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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ation)’


이라는 말이 있다. 1845년 미국 언론인 오설리번(John L. O'Sullivan)이 한 말로,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 신의 섭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은 미국의 팽창주의 야망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미국의 영토 확장은 신이 미국인에게 부여한 신성한 사명이며, 미국적 자유를 전 세계에 확산하려는 숭고한 정신이라는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렇게 선동되었고, 그렇게 믿었으며,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


1823년 12월 먼로 대통령이 발표한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도 미국의 팽창 욕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먼로 독트린은 3대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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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제국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불간섭
2)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
3) 아메리카의 식민화에 대한 반대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질서를 주도한 나라는 러시아로, 러시아는 프랑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과 신성동맹을 맺고 중남미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미국이 유럽 정세에 전혀 끼어들 수 없는 상황에서 중남미에 대한 유럽의 간섭은 미국의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이런 유럽의 중남미 간섭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나온 것이 먼로 독트린이었다.


미국은 제3대 제퍼슨 대통령 시절에 프랑스로부터 214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루이지애나 지역을 1500만 달러에 구입했다. 대륙 국가를 향한 첫발을 내딘 것이다. 미국은 영토를 일약 두 배로 늘리면서 오늘날의 중부 지역을 확보했다.


미국의 서부 팽창은 1840년대에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곤 황금열풍이 번졌다. 서부 이주는 1849년에 절정에 이르러서 그해에 이주해온 사람들을 ‘49년 사람들(Forty-Niners)’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 연방 정부가 싼 값으로 불하하는 토지를 차지하려는 사람들, 새롭게 성장하는 서부에서 상업으로 성공하려는 사람 등 구성이 다양했다.


이주민들은 전문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무리를 지어 포장마차를 이끌고 서부로 이동했다. 서부의 대평원과 사막을 가로지르고 로키산맥을 넘는, 수천 킬로미터에 걸친 험난한 길이었다. 그 길에는 질병과 기아 등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재도구를 실은 포장마차를 몰고 가축을 이끌고, 오리건 통로, 산타페 통로, 캘리포니아 통로 등 여러 통로를 지나야 했는데, 도중에 인디언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단편소설 <민중의 지도자>에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서부개척에 대한 진한 향수를 전한다. 책에서 어린 조디(Jody)의 할아버지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서부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이끌고 인디언과 투쟁했던 젊은 시절을 반추하며, 목장주인인 사위가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그에게는 서부로의 이주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뭉쳐 무엇인가 영웅적인 일을 성취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바다가 앞길을 막고 그에게 더 나아갈 길을 없애버리면서 영웅적인 삶은 막을 내렸다. 그의 눈에 비친 현재의 사람들은 그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작은 일상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조디는 침대에 누워서 인디언들과 버펄로들의 믿기 어려운 세계를, 영원히 사라져버린 세계를 상상한다. 그는 그 영웅시대에 살았더라면 하고 바랐지만 자신이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땐 오늘날에는 알 수 없는 신념에 투철한 사람들이 살았다. 조디는 넓은 평원과 그 위를 지네처럼 움직이는 마차들을 생각했다. 그는 거대한 흰말을 타고 민중을 인도하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의 마음속으로 거대한 환영들이 지나갔다. 그것들은 대지 위를 대열을 맞춰 행진해서는 사라져 버렸다.


할아버지는 사위와 손자에게 서부 이동을 끝없이 이야기함으로써 그 사건을 정형화하고 자기합리화 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며, 인디언들에 대한 죄의식을 탈색시킨다. 그의 이야기에서 인디언과의 투쟁은 낭만적인 사건으로 각인되며 그것은 그대로 손자인 조디에게 낭만적인 모험으로 왜곡된다.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하면서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무수한 만행은 지워진다.


조디는 인디언 학살을 자신이 쥐를 잡는 행위와 동일시한다. 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할아버지의 위대한 여정을 막은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렇게 할아버지의 여정은 손자와 정신적으로 이어진다. 여정은 미국이 19세기 말에 행한 제국주의적인 해외 팽창을 의미하며, 조디는 새로운 시대의 콜럼버스다.


19세기의 많은 소설들에서 서부는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브렛 하트(Francis Bret Harte)는 이런 낭만적인 서부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황금열풍 시대의 서부 개척지의 모습을 미국 전역에 각광받게 만들었으며, 훗날 서부영화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의 소설은 도박사, 매춘부, 주정뱅이, 여교사, 악당, 보안관, 술집여자 같은 서부영화에 거의 어김없이 나타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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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서부소설 속 낭만적인 묘사 이면에는 비극적인 모습이 숨어 있다. <로링캠프의 행운>에는 아이를 낳은 매춘부 ‘체로키 샐’에게 광산촌 사람들이 보여주는 변화를 그리고 있다. 아이로 인해 광산촌은 하나로 뭉치고 아름다운 세계로 변하지만, 아이는 홍수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아이는 악으로 물든 광산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포커플랫의 추방자들>은 한 겨울에 포커플렛에서 추방된 무리들이 눈보라 속에서 오두막에서 벌이는 사투를 그리고 있다. 매춘부들과 도박사가 보여주는 숭고하기까지 한 인간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낭만적인 서부의 이미지 뒤에 깔린 냉혹한 현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낭만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서부는 미국의 팽창주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이다. 문학과 영화에서 서부개척은 흔히 영웅적인 행위로 묘사되지만, 미국 사회가 지닌 탐욕의 다른 이름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텍사스 합병과 멕시코 전쟁이다.


미국이 서부 개척을 진행할 당시 루이지애나 서쪽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땅은 캐나다와의 국경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멕시코 영토였다. 미국이 대륙국가의 꿈을 완성하려면 멕시코가 차지한 그 거대한 지역을 장악해야 했다. 텍사스의 합병과 멕시코 침략은 미국의 대륙 정복의 완결판이었다.


오늘날의 텍사스는 원래 1822년에 독립한 멕시코의 땅이었다. 건국 초에 이 땅을 개척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는 미국인들의 이주를 환영했다. 주로 남부의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를 이끌고 대거 이주해 와서 정착했는데, 1835년 무렵에는 그 수가 백인과 흑인을 합쳐 3만 5000명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멕시코 정부가 미국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조처를 취하자 1836년에 미국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포했다. 멕시코는 대통령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진압에 나서서 알라모 전투와 골리아드 전투에서 반란자들을 진압하고 항복한 사람들을 대부분 학살했다.


시인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 34(일부)에서 1836년 3월 말에 일어난 골리아드 학살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무도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미쳐서 무력하게 돌진했으며 어떤 이들은 굳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몇 사람은 관자놀이나 가슴을 맞아 즉시 쓰러졌으며,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함께 누워 있었다.
불구가 되고 난도질당한 이들이 흙 속에 파묻혔고, 새로 온 이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보았다.
죽어가는 이들이 기어 나오려고 애썼다.
이들은 총검에 찔려 죽거나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다.
열일곱 살이 채 안된 젊은이가 암살자들을 그들을 떼어놓기 위해 두 사람이 더 올 때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세 사람은 옷이 온통 찢어졌으며 그 소년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열한 시에 시체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것이 412명의 젊은이들이 살해된 이야기이다.


스스로 ‘세계인(a kosmos)’이라고 자처하는 휘트먼은 완강한 국수주의자라 할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다. 그는 이 시에서 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 채 멕시코 군대가 자행한 학살만 고발한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멕시코의 주권을 침탈한 명백한 반란사건이다.


이 패배 이후 미국인들은 샘 휴스턴 장군의 지도하에 4월 21일 산 화킨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멕시코 대통령을 포로로 잡는 뜻밖의 행운을 얻는다. 결국 멕시코는 텍사스의 독립을 약속했고 텍사스는 독립하자마자 미국과의 합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텍사스가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예주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북부인들의 반대로 합병문제는 지지부진하게 전개되다, 마침내 1845년 12월 미국에 합병되었다.


텍사스 합병은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탈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줬다. 이는 멕시코 전쟁과 하와이 침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현지에 있는 미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고 그 다음에는 미국과 합병하는 방식이었다.


텍사스 합병은 멕시코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양국을 긴장시켰다. 멕시코는 항의의 표시로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미국의 텍사스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발을 미국은 역이용했다.


당시 서부의 멕시코 영토에는 정착과 상업을 목적으로 한 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지금의 뉴멕시코에 있는 산타페는 멕시코 정부가 미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발전시켜, 서부와 동부 사이의 교역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캘리포니아 지역 역시 고래잡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 미국인들이 정착하였으며, 수가 늘어나자 그 지역이 미국에 합병되기를 바랐다.


미국 정부는 그곳 미국인들이 멕시코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면 지원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멕시코와 협상을 통해 그 지역을 사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멕시코가 거절했고, 1846년 5월에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맞춰 캘리포니아에서는 미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선언했으며 미국은 군대를 파견해 그들을 지원하고 그해 가을에 그곳을 완전히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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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장군이 이끄는 미국 군대는 배로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항구에 도착해, 그곳을 거점으로 수도 멕시코시티로 진격해 점령하고 멕시코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멕시코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1848년에 멕시코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맺어 서부에 있는 광활한 땅을 미국 영토에 편입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 와이오밍의 7개 주를 새로 건설하면서 미국 지도를 거의 완성하였다.


미국의 서부 점령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인구 구성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곳에 거주하던 멕시코 인들은 조약에 따라 미국인들로 편입되었으며, 그들은 ‘히스패닉’으로 알려진 중남미계 미국인들의 원조가 되었다.


멕시코 전쟁은 미국이 외국을 상대로 벌인 최초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으로 미국 내에서 상당한 반발을 초래했다. 초절주의 작가인 쏘로(Henry D. Thoreau)는 이 전쟁을 ‘미 제국주의자들과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이 일으킨 탐욕스러운 영토 약탈 전쟁’이라고 항의하며 납세를 거부해 투옥되었으며, 하루 동안 감옥에서 지내면서 느낀 생각을 정리해 <시민의 저항(Civil Disobedienc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기껏해야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정부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모든 정부는 이따금 쓸모가 없다.”


“미국인은 국민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를 대가로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노예소유와 멕시코 전쟁을 중지해야 한다.”


역시 초절주의자인 에머슨은 <채닝에게 바치는 시> 일부에서 종교인들의 위선적인 말과 정치가들의 호언을 비난하며 아래와 같이 썼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를,
더 나은 예술과 삶을
재잘대는 이는 누구인가?
가라, 발 없는 도마뱀이여, 가서
명성이 자자한 나라가
총과 칼로
멕시코를 괴롭히는 것을 보라!


이 전쟁으로 서부를 장악한 미국은 명실상부하게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1867년에 제정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구입하면서 사실상 북미 대륙에서의 팽창을 완료했다. 남은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이었다.



서부영화는 바로 이런 대륙팽창의 역사를 낭만적으로 재현했다. 서부영화는 미국 영화사와 함께한다고 할 만큼 주요한 장르다. 1903년에 나온 무성영화인 <대열차 강도>에서 1992년에 나온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지금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대륙을 정복한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주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서부영화는 대부분 남북전쟁 이후부터 대륙팽창이 완료되던 1890년대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광활한 서부평원에서 펼쳐진다.


19세기 말에 프런티어가 사라지면서 그 공백을 매운 것이 서부영화다. 서부영화는 미국사의 사실과 허구가 만나는 공간으로, 더 이상 뻗어나갈 대륙이 없다는 국민적 상실감을 영화가 파고들어 그들의 욕망을 대리만족하게 했다. 그런 만큼 대부분 서부 개척을 미화하고 합리화한다. 그 영화들은 허구로서의 ‘서부’와 그 속에서 활동하는 개척자들과 인디언들과 악당을 비롯한 무수한 인물들을 사람들의 가슴에 ‘사실’로 각인시킨다. 즉, 허구가 역사가 된 것이다.


그 시대는 미국인들에게 국가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위대한 시기였다. 미국은 동부에서 끝없이 팽창하면서 자연을 문명화시키고 야만인들과 투쟁하고 무질서와 혼란을 법과 질서로 바꾸면서 오늘날의 국가를 형성했다.


서부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상태이며 그것을 길들이고 문명화하는 것이 미국문화


서부영화는 끝없이 그렇게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존 벨튼(John Belton)의 말은 새겨볼만하다.


“서부영화는 한 시기에서 다음 시기로의 역사적 진행이 불가피한 것임을 제시하고 이러한 다윈적 자연도태 과정의 산물인 20세기 미국이 자연스럽고 옳은 것이라고 시사한다. 이런 식으로 서부영화는 현재를 정당화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서히 구축된 국가로서의 미국의 정체성을 재확인한다.”


서부영화에서는 힘과 정의는 흔히 동의어다. 정의는 힘에서 나오며 힘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의는 총구에서 나온다는 미국인들의 생각이 서부영화에\ 극명하게 구현되어 있다.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방아쇠를 당기는가에 따라 삶과 죽음, 정의와 불의가 결정된다. 실체로서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정의’가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중요하다. 결투는 바로 이런 정의를 구현하는 유효한 수단이며, 결투에서의 승리가 정의다. 물론 서부영화에서 말하는 정의는 허구적인 정의, ‘강자의 정의’다.


<역마차(Stagecoach>(1937)는 서부 영화의 문법에 충실하다. 이 영화는 톤토라는 서부의 한 마을에서 로즈버그라는 더 먼 서부로 가는 역마차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톤토는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반면 로즈버그는 무법이 판치는 세계다. 이 세계로의 여정은 문명에서 야만의 세계로 가는 여정인 동시에 그 야만의 세계를 법과 질서의 세계로 문명화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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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영화에서 역마차나 기차는 흔히 문명의 통로다. 역마차나 기차는 황야에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고 문명이 이식된다. 새 문명이 탄생하는 여정은 순탄치 않다. 무법자들이나 야만인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문명화에 저항하는 원시적인 힘의 상징이다.


<역마차>에선 여행 도중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것은 야만의 땅에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다. 또한 그 여정에서 사람들은 제르니모가 이끄는 아파치 족 인디언 부족의 기습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지만, 야만적인 인디언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며 마침내 기병대의 출현으로 역마차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 영화에서 인디언은 철저하게 침묵을 강요당한다. 야만인인 그들에게는 어떤 목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말은 문명인인 백인들만 할 수 있다. 인디언은 백인의 문명, 위기를 앞둔 백인들 사이의 강고한 유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신사도적인 배려를 빛낼 들러리다. 서부영화에서 인디언은 잔인한 야만인이거나 혹은 ‘고결’하다. 어디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인디언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없다.


서부영화에서 흔히 끼어드는 약방의 감초는 역경 속에서 빛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이다. <역마차>에서도 이 험난한 여정에서 탈옥한 죄수인 링고와 매춘부인 달라스는 서로 사랑하고 마침내 로즈버그에서 멕시코로 떠난다. 문명을 피해 원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서부영화에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문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정의가 실현되는 순간 다시 원시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들은 바로 문명의 선구자라는 역설적인 위치에 선다. 그들의 길을 따라 문명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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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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