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4월이 지나고 있다.


이번 편은 원래 3.1절 특집이었으나, 아이템 선정, 자료 수집 등 미묘한 애로가 있어서 늦어 졌다. 그 사이에 박근혜대통령은 탄핵되었다대한독립 만세!


강화양명학파의 전통과 산둥반도를 오가는 길목이라는 지정학적 특징 까닭인지, 강화도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연들이 많다. 이건창, 조봉암은 강화사람이며, 이동휘는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한다.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강화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강화의 바울'이라는 별호를 얻는다.) 김구선생과 강화도 부자 김주경의 인연도 TVN ‘동네의 사생활이란 프로그램에서 알려진 바 있다. 강화뉴스는 최근에 김구선생님의 강화 방문 관련하여 새롭게 발굴된 소식을 전했다.


이 사연은 추가 취재하여 보고하겠다.


  김구사진.jpg

관련기사 강화뉴스 (링크)


3.1절을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강화의 독립운동가를 조사했다. 여럿을 물망에 올렸지만, 강화도 태생 권애라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권애라를 강화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태어나기만 했지 자란 곳은 개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네이* 검색하면 출생지가 개성으로 나온다. 1920710일 종로경찰서 심문조서에는 권애라의 본적지가 경기도 개성군(개성은 경기도였다)으로 기록되어있지만, 192510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강화도에서 나고 4살에 개성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나온다. 결정적 증거는 5.16 때 해직된 부산대 정치과 이종률 교수의 <김시현 선생과 그 영부인의 전기>라는 자료다. 이종률은 해직교수 시절인 19619월에 서울 불광동 산비탈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던 권애라, 김시현 부부를 직접 인터뷰 한다. 솔까, 그렇다 해도 권애라는 개성사람이라는 게 더 맞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권애라편을 준비한 이유는 별거 없다. 꽂혔다.


강화의 독립운동가라고 우기려니 양심이 거시기 하다. , 쉬어가는 코너 정도로 해두자.


  권애라신문기사.jpg



120784710.png



...


이 이름 석 자는 강화뉴스에서 처음 접했다. 강화뉴스는 강화의 독립운동 역사를 발굴·기록 작업 중인데,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권애라가 교동 출신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권여사의 공식 기록은 많지 않다. 2012년에 출간된 권애라와 김시현이라는 책이 있는데, 구하기 어렵다. 세 번이나 인터넷 중고서적에서 품절로 인한 구매 취소 통보를 받았으니까. (결국 출판사 직구)


이번편의 90프로는 이 책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그 밖에도 수원일보 2010.3.25., 국민일보 2015.4.9., 번역가 박진영 블로그를 참고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다알고 보니 권애라 여사는 영화 <밀정> ‘공유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김시현의 부인이었던 것. 이 부부의 파란만장 대하드라마를 읽으며 찍신이 강림했음에 문안기도 올렸다. 한반도 근현대사에 사연 없는 이 없겠지만, 이 커플, 대박이다! 학창시절 눈물콧물 꽤나 뽑았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윤여옥 못지않은 감동의 서사시더라.


호들갑은 이쯤 떨고, 권애라 여사의 울트라초스펙타클 일생, 즉시 시작 한다.


권애라 연보

 

189703월 강화군 교동면 동산리 금정골에서 아버지 권태신과 어머니 황씨 사이에서 태어남

1898년 권애라 가족 망명하듯 교동을 떠나 개성 만월동으로 도망침

1903년 어머니 별세, 아버지 권태준은 김씨와 재혼

1910년 두을라여학교 초등과 졸업 후 중등과 진학(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교명 변경)

1914년 호수돈여고 졸업 후 이화여전 입학

191803월 이화여전 졸업

191902월 민족 33인 한명인 오하영으로부터 3.1독립선언서 인쇄물 보관

191903월 개성에서 3.1독립운동 후 검거. 징역 6개월 선고

191910월 출옥 후 YMCA 강당에서 박연폭포와 난봉가 부르고, 종로서에서 27일 구류

192010월 상해 임시정부 합류.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192109<극동약소민족대회> 참석위해 러시아로 떠남

19220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약소민족대회>에서 한국 민족대표 한사람으로 참석,

                    크레믈링궁의 넓은 회의 장소에서 김시현과 운명적 만남, 레닌의 주례로 결혼.

192211월 길림에서 아들 김봉년 출산

192301월 서울청년회 강연회에서 자유연애를 허하라를 주장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음

194204월 만주 길림에서 광복군 활동 중 아들과 함께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징역 12년 언도

19450815일 해방으로 장춘형무소에서 복역 3년 만에 출감

195005월 제2대 민의원선거에서 안동에 출마한 남편 김시현의 선거운동을 도움.

                     명연설로 청중들을 감동시켜 김시현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함

195206월 김시현,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으로 검거

196601월 김시현, 세상을 떠남

196706월 김시현의 지역구인 안동에서 국회의원 후보 출마.

                    위협을 느낀 공화당에 의해 납치되어 낙선

197310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aela.jpeg


1897
3, 권애라는 강화도 교동에서 태어난다. 안동권씨 집성촌에 살던 아버지 권태신은 독실한 천주교도였다. 교동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선진 문물 최초 부심이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 문성공 안향이 남송에서 공립학교인 향교를 들여와 제일먼저 교동에 세웠고, 천주교도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뿌리 내린 곳이 교동이다. 그렇지만 집안 어른들은 권태신의 신앙이 마뜩치 않았다. 권태신은 배교 하라는 문중의 영을 어기고 개성으로 야반도주를 한다. 개성으로 가기 위해 교동 동면 지석리의 밤머루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개풍군 관산마을 나루로 도강했는데, 아기 권애라의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안에 솜을 넣은 궤짝에 넣어 이동했다.


개성에 정착하자마자 권애라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계모 김씨의 손에 자란다. 계모라고 하니까 장화홍련이나 신데렐라에 출연하는 못된 새엄마의 이미지가 떠오르겠지만, 꽤 합리적인 처자였던 것 같다. 친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계모 김씨는 권애라의 등하교시 대문 밖까지 나왔고, 책가방과 학습준비물도 직접 챙겼으며, 이웃들에게 우리딸 애나는 여아지만 장차 큰일 할 인재라며 자랑했다고 한다. 해방 후 권애라가 계모 '김씨 할머니를 만나러 수시로 교동 본가에 다녀갔다고 하니, 권애라와 새엄마 사이가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된 권애라는 손녀에게 종종 콩쥐팥쥐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아무래도 계모 김씨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늘 친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 같다.


권애라는 당시로서 매우 드물게도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개성의 두을라여학교 초등과에 입학한다. 권애라는 이어서 중등과정도 수학하는데, , 두을라여학교의 교명은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로 바뀐다. 호수돈여고학생 권애라는 훗날 시인이 된 장정심과 쌍벽을 이루는 명물이 된다. 권애라는 음색이 곱고 음량이 풍부하여 노래를 잘 불렀는데, 호수돈여고에서 매년 열리는 학예회의 주인공은 권애라와 장정심이었다. 특히 권애라의 3단 고음은 관객들을 광분시켰다. ‘시의 장정심, 노래의 권애라는 개성바닥에서 아이돌 인기를 누렸다.


1912년 가을 어느 날, 열여섯 소녀 권애라는 장정심 손을 잡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 땡땡이를 친다. 피가 뜨거운 열혈 사춘기 소녀들은 조국의 명운을 개탄하며 울다가 확 삘을 받아서,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자는 맹세의 문신을 판다. 후에 권애라의 조카는, “애나고모 왼팔 겨드랑이쪽 안 보이는 곳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인증한다.


1914년 이화학당에 입학한 권애라는 오하영, 박인덕과 단짝친구가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권애라는 기숙사에서 동문수학 중인 2년 후배 유관순과도 자주 어울렸다.


191931일 거사를 앞두고, 미지의 인물이 편지 한 장과 인쇄물 한 보퉁이를 권애라에게 전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편지에는 '개성지역의 만세운동을 권선생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권애라는 일개 개인이 덤볐다가는 큰일을 망칠 수 있다고 판단, 개성의 여성 기독교 지도자인 어윤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권애라보다 20년 연상이었던 어윤희는 결혼 사흘 만에 동학군이 된 남편을 잃고 항일 투쟁에 젊음을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어윤희는 어린 너를 희생시키느니 나이든 내가 당하련다'며 개성지역의 3.1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어윤희.jpg

어윤희


3.1운동 직후 권애라는 북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권애라는 이런 저런 변장을 하고 주로 밤에 산길을 걸어 이동하였지만 검거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권애라는 토굴이나 다를 바 없는 여사 감방에 갇힌다. 후대에 여성 독립투사의 옥중투쟁 본부라고 추앙을 받게 되는 서대문형무소 8호에는 개성의 어윤희, 신관빈과,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도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호소로 만세를 부른 것 뿐이다”라고 일본경찰에 항의했던 시각장애인 심명철, 수원에서 잡혀온 기생 김향화, 그리고 천안에서 압송된 유관순이 모여 옥살이를 한다. 이화학당의 기숙사에서 친자매처럼 지냈던 권애라와 유관순은 해후하자마자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유관순은 허벅지 총상이 덧나 고통이 심했지만, 일제에 의해 부모를 잃은 슬픔과 고아가 된 동생들 걱정에 비할 바 아니었다.


유관순은 워낙 유명한 누나니까 패쓰하고, 걸크러쉬 언니 한 명을 짧게 언급하겠다. 자혜병원에서 만세를 외쳤던 수원의 기생 김향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는 325일 청년들과 학생들 주도로 수원시장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자극을 받아 수원 기생조합 조합장인 김향화는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조직한다. 일제는 기생들에게 한 달에 두 번씩 자혜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게 했는데, 김향화는 이를 이용하기로 한다. 329일 오전 11. 김향화의 선두로 기생들은 대한독립을 부르짖으며 시내를 누빈 후 자혜병원으로 향한다. 일경이 자혜병원에 다다른 기생시위대를 연행하자, 학생, 상인, 노동자를 비롯한 거리의 시민들이 병원을 에워싸고 만세를 부르며 기생들을 돕는다. 그날 밤 김향화는 구속되었고, 성난 군중은 석방을 외쳤다.


다운로드.jpeg


서대형무소 동방생이 된 권애라와 김향화는 보자마자 마음이 통했다. 권애라는 김향화에게 학교에서 배운 서양가곡을 알려주고, 김향화는 개성난봉가평양수심가등 타령을 가르친다. 김향화는 권애라의 민요를 듣고 기생 밥그릇 뺏는다.”며 칭찬한다. 기생의 노래 가락은 여염집 아낙들이 절대 입에 담지 않던 시대였다. 광화문에서 촛불 들고 박근혜를 구속하라외치다가 구치소에 수감된 유흥업소 아가씨와 운동권 대학생이 각자의 특기를 나누는 훈훈한 풍경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김향화에게 사사받은 개성난봉가는 권애라 평생의 개인기가 된다.


1920년 이후, 권애라의 20년 인생은 공식, 비공식 행보가 완전히 다른 이중생활이다. 출소 후 권애라가 상해임시정부(이하 임정) 교통국에 참여하면서 운명의 향방은 그렇게 흘러간다임정 교통국은 일종의 첩보조직인데, 권애라는 소속 요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권애라는 한국어,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불어 6개국 언어가 가능하고 피지컬과 멘탈이 남달랐던 준비된 스파이였다.


종로경찰서 조서를 보면, 권애라는 '정의도' 관련자로 나오는데, 정의도는 191911월부터 상해 임정 교통국을 설치하고 군자금을 만들다 붙잡혀 19215월 경성지법에서 4년형을 받은 시크릿 에이전트. 권애라는 종교교회 목사부인 이명희 소개로 정의도와 연결되어 지하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카톨릭 신자인 권애라는 총독부와 지척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감리교 계열 종교교회에 거주하며 호시탐탐 총독부 잠입을 계획했다. 권애라는 남자로 변장한 후 총독부에 위장취업 하여 극비 정보와 문서를 빼내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있는 상해 임정에 보냈다.


이 무렵 권애라는 모던걸’, ‘모던보이가 활개 치는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셀럽이었다.


강연회에 출몰한 권애라가 연단 위에서 조국독립, 무산동포 그 중에도 여성노동자 교육의 긴급성을 역설하면 대중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짜릿함을 느꼈다. 감시 중인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은 개거품 물며 강연을 중단 시켰고, 흥분한 군중은 발을 구르며 계속해를 외쳤다. 권애라는 관중들의 뜨거운 반응에 보답하고자 화제의 야심작을 내놓았는데, <개성난봉가>였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한 양복신사가 신성한 연단에서 감히 기생노래가 가당키나 하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권애라는 기생도 조국의 딸, 이 권애라도 조국의 딸, 난봉가도 조국의 노래, 조국의 딸이 조국의 노래 좀 하겠다는데, 너님은 뭐가 문제임?” 팩폭을 시전하고, 양복신사는 아닥한다.


s_2010_9000378.jpg


여기저기에서 옳소.”쫓아내라!”는 고함으로 장내는 아수라장이 된다. 누군가는 신흥 민주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급진적 신여성이라며 격렬히 찬양했고, 누군가는 개진상 똘아이라고 저주했다. 그리하여, 권애라는 '권난봉'이 되었다그렇지만 실상은 임정의 첩보요원이었으니, 비극에 물들지 않으려 했던 청춘의 몸부림이 아름답지 않은가.


첩보활동이 들킬 위험에 처하자, 권애라는 중국망명을 결심한다. 권애라는 망명길 사전훈련으로 생쌀과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준비한다. 권애라는 상해임정까지 비밀문서를 전달해야 했으므로 기차는 물론 자동차 이동도 불가능했다. 권애라는 '백도미'라는 일본여자로 위장한 후 일본을 경유하여 상해로 향했다. 권애라는 상당한 미모였지만, 남장이 더 잘 어울렸나보다. 미소년 변장 하고 서슬파란 총독부를 밥 먹듯 드나들어도 별 의심을 안 받았는데, 조신한 일본여자 코스프레는 대번에 들키고 만다. 상해행 여객선에 탑승한 권애라는 일경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한다. 배안에서 사귀게 된 다나까라는 중년여인은 솔직담백한 권애라에게 호감을 느꼈다. ‘다나까의 조력을 받은 권애라는 무사히 상해에 도착한다.


1921년 가을. 권애라는 애국부인회의 대표 자격으로 <극동약소민족대회> 참석을 위한 장도에 오른다<극동약소민족대회>1922121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코민테른 국제대회를 말하는데, 자본주의 열강이 워싱턴회의를 준비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코민테른은 사회주의혁명을 확산시킬 수 있는 모임을 개최한다.


19211111일에 소련의 자유시라고 불린 이르쿠츠크에서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제로 극동 여러 나라의 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대표자의 연석회의가 소집되자, 조선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피가 끓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다 검거되어 1년 옥고를 치르고 갓 출소한 김시현(드디어 공유 등장!), 일경의 현직 경부로서 남몰래 독립운동 중이던 황옥(영화 밀정의 송강호 실제모델)에게 여비 50원을 받아 이르쿠츠크로 떠난다.


다운로드 (1).jpeg


김시현은 뒤에 그의 전기를 쓴 이종률에게 황옥은 대회에 참석할 국내 대표자 20여명의 여행증과 여비를 제공했다. 황옥의 여행증 덕분에 국경을 무탈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나는 여운형, 나용균, 김규식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갔다.”고 증언한다. ‘황옥이 일본 앞잡이였는지, 의열단 스파이였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김시현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황옥동지로 여겼던 것 같다.


권애라는 '고려공산청년회중앙총국'에서 발행한 위임장을 발부 받았는데, 권애라와 동행한 김원경은 애국부인회 부회장 자격이었다. ‘극동약소민족대회에 참가한 조선인은 56명이었는데, 이 중 여성은 4명이었다.


애국부인회의 일반회원인 권애라가 파격 발탁된 배경에는 안병찬의 후광이 있었다. 안병찬의 소개로 이동휘가 이끄는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권애라는 핵심 당원이 된다안병찬은 1909년부터 평양에서 변호사를 했던 독립운동가인데, 이토 히로부미 총살하고 여순감옥에 갇힌 안중근의 담임변호사였다. 안중근의 두 아우 외에 그 재판을 부릅떠 지켜본 유일한 조선인이며, 325일 마지막 면회에서 안중근으로부터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받은 이도 안병찬이었다.


안병찬은 국무총리 이동휘 내각의 임정에서 법무차장을 지냈는데, 이 무렵부터 약 10년 동안 고려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의 내분과 반목이 극심했다. 19223, 안병찬은 만주에서 상대파벌에 피습되어 4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권애라는 1921년 9월에 상해를 떠나 만주에서 잠시 김좌진장군을 돕고 12월에야 이르쿠츠크에 당도한다. 김좌진장군은 다음해 겨울, 또 다시 만나게 된다.


1111일 개최 예정이었던 회의는 대부분 참가자들의 불출석으로 연기 된다. 일제의 눈을 피해 우회 하느라, 121일까지 이르쿠츠크시에 대상자의 절반도 오지 못한다. 대회는 이듬해인 19221월 말로 연기되고, 장소도 수도 모스크바로 바뀐다.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 집결해있던 조선민족 대표들은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과 인증샷 찍을 기대감에 환호한다.


1922121.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에서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극동약소민족대회>가 성대한 막을 올린다. 소련이외의 극동이역 참가자는 한국에서 온 56명을 비롯하여 9개 국가나 민족으로 총 144명이 출석한다.


372_633_1925.jpg


모스크바에서의 회의는 22일까지 13일간 진행된다. 무사히 대회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뒤풀이를 겸한 오락회를 열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예능인들이 기량을 펼쳤는데, 한국대표는 권애라였다.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도 사랑은 피어오르는 법우랄 알타이계 답지 않은 길쭉길쭉한 몸매의 꽃처녀 등장은 군부대 위문공연 여자 아이돌급 팬덤을 불러일으켰다권애라는 깜짝 놀랄 미성으로 개성난봉가박연폭포를 열창하여 전 세계의 뭇 사내들 가슴에 불을 지핀다. 용감한 남자가 미녀를 얻는다 했던가. 심장어택 당한 것은 김시현도 마찬가지. LTE급으로 프로포즈가 성사되고, 40세 김시현과 26세 권애라는 레닌의 주례로 만국의 대표들 앞에서 화촉을 밝힌다.


어멋, 역대급 로맨스네... 싶겠지만, 동심파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다.


빠밤.


김시현에게는 본부인이 있었던 것.


그때 그 시절, 반도의 흔한 연애사다부모의 명으로 조혼을 하고, 남편은 아몰랑 유학입네, 독립운동입네, 하며 온 세상을 떠돌고, 본부인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남편 대신 시댁 가족 봉양, 남편은 신여성이랑 멜로 및 애로 영화 몇 편 찍고.... 김은숙 로코인 줄 알았더니, 임성한표 막장드라마 주인공이 되어버린 권애라와 김시현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이냐?


끊기 신공 발휘하여 이쯤에서 전편의 막을 내린다.



투비 컨티뉴...





지난 기사


강화 섬사람 되다

월세집을 구하다

강화도 겨울나기

절기와 정월대보름

잘 먹고 잘 사는 법

잘 먹고 잘 사는 법 - 막걸리 편

강화의 사찰들

이기심의 미덕

강화도의 문인들

강화도에서 여름을 나는 곳

강화도의 몽상가들, 만화가 이우영

강화도 흥망성쇠의 역사

풍물시장에서 만난 특별한 청춘들

호주발 시베리아행 새들의 쉼터 강화

동네책방과 독서모임 

동네책방과 독서모임 

수제기타 '브라만' 제작자 곽웅수 장인

에필로그 : AI, 철새는 죄가 없다





셀러킴


편집 : 꾸물