 가방들을 호텔 안으로 들고 들어갈 때까지 정말 천사같은 웃음을 지으며 문을 잡아 줬다. 그리고는 별 생색도 없이 손 흔들고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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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런 (류의) 외모에 저런 (류의) 옷을 입었었다. 

그리고는 내 그리 깔끔하지 않은 가방들을 힘차게 들쳐 멨다.


그녀가 내게 실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보다 생면부지의 낯선 이를, 그것도 짐을 저렇듯 대책없이 들고 다니는 좀 덜 떨어진 동양인 남자를 이렇게까지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고마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왜? 드레스도 구겨졌을지 모르고 30도에 가까운 더위에 화장도 조금은 지워졌을텐데. 에너지와 시간도 소모했고. 그냥 모르척 지나친들 비난은커녕 신경도 안 썼을 텐데.


그 이후에 이런 일까지 경험한 적은 없지만 비슷한 소소한 일들은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이런 행동이 몸에 배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건 단순한 친절이나 에티켓으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습관화된 공감력의 발현이다. 내가 저 상태면 얼마나 힘들고 곤란할까, 상상하면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저러는 거고 그게 문화로 굳어진 거다. 그래서 자신에게 큰 해가 되지 않는 한 힘을 나눠 주거나 좀 기다려 주거나 시간을 약간 할애하는 정도의 도움을 주는 건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 정말 나이스하다. 이렇게 나이스한 게 선진국이구나. 천국같이 완벽하진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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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을 기회가 없던 분들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경우

문을 잡아주는 저 남자는 대개 저 여자의 남자친구도 건물 수위도 아니다. 

그저 먼저 나갔는데 누가 뒤따라오니 면전에서 문이 쾅 

닫히지 않도록 잡고 있는거다. 때로는 줄줄이 나오는 사람들

을 위해 문을 한참 잡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행동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는 걍 기본이다.

(단, 이 특정한 씬에서는 저 여자가 킴 카다시안이라 

그리 순수한 의도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 살면서 우원에게 잘 해 준 사람들은 많다. 은혜에 가까운 도움을 준 분들도 있다. 그 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서 참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큰 도움이나 호의를 받는 것들도 고맙지만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친절함과 배려를 받는 것도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소중한 일이다. 특히 낯선 이들에게서 받는 친절은 작은 것이라도 맘에 깊이 남는 경우가 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낯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란 건 나와 아무런 실제적, 감정적, 상징적 이해 관계가 없는 존재다. 내가 좀 불편하건 안하건, 막말로 죽건 말건 그들의 삶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 또 내 주변에 남아 있 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친절이나 호의를 배풀었을 때 언젠가 그 대가나 사례를 받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가 얻는 것은 현장에서의 땡큐와 미소 정도 뿐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는 곳에서 살다 보니 나도 결국 일상적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이나 도움을 베풀게 됐다. 그러다보니 그런 행동을 할 때 마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처럼, 더 좋은 사람인 것처럼 뿌듯하게 느껴졌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게 굉장한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스스로 더 낫고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이 그리 자주 있을까. 대체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쌓고 큰 성과를 이뤄야 그런 느낌을 '일상적으로' 가질 수 있겠냐는 거다. 


근데 이렇게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함으로써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값진 느낌을 열라 쉽게 얻어낼 수 있더란 말이다. 내 친절을 입은 사람 이상으로 베푼 내 기분이 더 좋아지는 건데 괜히 듣기 좋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팩트다. 이를테면 약간 의기양양한 기분도 들고 뭐 그런 건데, 이게 남보다 내가 잘나거나 남을 이겨서 의기양양한 게 아니라는 점이 포인트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란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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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은 사실 끈끈한 것, 소위 한국인의 정 머 이런거 별로 안 좋아한다. 특별히 안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리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없고 그 속에서 아주 편하지도 않다. 이런 끈끈한 관계는 정과 안면에 치중하다보니 상대에게 기대가 많아지기 쉽고 자칫 떼를 쓰거나 폐를 끼치는 일이 생겨서 뒤끝이 안좋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아가 자칫 부패나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 다들 아는 바일 것이다.


머 그렇다고 그런 걸 다 없애 버려야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럴 방법도 없거니와 이런 끈끈함의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친한 사람들과의 끈끈한 관계와 낯선 이들과의 매몰찬 관계의 차이를 좀 좁히면 어떻겠냐는 거다. 우리는 낯선 사람, 모르는 사람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몸이 부딪혀도 생까고 넘어가고, 엘리베이터에서 눈 인사라도 하거나 대화하는 사람도 없고, 마트에서는 카트를 아무렇게나 세워서 다른 사람 진로를 방해하고, 문도 물론 잘 안 잡아주고, 운전하면서 깜빡이 넣고 진로를 알려주는 기본도 지키지 않는다.


근데 울나라 사람들이 인간성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해본 적 없고 할 줄 모르고 그래서 이런 부분들에서 나이스하게 행동하고 배려하는 게 서로간에 얼마나 좋은 느낌을 만들어 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각성해서 용기를 내거나 나이스한 사회에 가서 배워오지 않으면 어렵다. 


하지만 일단 한번 깨닫고 행동하다 보면 곧 일상이 된다. 우원은 저 위의 킴 카다시안 사진처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문 잡아 주는 게 습관이다. 한국에서는 나를 위해 저래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안 그러면 내 맘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의 면전에서 문이 닫히게 하고 그 사람이 다시 힘겹게 문을 열도록 만드는 게 스스로 너무 냉정하게 느껴진다. 남이 하고 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에유 뭐 그렇게까지, 싶을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늘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 어딜 들어가거나 나갈 때 다음 사람 면전에서 문고리를 퍽 놔 버리는 일은 거의 없지 않냐는 거다. 그래서 우리와 저 사람들간의 차이는 저 행위 자체를 하고 안하고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행위가 적용되는 대상이 일행이나 아니면 낯선 사람이냐에 있을 뿐이다. 물론 일행이건 낯선 이건 눈 앞에서 문이 닫혀 버리면 불편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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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자칫 이렇게 되지 않도록 신경써 주는 게 나이스함이다.

내 친구든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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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에도 상식적인 룰이 있다. 이렇게 멀리서부터

문을 잡아주면 뒤에 오던 사람이 서둘러야 돼서 불편하기 때문.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그렇다고 뒷 사람이 화를 내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의도 자체는 나이스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의 덕목인 정 혹은 끈끈함을 친한 사람들끼리 꽁꽁 뭉치는데만 발휘하는 대신 낯선 사람들과 조금 더 나누면 어떻겠냐는 거다. 우리는 마치 우리 민족만 인간적인 정을 갖고 있고 서양인들은 차갑고 냉정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마음 씀씀이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는 것 뿐이다. 토론토에서 내 짐을 들어준 그 여인네의 행동은, 우리나라에서도 꽤 친한 사이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게 그들 식의 정이나 끈끈함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래서 이제 서로 그러면서 살다 보면 스스로 자존감도 높아지고 또 타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좀 깊어지고, 나아가 뭔가 갠찮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길 수 있다. 공동체 의식이니 시민의식이니, 심지어 애국심 등은 그런 걸 가져야 한다는 당위나 슬로건, 형식에의 강요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는 현명한 방법론이 필요하며 그 방법론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실천적 생활 속에서 구현 가능하다.


비록 사회는 각박하고 정치는 실망스럽지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곳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이것저것 했으면 좋겠다. 나이스하게.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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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