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유명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벨기에’만 치면 ‘인종차별’이 연관 검색어로 나온다. 지난 21일에 방송된 JTBC2 ‘사서고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연예인 박준형이 벨기에 사람들한테 가해를 당한 장면 때문이다.
9월 21일 ‘사서고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된 장면
아내가 처음 이 장면에 대해 말해주었고 바로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쪽팔렸다. ‘벨기에 또 욕 먹게 생겼네’, ‘벨기에 이미지 망했네’ 하면서 속상했던 것도 잠시, 깊게 생각해보니 벨기에의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실제와 다른 면도 많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나라지만 인종 차별도 심하고 치안도 좋지 않다. 더 이상 벨기에를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벨기에의 인종차별
벨기에는 인종차별이 심한 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세기에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강대국이 되면서 '미개한' 콩고인들에게 벨기에의 문명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콩고의 풍부한 자원을 독점하는 식민국가가 되었다. 1885년부터 1960년까지 벨기에는 콩고를 잔인하게 지배했고 식민기간 동안 만국박람회에서 콩고사람들을 데리고 ‘인간 동물원’까지 만들기도 했다.
1958년 벨기에 만국박람회의 인간동물원
지금 이런 사실들은 충격적이지만 그때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에 협조하려는 벨기에 사람도 많았고, 그 후에도 인종차별을 선동하는 극우파 정당이 계속 지지를 받기도 했다. 요즘은 IS테러 때문에 반 이슬람 감정이 심해지고 있는데, 이런 감정을 이용해서 대중을 꼬시려는 극우파의 인기도 점점 커지고 있다.
또한, 이슬람 사람에 대한 인종차별과는 다른 수준이겠지만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존재한다. 아시아인을 보자마자 ‘니하오’라고 하거나 눈을 길게 당기면서 쳐다보는 한심한 벨기에 사람도 있다. 이런 인종차별은 벨기에의 전유물이 아니라 유럽 어디서든 경험할 수 있는 문제고, 대상만 다를 뿐 러시아, 미국, 호주, 동아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난 벨기에의 인종차별을 인정하면서 ‘사서고생’에 나온 장면의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 자 이제부터 ‘사서고생’ 사건이 드러낸 벨기에의 진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유럽의 치안 문제
‘사서고생’의 연예인 가해 장면은 브뤼셀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종차별의 참모습이 아니라 치안의 참모습 말이다. 박준형에게 시비를 걸었던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양아치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양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조롱하며 비하한다. 그 사람들의 진짜 목적은 소매치기나, 금품 탈취, 성폭행 혹은 묻지마 폭력이다.
인종을 가리지 않고 그냥 자신들보다 약해보이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제일 많이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비싼 브랜드를 입고 다니는 청소년들, 혹은 명품을 들고 다니는 관광객들, 아니면 혼자 길을 걷는 여성들이다. 벨기에 사람 누구나 그 프로그램에 나온 장면을 봤더라면 인종차별보다는 소매치기를 시도하기 위해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옛날 내 모습이 떠올랐다. 브뤼셀에 살면서 중고등학생 때 이런 비슷한 경험을 5번이나 당했으니까. 양아치 한 명이 친한 척 하면서 접근하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3-4명에게 포위돼 있었고 다들 내 어깨나 가슴을 두드리며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다. 항상 같은 수법이었다. 사춘기 전에는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는 대낮에 혼자 지하철 타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조금 컸을 때는 저항도 해봤지만 맞기만 하고 탈취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난 학생 때 브랜드 옷을 잘 입지도 않았고 시계조차 차고 다니지 않았다. 18살부터는 무술을 시작하기도 했다. 브뤼셀 치안 문제는 그만큼 심각하다.
그러나 치안문제는 브뤼셀 뿐만 아니라 유럽의 큰 도시 대부분이 좋지 않다. 내 경험대로라면 런던,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도 치안 문제가 심한 편이다. 한국의 치안상태가 특별히 좋기 때문에 유럽의 치안상태가 더 나빠보일 수도 있다. 이제껏 한국에 살면서 한국만큼이나 안전한 나라를 본 적이 없다. 유럽에서는 11시 이후에는 절대로 가면 안 되는 동네도 있고, 길을 다닐 때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 특히 지갑이나 가방을 조심해야 한다.
처음 한국에 와서 놀랐던 게 공항 리무진을 타고 대전에 가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자리에 가방을 놓고 화장실에 가는 모습이었다. 그 외에도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주운 사람이 전화를 받아서 주인에게 전달해 주는 것, 음식 배달부들이 오토바이 시동을 켜놓고 배달하는 것, 자동차 문을 깜박하고 안 잠가도 물건이 없어지지 않는 것, 카페에 노트북을 놓고 돌아다녀도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 것 등. 이러한 상황들이 다른 의미로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결론적으로 ‘사서고생’ 사건의 교훈은 유럽에 갈 때, 특히 여성은 혼자 밤에 돌아다니지 말 것, 소매치기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아내는 유럽에서 두 번이나 소매치기 당했다.
대한민국은 치안으로만 보자면 살기 좋은 나라다. 사실 한국인의 경우, 보기 드물게 치안이 좋은 나라에서 평생 살아왔기에 외국에선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제법 있어 슬프다. ‘사서고생’의 한 장면 덕분에 잠시라도 유럽 치안의 문제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안전한 나라인지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편집부 주 크리스님은 한국의 여러 정치적 상황과 역사에 대해 벨기에 신문에도 기고 중입니다. 여러분의 피드백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술도 잘 먹습니다. K리S의 지난 기사 |
K리S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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